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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가덕신공항 2029년 이후를 고민하자
“선배! 조~용합니다.” 21년 전인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40분께 부산경찰청 기자실에서였다. 석간 마감을 앞두고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경찰청 사건팀장에게 보고하는 순간, 기자실은 김해공항 인근 돗대산에 중국 민항기가 추락했다는 경찰 보고로 술렁였다. 긴박한 상황에 ‘고성’이 터져 나오고, 사회부·사진부 기자 모두가 김해로 내달렸다. 그렇게 시작한 공항 취재가 20여 년이 지나서야 일단락을 맺었다. 2024년 5363억 원 예산 투입을 시작으로 2029년 가덕신공항 개항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고추 말리는 공항’이란 수도권주의자들의 비아냥, 다른 지역과의 입지 갈등도 지나간 이야기가 됐다. 이제는 논의의 기준 시점을 2002년에서 2029년으로 옮겨야 할 때다. 20년간 토목과 교통, 수요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어떻게 공항을 운영할 것인가’란 주제 아래 공항 활성화와 대기업 유치로 고민이 바뀌어야 한다. 첫 번째가 가덕신공항을 허브로 삼아 전 세계를 이을 거점 항공사가 필요하다. 부산 북항에 돔구장을 멋들어지게 지었는데 거기서 뛸 프로야구단이 없는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때마침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합병 무산 가능성과 에어부산 분리 매각 및 아시아나 항공의 제3자 매각설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채권단인 산업은행이 에어부산 직원 승급 정지와 신규 조종사 채용 중단, 리스 비행기 반환 등 고사 작전에 돌입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다. 국내외 항공사를 유치해야 하는 부산 입장에서 부산 본사인 에어부산을 버릴 이유가 없다. 시간도 촉박하다. 대형 항공기 신규 리스에도 최소 3년이 걸린다. 에어부산이 지금 보유한 항공기 21대로는 장거리 운항은 물론이고, 가덕신공항 슬롯을 채우기도 부족하다. 항공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산업이다.
물론 지금 에어부산의 신용등급으로는 항공기 리스는 꿈조차 꾸기 어렵다. 자본력이 탄탄한 대기업이 긴 호흡으로 대규모 투자를 해야 현상 유지가 아닌 확장이 가능하다. 그룹 직원 출장 수요는 물론이고, 반도체, 바이오와 같은 경박단소형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해 자체 항공 화물 수요가 풍부한 회사면 좋겠다. 면세점·호텔 등 유통과 관광, UAM(도심항공교통) 항공 관련 사업을 갖고 있는 대기업이라면 시너지 효과는 어마어마할 수 있다. 부울경은 이런 대기업이 투자할 수 있도록 전봇대만 뽑아주면 된다. 자칫, 단기 매각 이익만 추구하는 사모펀드에 넘어가면 공중분해될 우려도 크다.
부산의 지역 상공인들도 컨소시엄 형태로 인수 의사를 피력했다고 한다. 한 기업 회장은 미국에서 초고속 비행기 구입을 문의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몇몇 기업인이 산업은행에 에어부산 분리 매각을 요청해 “9월 말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아시아나항공 51%, 지역 상공인과 부산시 49% 투자로 에어부산을 창업한 전례처럼 대기업과 지역 자본, 부산시와 시민펀드가 참여한 거점 항공사라면, 향후 지역의 ‘시민 기업’이 될 수 있다. 지역 상공인이 참여한 기업 DNA가 이어져야 지역과 상생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 명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LCC 통합 본사 유치의 꿈을 버려서는 안 된다. 단지 합병 불발 시 에어부산의 분리 매각에도 관심을 쏟아 거점 항공사로 확보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곧 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에 이어, 2030월드엑스포 유치 가부가 결정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지역 정치권은 새로운 이슈가 필요한 상태이다. 아시아나항공 채권단인 부산 본사 산업은행과 연계해 가덕신공항 거점 항공사 부산 유치를 지역 의제로 삼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열리는 셈이다.
두 번째는 배후 첨단산업부지 확보이다. 가덕신공항은 항만과 철도, 도로가 결합한 항공·해운·물류 거점이다. 그 항공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을 제조할 첨단산업기지가 공항 인근에 입지해야 한다. 11일 금양 이차전지 부산 기장 공장 기공식이 열렸다. 가덕신공항이 구체화되면서 부산이 첨단산업 유치가 가능한 환경으로 변모하고 있는 셈이다. 부울경은 원전 덕분에 전기 자급률이 높은 지역이다. 차등전기요금제까지 적용되면, 전기 수요가 많은 반도체, 이차전지 등 산업 인프라 고도화 가능성이 한결 커지게 된다. 김해와 양산, 강서, 사하 등에서 첨단산업단지 개발과 함께 행정구역 통합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
개항까지 6년,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고 있다. 지역의 수많은 청년이 경기도 원룸과 하루 2~3시간 출퇴근을 무릅쓰고 고향을 떠나고 있다. 일자리 때문이다. 지금부터 2029년을 준비해도 절대 빠르지 않다. 가덕신공항 유치 과정에서 쏟아낸 경제 효과 등 장밋빛 전망을 실현시켜야 국가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새로운 날개가 될 수 있다. 이제는 훨훨 나는 일만 남았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09-1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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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부산, 무엇으로 살 것인가?
“부산에 부자만 있고, 자본가는 드뭅니다.” 부산의 도전적인 산업계·학계 인사들은 한숨부터 내쉰다. 부산에 기술과 설비 등 제조 기반에 자본을 재투자해 신사업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하는 도전적인 기업인, 자본가를 찾기 어렵다는 속내였다. 세무사들도 지역에서 가장 뜨거운 분야가 ‘부자 상속’이라고 귀띔한다. 부산의 부자들은 부산에서 번 돈을 새로운 산업에 재투자하는 큰 그림보다는, 큰 상속세 없이 자식에게 물려줄 절세만 고심한다는 이야기다.
부산 부자들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대물림을 고민하는 사이, 국내외 산업 지도는 급변하고 있다. 부산만 갈수록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반도체·이차전지·자율주행차·전기차·바이오·인공지능(AI) 산업을 키우기 위해 추진 중인 국가첨단산업벨트·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부산은 제대로 뽑히지도 못했다. 파워반도체 특화단지로 겨우 체면치레했을 뿐이다. 파워반도체는 수도권의 메모리 중심 반도체와는 산업의 규모가 다르다. 그만큼 정부는 부산을 국가 발전 거점도시나 산업도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냥 구색 맞추기에 불과할 뿐이다.
정부의 첨단 분야 대학 지원 사업에서도 부산은 판판이 물을 먹고 있다. 지역에서는 바이오·이차전지 등을 앞세운 전남대, 전북대, 경북대 등이 싹쓸이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기조가 기업을 중심으로 예산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한 지역 대학 총장은 중앙부처에 R&D 예산을 신청하러 갔더니 “부산에 정부 예산을 받을 첨단기업이 있느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더라고 하소연한다. 파트너로 삼을 기업이 없는 슬픈 현실이다. 울산의 현대차, 경남의 우주항공, 경북 포스코가 이차전지, 수소 등으로 확장하면서 지역 기업과 대학을 4차산업으로 견인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다.
그 와중에 2일 전북 새만금산업단지에는 LS그룹이 1조 8400억 원의 ‘이차전지 소재 제조시설’ 투자식을 가졌다. 이어 에코프로·LG화학·SK온·GEM코리아 등 31개 첨단 기업이 이미 6조 6000억 원의 투자와 3만 2000명의 고용을 약속했다. 10년 뒤면 부산이 전북보다 산업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상황이다. 인천공항과 앰코코리아 등 반도체 패키징과 후공정 분야 세계 2·3위 기업을 갖고 있는 인천도 첨단 산업에서 부산을 앞서가고 있다. 부산에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변화에 편승하지 못한 것이 현재 박형준 부산시장의 탓만은 아니다. 박 시장도 취임 직후 초창기에 기업 유치를 위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을 만났다. 하지만, “검토해 보겠다”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현대는 울산, 두산은 창원 등 대기업 각자의 투자 지형도를 갖고 있고, 대기업 총수라도 자신만의 고집으로 이중 투자를 결정하기 힘든 구조다. 끊임없이 타진해야겠지만, 당장은 테슬라·삼성전자·LG 배터리와 같은 막강한 투자를 통한 지역 산업 생태계 형성은 불가능한 성장 방식이다.
그 사이에 지역은 미래 자동차는 물론이고, 반도체, 바이오는 꿈조차 꾸지 못할 정도다. 부산을 어떻게 키우자는 것인지, 어떤 산업으로 미래를 열 것인지, 인재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도 없는 상황이다. 정작 이를 주도하는 부산시는 온갖 MOU와 구호만 화려할 뿐, 구체적인 액션 플랜과 충분한 예산 확보, 전문성 있는 행정 지원은 보이지 않는다. 2030월드엑스포도 꼭 유치해야겠지만, 3차산업만으로 300만 이상의 대도시를 지탱할 수는 없다. 제조업이 없는 도시에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미국조차도 제조업 부흥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인프라법, 반도체법을 바탕으로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면서 기업 유치에 나서는 이유다.
결국 답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부산의 자본으로, 부산 기업 중에서 도전적인 중소·중견기업을 스타 기업으로 키우는 방법뿐이다. 시간은 결코 부산의 편이지 않다. 오지도 않을 대기업을 기다리느라, 세월만 낭비할 것이 아니라, 부산에서 쌓은 자본을 지역에 재투자해 첨단 산업을 일굴 새로운 얼굴의 자본가가 곳곳에서 성장하고 성공해야 한다. 그나마 최근 코렌스, 금양, 리노, 파나시아, 퓨트로닉 등 몇몇 지역 기업들이 전기차와 이차전지, 반도체, 환경 등 첨단 분야에서 분투하고 있다고 한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지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응원이 필요한 부분이다.
골든 타임은 지나가고 있다. 쇠퇴하는 전통산업에 안주해서는 미래가 없다. 변화에 편승하지 못하면, 그냥 그렇게 낙오될 것이다. 세계 각국은 물론이고, 국내 각 도시도 그렇게 뛰고 있다. 산업 지형의 개편, 이에 따른 인력 양성 시스템이 절실하다. 부산에 새로운 산업 지도를 그리기 위해 부자가 아닌 ‘자본가’들의 전성시대를 염원한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3-08-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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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윤석열 대통령의 영어 연설과 용기
부산일보가 영어 라디오 공중파 방송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산일보는 2009년 3월 갓 개국한 부산영어방송(e-FM)에서 시사토크쇼 ‘레츠토크부산’(Let‘s talk Busan) 프로그램을 매주 자체 제작했다. 트레일러를 운전했지만, 하여튼 카투사 출신인 점, 1년 6개월의 미국 연수 경험 등으로 ‘영어 특기자’로 차출돼 토크쇼 PD를 맡아 직접 방송 출연까지 했다. 3월 1일 첫 방송, ‘부산과 후쿠오카의 초광역경제권’이란 주제를 놓고, 미국 유학 경험이 풍부했던 장제국 동서대 총장(부산-후쿠오카포럼 간사), 부산시장 영어 통역까지 했던 전나용 부산시 주무관, 그리고 PD 겸 기자인 필자 등 3명이 1시간 동안 영어로 토크쇼를 진행했다. 1달간 비밀과외까지 받았지만, 방송 내내 머리를 원고에 박고 진땀 흘린 기억밖에 없을 정도였다.
매주 영어 토크쇼 제작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토론자 섭외였다. 부산에도 각 분야에 유학파들이 많지만, 대부분 영어 논문을 읽고 쓸 정도이지, 대중이나 생방송 마이크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섭외해도 손사래 치기가 바빴다. 그만큼 외국어는 물론이고 모국어로도 대중 앞에 서면 떨리기 십상이다. 전설적인 아나운서들도 대종상 같은 큰 무대에 서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떠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명해질수록, 나이가 들수록, 기대가 클수록 대중 앞에 서는 것이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프랑스 파리 제17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미래세대를 위한 대한민국의 약속’을 주제로 영어 프레젠테이션(PT)을 직접 했다. 미국 버클리음대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강남스타일’의 가수 싸이에 이어 무대에 올랐다. 윤 대통령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대한민국을 경제 강국으로 변모시킨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겠다”면서 “2030년 부산에서 만나자”고 강조했다. 유학이나 해외 근무 경험이 없는 윤 대통령이 영어로 전 세계 국가 대표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은 대통령이기에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부담이 많고,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다.
통역을 통해 화려한 의사 전달도 가능했겠지만, 심사위원은 대통령의 완벽하지 않은 영어 발음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성을 느꼈을 터이다. 상대방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국가수반이 그들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효과가 높을 수밖에 없다. 대단한 성의이기 때문이다. 그게 언어의 ‘다가가는 힘’이기도 하다. 역지사지로 외국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한국어로 연설을 한다면 더 큰 박수를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호소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올해 말 엑스포 유치에 성공하면 해피엔딩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윤석열 정부와 여당, 그리고 부산은 상당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야당은 반사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파리 현장에서 돌아온 유치위원들은 아직 경쟁 도시인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를 역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고 입을 모은다. 6개월 늦게 뛰어든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뒤엎을 핵심은 국가의 진정성과 추진 의지다. 대통령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이란 용기는 국내 기업 총수들에게도 더 뛸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유치 운동에 미온적이던 정치인, 기업인, 서울 언론인 등에게 ‘다 같이 뛰는구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효과도 낳았다. 2030엑스포 유치는 부산만의 지역 행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팀으로 총집결하는 국가 축제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그런 태도와 용기, 진정성이 너무나 고마울 따름이다.
11월 마지막 프레젠테이션과 BIE 회원국의 투표가 남아 있다. 부산과 대한민국은 끝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 고개를 넘어서야 다음, 그다음의 부산과 대한민국을 기약할 수 있다. 물론, 부산으로서는 도시 브랜드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기회도 됐다. ‘부산’이란 단어가 싸이, 조수미, SK·현대·삼성 등 민간유치위원회에 참여한 12개 기업 총수의 입에서 잠꼬대처럼 나오는 자체가 성과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부산에 대한 학습과 이해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미 부산은 ‘엑스포를 치를 수 있는 세계 도시’로 올라선 셈이다. 유치 활동에서 얻게 된 부수적인 성과이다.
윤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진정성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것이다. 파리 영어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줬던 그 추진 의지와 결기, 용기를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폭발적인 국가 에너지와 국민의 용기, 기업의 네트워크가 결집한다면 Mr. Everything(미스터 에브리띵)이란 사우디의 오일 머니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이 여름,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뛰는 모든 사람을 뜨겁게 응원한다.
2023-06-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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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일 원전 오염수 방류, '자국 설득'은 됐나
대마도는 한 해 한국인 관광객 41만 명이 찾던 일본 섬이다. 1980년 8월 11일 ‘아시아 물개’ 조오련이 부산 다대포 방파제에서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너 13시간 16분 10초 만에 대마도에 상륙했을 정도로 가깝다. 일본 본토 후쿠오카에서 147km, 부산에서 48km 거리다. 울창한 삼나무 숲을 통해 대마도 영봉 시라타케 정상에 오르면 바다 너머 거제도와 부산이 가물가물 보인다. 그런 대마도에 ‘핵폐기물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 유력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4일 규슈판에 “나가사키현의 낙도 대마도 상공회의소 등이 원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최종처분장 부지 선정 조사 논의를 시의회에 요구하는 청원서 제출을 검토한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어 13일에는 “대마도 건설업협회·협동조합은 최종 처분장 선정 1단계인 문헌조사 청원서를 시의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이제 겨우 공론화 단계이고, ‘돈 몇 푼에 아름다운 섬을 파느냐’는 시민사회의 반대도 있지만, “지역 진흥 기회”라는 대마도 상공회의소 회장의 인터뷰처럼 문헌 조사에만 들어가도 최고 90억 엔(한화 847억 원)의 교부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섬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일본 열도 건너 후쿠시마 바다에는 원전 ‘오염 처리수’ 해상 방류용 해저 터널 마무리 굴착 공사가 한창이다. 방류할 지점을 표시한 4개의 부표가 제거되면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간다. 원전 오염수 130만톤을 원전에서 1km 떨어진 바다에 약 30~40년에 걸쳐 방류하는 것이다. 일본 어업단체와 언론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일본 규슈 전역을 커버하는 니시니혼신문은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방출 서두르지 말고 이해 넓혀라’는 사설까지 게재할 정도다. 신문은 “정부는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해양 방출을 인가한 원자력규제위원회에 1000건이 넘는 민원이 접수된 것은 안전성에 우려가 많은 듯하고, 소비자가 후쿠시마 생선 소비를 꺼리는 것을 걱정한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 등 어업인들이 해양 방출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면서 “해양 방출을 무리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원전 폐로 작업이 공정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산케이신문은 29일 “원전 1호기 내부를 수중 로봇으로 촬영한 결과, 원자로를 지지하는 토대의 콘크리트가 소실되면서 철근이 노출돼 대형 지진이 발생할 경우 방사성 물질이 밖으로 흩어질 가능성도 있고, 최악에는 핵연료 잔해에 구조물이 떨어져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는 ‘재임계’(再臨界)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원전 바닥에는 폭발 당시 녹아내린 핵연료가 구조물과 엉겨붙은 핵 찌꺼기가 880톤이나 쌓여 있다. 앞으로 원전 핵 찌꺼기를 꺼내는 공법 개발까지, 결코 무 자르듯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후쿠시마 사고 원전을 둘러싼 엄중한 현실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일념으로, ‘관계자의 이해 없이는 어떤 처분도 하지 않겠다’는 2015년 약속과 일본 어업인의 저항, 언론의 문제 제기, 주변국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다. ‘과학적으로 무조건 안전하다’는 논리로 자국 어업인조차 설득하지 못하면서 주변국 어업인에게 어떻게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아파트에서 인테리어 공사만 해도 이웃들에게 양해와 동의를 구하는 세태와는 완전히 거꾸로다. 대마도에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유치 논의,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 등은 일본이 결정할 일이지만, 지척의 이웃인 부산과 경남 거제도 주민들의 걱정, 같은 바다를 끼고 있는 어민들의 우려도 진지하게 염려해야 한다. 국제법을 떠나, 그게 이웃의 마음이고, 인간의 도리다. 필요하다면, 일본 어업인에게 논의하는 보상을 한국 등 주변국 어민에게도 하겠다는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이 와중에 한국 정치권과 서울 엘리트들은 이런 중요한 문제는 외면한 채 서로의 지지층을 의식해 분열과 반목만 조장하고 있다. 서울은 바다가 멀어서일까. 갯사람들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가 보다. ‘방사능 테러’ ‘과학과 괴담의 싸움’ 등 프레임을 서로에게 씌워 내년 총선과 지지도 상승에 이용하는 데만 혈안이다. 일본 보수 우파들이 ‘과거 식민지 백성’들의 난장을 보면서 환호하고 있을 것이 뻔한 데도 말이다. 참고로, 일본 정부는 2018년 부산 고리원전에서 70km 떨어진 대마도 최북단 항공자위대 우니시마 기지에 방사능 측정기를 설치했다. “한국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나 일본에 방사성 물질이 날아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재 일본과 한국의 상황이 반대였다면, 일본은 어떻게 움직일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국가 간의 관계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대비하는 것이다. 친일과 반일로 나눠 청백전처럼 싸우는 2023년의 대한민국, 1910년 국권 피탈의 질곡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2023-05-3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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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서울 '지옥철', 해법은 간단하다
“서울 ‘지옥철’ 보도를 봤느냐”는 전화를 몇몇 기업인들로부터 받았다. 자칭 진보와 보수라고 행세하는 서울 언론들이 “경기도~김포공항역을 잇는 김포도시철도 출근길 압사 사고 우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대서특필했다. 정원을 훨씬 넘는 콩나물시루 같은 지옥철에서 3~4시간을 출퇴근하는 수도권 서민들의 서러움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연 특단의 대책이 있을까. 경기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도로망을 조기 착공하고, 버스 전용차로 신설, 한강에 통근용 리버보트를 운행하는 것이 해결책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사실 해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빙빙 둘러서 정답만 피할 뿐이다. 지하철과 도로가 들어가면, 역세권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지방 청년들이 몰려들고, 또다시 지옥철 사태가 재연되는 악순환이 수도권 일극주의 50년의 역사이다. 지옥철을 보도한 해당 언론조차 “국내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살며 대부분 서울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탓에 단순히 배차 확대만으로 지옥철 사태를 해결하기 어렵다”라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단지 모른 체할 뿐이다.
‘특단의 대책’은 기사 그대로 ‘수도권에 집중된 인구 절반’을 분산하는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여의도에 본사를 둔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정부와 국회가 합심하면 곧바로 이전 가능하다. 그런데 공공기관 지방 이전 문제만 나오면 진보·보수연하는 언론사는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까지 “국가 경쟁력을 잃어버린다”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에서 매일 3~4시간씩 걸리는 출근길에서 ‘죽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비효율적인 상황에서도.
그 기업인은 ‘불편함’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모든 사람이 다 서울에 살고, 서울에 본사를 둬야 일이 잘된다는 믿음, 그래야 모든 게 금방금방 대처할 수 있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자기 회사 서울지사 직원 대부분이 오전 7시 이전에 집을 나서야 9시까지 출근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때 서울 공공기관마저 계약 조건에 ‘서울에 본사가 있을 것’이라고 요구하던 시대에, 본사를 옮길 생각도 했지만, 수백 명의 직원들이 같은 월급에 생활·통근요건이 좋은 부산에 살고, 임원들만 2시간 30분 걸리는 KTX를 타고 서울로 출장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이후 베트남, 인도네시아에 격주로 다니는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줌을 통한 회의와 협의, 온라인 심사 등 비대면 업무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서 회사 소재지는 괘념치 않는 세상이 됐다. 금융권 거래의 90% 이상이 비대면이다. 산업은행 지하금고에 수조 원의 현금을 쌓아 두는 것도 아니고, 최고 갑(甲)인 국책은행 행원 모두가 현장 영업을 뛰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매일 3~4시간씩 지옥철을 갈아타고 헐레벌떡 출퇴근하는 게 업무 효율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활 환경이 좋은 서울에서 이탈하면 뒤처진다는 걱정, 서울에서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못 간다는 염려 탓이지, 국책은행과 국가의 효율, 목적을 따지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란 말이 ‘지옥철을 타도 서울이 좋다’로 들리는 이유다.
지옥철 뉴스가 보도된 그 신문에 ‘전국 초등학교 145개교 신입생 0명’ 기사가 실렸다. 96%인 139개교가 비수도권이었다. 경북(32개교), 전남(30개교), 강원·전북(20개교), 경남(18개교) 순이다. 6년 뒤면 저 숫자만큼 중학교 신입생이 0명이 된다. 지금도 청년들은 서울로 떠나는 중이다. 지방 소멸은 ‘예정된 미래’다. 하지만, 국가의 정책을 책임지는 국책은행과 공공기관은 ‘국가 효율성’을 들먹이며 모르쇠로 잡아떼고 있다. 웃픈 현실이다.
당대표는 서울에서 부패의혹, 전 당대표는 프랑스에서 돈봉투 살포 혐의를 해명하느라 바쁜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은 “산은이 이전하면 정책 금융 기능이 약화되고 업무 공백이 초래된다”라고 주장한다. 정치와 공공기관의 역할이 무엇인가. 지방의 비효율성이 우려된다면, 그런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IT강국에서 기관 간 협의조차 비대면으로 안 된다면 그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 뒤에는 어떤 이유가 반드시 있다. 회사일이 아니라 자기와 가족의 불편함, 수도권-지방 갈등을 증폭해 정치적 이익을 노리려는 망국적인 꼼수가 결탁한 것이 이유다. “언제까지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서울이라는 꿀단지에 빠져, 국토가 텅텅 비는 꼴만 쳐다볼 것인가. 그런 부끄러운 짓 그만둘 때도 됐다”는 기업인의 언짢음이 귓가에서 가시질 않는다.
2023-04-20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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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대심도, 안전 대한민국의 허상
1993년 3월 28일 일요일 오후 5시30분께였다. 낙동강 구포역 인근에는 봄꽃이 만발했지만, 꽃샘추위로 쌀쌀했다. 출입처인 경찰서에서 회사로 복귀하던 〈부산일보〉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에게 데스크로부터 삐삐(무선호출기)가 연속으로 울렸다. “경부선 구포역으로 당장 달려가라”는 지시였다. 부리나케 현장에 도착하니, 비명과 통곡, 널브러진 시신과 부상자로 아비규환이었다. 휴지처럼 찌그러진 객차 안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 수십 구가 뒤엉켜 있었고, 부상자들은 객차 틈새에 깔려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하늘도 슬펐는지 비까지 뿌리면서, 철로 주변은 빗물과 핏물 범벅이었다.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친 ‘구포 열차 참사’의 서막이었다.
한국전력 시공업체가 철도청에 허가나 통보조차 없이 경부선 철로 바로 아래에서 지하 전력구 공사를 벌이면서 무단 발파 작업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부산일보 사회부는 특별취재팀을 꾸렸고, 사고 한 달 전에도 인근에서 지하 붕괴 사고가 있었던 점을 밝혀내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연약 지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공 기간을 당기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사를 강행하면서 발생한 100% 인재였다.
구포 열차 참사 발생 30년 뒤인 지난달 25일 0시 40분 부산 대심도 공사 구간의 연약 지반에서 터널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부산 북구 만덕동과 해운대구 재송동 센텀시티를 잇는 대심도 공사 구간 지하 60m 깊이의 터널 천장에서 흙과 돌 1000t 정도가 쏟아져 내렸다. 25t 덤프트럭 수십 대가 동원돼야 옮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와 추가 붕괴가 없었지만, 지하 굴착 공사 중 붕괴 사고라는 점, 대형 건설사가 연루되어 있다는 점 등 30년 전 구포 열차 참사와 판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찔한 정황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시공사인 롯데건설은 사고 사실을 감독기관인 부산시에 10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보고했고, 부산시는 한술 더 떠 “섣불리 사고를 공개하면 시민들의 과도한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사흘간 사고 자체를 은폐했다. 황당하게도 산하기관인 부산교통공사에도 늑장 통보했다. 사고 현장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부산도시철도 3호선 만덕~미남역 구간에서는 지하철이 평상시처럼 70km로 달리다 27일 오후 5시께에야 뒤늦게 속도를 25km로 줄였다.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사고 지점 바로 위에는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 빌라가 밀집해 있다. 연약 지반에서 토사가 더 무너져 내렸다면 땅 꺼짐은 물론이고, 싱크홀 현상으로 대형 인명 피해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구포 열차 참사가 발생한 지 30년이나 지난 부산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와중에 “대심도 사업이 부산에서 도심지 구간에 최초로 건설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우려하시는 부분이 없도록 면밀히 살피겠다”는 부산시의 사후 약방문식 궤변은 누구를 걱정하고 챙기겠다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다. 사고 이후에도 현장 30m 지점에서 시민을 가득 태운 지하철을 쌩쌩 달리게 하면서, 사건을 사흘이나 은폐한 것이 혹여나 건설업체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는 아닌지 걱정스럽다. 혹여나 건설사의 입장을 ‘면밀히’ 고려해 땜질 처방으로 끝낼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방정부라면 시민 안전을 인질로 잡은 대심도 배짱 공사가 시민에게 과연 필요한지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대심도 건설은 기술이나 경험 부족으로 사고 위험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터널공법(TBM)으로 30~60m까지 땅을 파 지하에 도로나 지하철을 건설하는 대심도는 국내에 제대로 건설된 적이 없다. 오죽하면 중앙정부도 최근 ‘대심도 지하 고속도로 추진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안전성 확보 대책 마련에 고심할 정도다. 게다가 부산 대심도는 착공 이전에 지질 조사가 촘촘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연약 지반이 더 있을 수 있고, 사고 지점 전방 어디까지 불안정한 지층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구포 열차 전복, 세월호 침몰, 이태원 압사 등 최악의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반복됐다. 모두 말의 성찬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작 사고가 나면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 당사자는 찾을 수 없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죄 없는 국민만 눈물 흘릴 뿐이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의 안전 보장이다. 부산시는 재난 상황을 예방하고, 단계별로 대처하고, 이에 따른 예산과 조례를 마련해 집행하는 국가 행정기관이다. 시민의 생명이 걸린 일엔 언제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처해야 한다. 시민의 안전보다 소중한 가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산은 안전한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박형준 부산시장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023-03-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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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다이내믹 후쿠오카!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시 하카타의 호텔 프런트. 무의식적으로 집어 든 일본 규슈 최대 일간지 〈서일본신문〉에서 ‘규슈 관광의 부흥’이란 사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 대책이 대폭 완화되면서 일본 방문객은 꾸준히 늘었다. 해외 관광객 유치에 탄력을 붙여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규슈 해외 관광객 수는 이전보다 30~50%가량 줄었지만, 4개월 전부터 해외 관광객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2022년 11월 외국인 입국자 수가 12만 3538명으로 2년 9개월 만에 10만 명을 다시 넘어섰다. 후쿠오카국제공항은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만 2시간가량 걸릴 정도로 북새통을 이뤘다. 대부분이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하카타역 일대 호텔에도 여행용 트렁크를 든 커플 셋 중 하나는 한국어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일본이 해외 관광객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었다.
3년 만의 방문에서 놀란 것은 북적거리는 관광객만이 아니었다. 텐진은 물론이고 하카타역 인근 식당과 커피숍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석이었다. ‘이전에도 이랬나’라며 의아할 정도로 유동인구 대부분이 20~30대로 도시가 젊고 활기찼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겪고 있는 수도권 집중, 저출산·고령화,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후쿠오카만 비켜 간 듯했다. 텐진 다이마루백화점 옆 일본 전통식당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서일본신문 기자 선후배들은 그 해답을 ‘청년 인구와 좋은 일자리’로 설명했다. 2021년 경제 센서스 조사 결과 2016년에 비해 대부분 도시에서 코로나로 사업장과 취업자 수가 줄었지만, 후쿠오카시는 사업장은 물론이고 취업자도 4만 명 이상 증가한 몇 안 되는 도시였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구도 매년 8000~1만 명씩 급증하고 있다. 2013년 150만 명을 돌파하고, 지금은 163만 명 이상이 되면서 일본에서도 ‘가장 젊은 도시’로 주목받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후쿠오카시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통근·통학으로 도시에 들어오면서 낮 시간에 활동하는 주간 인구 비중이 야간 인구(거주 인구)의 109.8%를 차지한다. 베드타운이 아니라, 일하고 배우러 오는 활기찬 도시라는 점을 역설했다.
이들은 후쿠오카시가 자동차, 철강, 반도체, 관광 산업이 골고루 발전하고, 대학이 집적한 원인도 있지만, IT와 콘텐츠 산업이 발달하면서 좋은 일자리가 늘어났고, 도쿄보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교육 환경이 뒷받침되면서 도쿄로 떠난 젊은이들이 U턴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후쿠오카에서 취업자가 1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청년층 취업 비율이 높아지면서 소비 향상으로 이어지고, 아르바이트 등 저렴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공급하면서 다양한 서비스 산업이 다시 발전하는 선순환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도시를 역동적으로 변모시키는 모양새다. 물론 지방정부와 민간 기업의 협력과 창의성, 젊은 리더십이 큰 흐름을 만들었다.
기업 사무실과 호텔 공간 수요가 급증하면서 텐진과 하카타에는 도심 재개발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텐진 빅뱅’과 ‘하카타 커넥티드’ 프로젝트다. 단골 스시집 이소가이가 있던 이무즈 빌딩, 갈 때마다 앉아서 중고책을 고르던 츠타야 서점의 후쿠오카 빌딩, 텐진 비브레, 텐진 코어 등 건물 70개 동이 철거된 후 고층 빌딩으로 재개발되고 있다. 후쿠오카시가 보조금을 주는 대신에 용적률과 고도제한 규제를 풀어 부가가치가 높은 공간을 만들어 일자리도 창출하겠다는 목표다. 물론 텐진이 패션과 서비스 위주에서 오피스 빌딩으로 바뀌고, 시내 주거지가 밖으로 밀려나면서 생활환경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신텐초 상가의 운치, 골목의 감성이 사라진 것도 살짝 아쉽다. 서일본철도 하야시다 코이치 사장마저도 “작은 도쿄처럼 되고 싶지 않다. 후쿠오카만의 개성을 살려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였다.
한국인으로 가득 찬 귀국 비행기 안에서 의문이 생겼다. 지난 3년간 부산은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며 도시 경쟁력을 끌어올렸을까. 빗장을 푼 후쿠오카와 맞장 뜰 준비가 돼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지난해만 20대 청년 4277명이 떠나는 등 34년째 인구 순유출이 지속되는 부산, 지하철 이용객의 33%가 65세 이상인 ‘노인과 바다’의 도시, 부산의 해답을 후쿠오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부러우면 진다’라고 하지만,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부산이 역동성(Dynamic)이 떨어진 도시로 전락해도 괜찮은지(Good) 부산의 리더들에게 돌직구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답이 ‘아니오’라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부산의 미래를 위해서.
2023-02-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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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계묘년에 배워야 할 토끼의 지혜
호랑이의 해가 가고 ‘검은 토끼의 해’(癸卯年)가 밝았다. 귀를 쫑긋쫑긋 세우는 앙증맞은 모습의 토끼는 속담, 동요, 설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친숙한 동물이다. 힘센 호랑이로부터 목숨을 구하는 ‘꼬리가 얼어붙은 호랑이’ 설화에서부터 거북의 꾐에 빠져 용궁에서 간이 뽑혀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는 판소리 ‘수궁가’까지 권력자와 양반 아래 신음하던 민중의 한을 풀어 주는 단골 소재였다. 토끼는 한 번에 4~8마리의 새끼를 낳는 강한 번식력 때문에 다산과 번성, 풍요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십이지신(十二支神)이기도 하다.
2022년 엄혹한 코로나 시기에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말만 믿고 산 것처럼, 2023년 계묘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토끼와 관련한 고사성어와 속담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동물에 빗댄 삶의 많은 경험과 철학을 선대로부터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각 개인과 기업, 도시 부산과 대한민국 등 모든 주체가 토끼로부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심오한 전략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무엇보다 ‘현명한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숨을 수 있는 굴을 셋이나 판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의 지혜가 절실하다. 토끼들은 평균 1.5m 길이의 굴을 파는데 유사시에 대비해 비상구와 다른 굴과의 통로도 만든다고 한다. 초식동물로 먹이 사슬의 제일 아래인 토끼는 호랑이, 삵, 독수리, 매, 부엉이까지 사방이 천적이다. 안전과 방어는 당연한 생존 전략이다. 오죽했으면 ‘토낀다’는 말이 도망치는 토끼의 동사형일까. 새해는 저성장-고물가 복합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서민과 소상공인, 기업까지 각자도생 경쟁에 내몰리면서, 경제적 약자들에게는 생존 전략이 절실하다. 영끌 사태로 대변되는 코인과 주가, 주택 가격 급락을 비롯해 급등한 금리와 대출 제한,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와 구조조정 등 개인에게 들이닥친 위기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 기업, 도시, 국가 모두가 스스로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생존 전략과 포트폴리오를 촘촘하게 짜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으면 두 마리 다 놓친다’는 속담도 새겨들어야 한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돈과 명예, 일과 사랑처럼 동시에 성취하기 힘든 두 가지 목표를 욕심을 부려 쫓아다니느라, 하나도 제대로 못 건진 경우가 허다하다. 부산은 2030월드엑스포 유치와 가덕신공항 조기 착공이란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오는 4월 파리 세계박람회기구의 부산 현지 실사에는 2029년 공항 조기 개항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매립이든 해상 플로팅이든 6년 안에 3.5km 활주로 공항 완공을 전제로 2030부산엑스포를 개최할 수 있을지 셈법이 복잡하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자칫 길을 잃고 우왕좌왕할 우려도 있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노력을 기울이되, 어느 순간에는 전략적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시나리오도 세워 둬야 한다.
정치 리스크에 대한 토끼의 경고는 너무나 심각하다. 여야 정치권은 국민 통합은 포기한 채 극단의 진영 정치에 집중하고 있다. 콘크리트 지지층만 결집하는 ‘집토끼론’과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산토끼론’이 대표적이다. 국민 10명 중 4명은 정치 성향이 다르면 밥도 같이 먹기 싫어할 정도라고 한다. 손자병법의 ‘모든 곳을 지키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는 글귀는 적을 이기기 위한 사생결단의 군사 전략이지 국가 통합의 철학은 아니다. 실제로 산토끼와 집토끼는 유전적으로 교배조차 힘들다고 한다. 담장을 허물고 대화하고 반목의 매듭을 풀어야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시작하는 윤극영의 동요 ‘반달’에서처럼 달에는 ‘옥토끼’가 산다고 한다. 옥토끼는 계수나무 아래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절구로 방아를 찧고 있는 천년을 사는 영물이다. 594만㎞를 비행해 지난해 연말 달 궤도에 안착한 한국 첫 달 탐사선 다누리가 옥토끼의 근황을 영상으로 보내고 있다. 전설의 옥토끼에게 2023년 대한민국과 부산, 우리 개인은 어떻게 생존해야 하고, 어떻게 번성해야 하는지 지혜를 물어볼 참이다.
아마도 옥토끼는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용기를 가지면서 죽음 직전에 기지로 생명을 구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답할 듯하다. 교만하게 자신의 재주만 믿고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낮잠을 자다가 시대에 뒤처지는 ‘이솝우화’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을 것이다. 언덕 위를 향해 깡충깡충 뛰어오르는 토끼처럼 국민 모두가 2023년 행복과 행운이 가득 차기를 기원한다.
2023-01-0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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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간절함으로 도전하는 월드컵!
“폭풍을 뚫고 나갈 때 고개를 높이 들어라/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자/ 비록 너의 꿈이 상처받고 흔들리더라도 걷고 또 걷자/ 가슴속 희망을 품고/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 가사를 담은 응원가 ‘당신은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라(You’ll Never Walk Alone)’를 들으면 영국 명문 구단 리버풀FC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셰필드의 힐즈버러 구장에서 벌어진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FA컵 준결승전. 경기 시작 후 리버풀 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밀려 넘어져 96명이 압사한, 비극적인 ‘힐즈버러 참사’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경찰은 ‘리버풀 팬들의 무질서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리버풀구단과 팬들은 유족과 연대하여 ‘힐즈버러 가족 지지모임’을 결성하여 줄기차게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결국 영국 하원을 움직여 2010년 민간 주도의 ‘힐즈버러 독립 패널’ 구성으로 이어졌다.
2년 반 동안의 조사 결과 ‘경찰 과실과 시 당국의 부적절한 대응, 응급 구조 공조 실패’로 인한 참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리버풀 팬들과 구단은 201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시작 전 홈구장에 ‘진실’ ‘정의’ 두 단어로 관중석을 꽉 채운 뒤 리버풀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을 합창하며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추모와 연대를 표현했다. 축구가 지역 주민과 팬, 희생자 유족을 하나로 묶어 주면서 23년간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힘이 된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해안에서 10㎞ 떨어진 로벤섬 교도소에는 악명 높은 흑인차별정책에 저항한 넬슨 만델라 등 정치범들이 수감됐다. 재소자들은 교도소 당국에 “축구를 하게 해 달라”고 4년간 투쟁 끝에 1966년 매주 토요일 30분이 허용됐다. 1991년 감옥이 폐쇄되고, 흑인차별정책이 중단될 때까지 이곳에서는 매주 리그가 이어졌다. 축구는 야만적인 국가 폭력을 잊게 해 주고, 심신을 단련시키고, 노선이 다른 정치 집단을 결집하는 끈이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우리는 단순히 공을 찬 것이 아니고 축구를 통해 서로를 붙들어 주었다. 서로에게서 힘을 얻었다. 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일으켜 주었고 그 과정에서 둘 다 강해질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1954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스위스 월드컵에서 패전국 서독이 우승을 차지하는 ‘베른의 기적’이 연출되면서 전쟁의 폐허에 허덕거리던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 주고, 전후 경제 부흥의 촉매제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계층과 인구가 즐기는 축구는 이처럼 스포츠를 넘어서서 정치가들, 국민을 함께 뛰게 하고, 같은 희망을 품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다.
그런 축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21일 카타르와 에콰도르 개막전 호루라기 소리를 시작으로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열렸다. 24일(우루과이 전), 28일(가나 전), 12월 3일(포르투갈 전) 대한민국 대표팀과 5000만 국민은 심장이 터지도록 함께 달리고, 함께 고함을 지르고, 거친 태클에 함께 뒹굴면서 밤을 지새운다. 축구 선수가 존재하는 이유인 월드컵은 국가의 이름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선수 개인의 운명은 물론이고, 국가적 자부심과 민족적 열정을 표출하는 현장이다.
32개국 대표팀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한 몸으로 뛰면서, 모든 것을 쏟겠다는 간절함이 실력과 함께 승패를 결정짓는다. 그런 연유에서 검은색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얼굴 절반을 가려서 ‘쾌걸 조로’란 별명까지 얻은 국가대표팀 캡틴 손흥민(30·토트넘)의 메시지는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제가 뛰는 것이 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위험 감수는 제 몫이다. 1% 가능성만 있다면 앞만 보며 달려가겠다”는 승리의 열망 때문이다.
물론 부상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에 적응하고,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경기 시작 1분 만에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팀 승리가 너무 필요하고 기여하고 싶었다”면서 풀타임을 뛰고 승리(2020년 2월 16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애스턴빌라 전)를 거머쥐었던 그 간절함을 대표팀과 붉은악마 응원단,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공유하고 연대한다면 16강의 꿈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다.
국민 모두가 신새벽에 ‘승리를 위하여’ 응원가를 부르면서,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공은 둥글다. 누가 더 간절하게 한 몸으로 뛰고, 누가 더 모든 것을 쏟아붓고, 누가 더 한목소리로 응원하는가에 따라 그 공이, 그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 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타고난 재능과 투지, 승리에 대한 열망과 헌신, 공감과 존중이 한데 뭉쳐져 승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아름다운 이유다.
2022-11-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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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메가시티라는 허상과 거짓말
2008년 5월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는 ‘광역경제권 시대의 지역 발전 전략’ 토론회가 열렸다. 부산과 울산, 경남발전연구원과 국토연구원 박사들은 물론이고, MB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 분과 간사로 ‘5+2 광역경제권’ 정책에 관여했던 박형준 부산시장도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여했다. 박 시장이 토론회에서 정부 내부 기류를 묻는 기자에게 “지역에서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성취해야 한다”라고 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당시 토론회에서 “수도권 규제 완화는 현금이고, 광역경제권은 어음”이라면서 “광역경제권 구상이 수도권 규제 완화를 위한 명분 쌓기로 끝날 수도 있다”는 한 연구자의 주장이 눈길을 끌었다. “지역이 광역권 개발이라는 허상을 좇는 사이 경제 침체와 인구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수도권만 더 큰 공룡으로 키울 우려가 높다”는 경고였다.
노무현 참여 정부 시대부터 시작한 ‘초광역경제권’ 논의는 이명박 정부에서 ‘5+2 광역경제권’으로 구체화됐고, 박근혜 정부의 ‘중추도시권’, 문재인 정부의 ‘특별연합’ 지방자치법 개정안, 윤석열 현 정부의 메가시티 지방시대 110대 국정 과제 포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 년을 기다려도 황하(黃河)의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는다”는 백년하청(百年河淸)만 연상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일을 해결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론회에서 ‘설마~’라며 흘려들었던 그 경고는 섬뜩할 만큼 현실화했다. MB 정권이 끝나자마자 ‘5+2 광역경제권’ 정책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광역경제위원회와 광역교통본부는 동시에 간판을 내렸다. 광역 관광 마케팅은 논의조차 못했다. 광역권 토론회가 열렸던 해운대그랜드호텔이 허물어진 것처럼. 그런 10여 년 전의 일이 지난 12일 ‘부울경특별연합 파기 선언’과 함께 데자뷰처럼 일어나고 있다. ‘부울경 시도지사 회의’를 부산시청에서 가진 박형준 부산시장과 김두겸 울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은 실효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출범하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까지 마련된 정책을 포기한 셈이다.
특별연합 정책을 지지한 86.4%의 부울경 주민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낭패를 당했다. 초광역권은 물건너갔고, 수도권만 커질 거란 경고만 현실화했다. 그동안 지역에 일어난 변화는 쪼그라든 것 뿐이다. 부울경 인구가 빠르게 줄면서, 60.6%에 해당하는 읍면동이 소멸 위험에 처했다. 국내 경제 권역 중 지역 성장 잠재력은 최하위다. 지역 대학은 이젠 신입생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지경이다. 두려운 사실은 10년 뒤에는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심화되면서 변화를 시도할 세력이나 경제 활력의 모멘텀조차 갖추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막차가 떠나고 있는 판세다.
다 차려진 밥상을 엎은 부울경 단체장 3명은 “특별연합 대신에 ‘부울경 경제동맹’과 ‘부산·경남 2026년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지난 20년간 필요성만 거론됐을 뿐, 논의조차 못한 행정통합을 꺼낸 것은 합의 결렬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지역 간에 갈등을 부채질하고, 도시의 에너지만 낭비하는 꼴이다.
지역이 초광역권 꿈을 좇던 20년간 변하지 않은 점은 단 한가지다. 역대 정권이 지역 발전을 말로만 외쳤다는 사실이다. 메가시티는 윤석열 정부가 110개 국정과제에 포함시키고, 지방자치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지방시대 중추 정책이다. 그 지방시대를 열어 갈 핵심 이슈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대통령은 여느 정권처럼 수수방관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 병폐를 해소하고, 또 하나의 국가 성장 엔진을 만들겠다’는 선거용 대의는 희미해졌다. 애초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을 상대로 헛꿈만 꾸게 하는 역대 수도권 정권의 거짓말과 지방정부의 무능이 한심하다.
이제 와서 대통령과 중앙정부, 지자체장에게 메가시티 불씨를 살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소용이 없을 듯하다. 윤석열 정권의 지방시대 중심 정책이 사라진 이상, 부울경을 비롯한 전국 지자체는 당분간 각자도생을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소멸 중인 지역을 부활시키고, 국가 성장 엔진을 키워야 하는 모든 숙제는 윤석열 대통령과 부울경 단체장들이 져야 한다. 그 숙제를 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86.4%의 부울경 주민이 그간의 경험으로 무능인지 속임수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과 지자체장의 몫이다. 해답을 미리 알려 주자면, 우는 아이에게 엿이나 물려주는 ‘희망 고문’이 아니라, 운명을 걸고 지방시대를 펼치라는 민심이다.
2022-10-18 [1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