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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대심도, 안전 대한민국의 허상
1993년 3월 28일 일요일 오후 5시30분께였다. 낙동강 구포역 인근에는 봄꽃이 만발했지만, 꽃샘추위로 쌀쌀했다. 출입처인 경찰서에서 회사로 복귀하던 〈부산일보〉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에게 데스크로부터 삐삐(무선호출기)가 연속으로 울렸다. “경부선 구포역으로 당장 달려가라”는 지시였다. 부리나케 현장에 도착하니, 비명과 통곡, 널브러진 시신과 부상자로 아비규환이었다. 휴지처럼 찌그러진 객차 안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 수십 구가 뒤엉켜 있었고, 부상자들은 객차 틈새에 깔려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하늘도 슬펐는지 비까지 뿌리면서, 철로 주변은 빗물과 핏물 범벅이었다.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친 ‘구포 열차 참사’의 서막이었다.
한국전력 시공업체가 철도청에 허가나 통보조차 없이 경부선 철로 바로 아래에서 지하 전력구 공사를 벌이면서 무단 발파 작업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부산일보 사회부는 특별취재팀을 꾸렸고, 사고 한 달 전에도 인근에서 지하 붕괴 사고가 있었던 점을 밝혀내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연약 지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공 기간을 당기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사를 강행하면서 발생한 100% 인재였다.
구포 열차 참사 발생 30년 뒤인 지난달 25일 0시 40분 부산 대심도 공사 구간의 연약 지반에서 터널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부산 북구 만덕동과 해운대구 재송동 센텀시티를 잇는 대심도 공사 구간 지하 60m 깊이의 터널 천장에서 흙과 돌 1000t 정도가 쏟아져 내렸다. 25t 덤프트럭 수십 대가 동원돼야 옮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와 추가 붕괴가 없었지만, 지하 굴착 공사 중 붕괴 사고라는 점, 대형 건설사가 연루되어 있다는 점 등 30년 전 구포 열차 참사와 판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찔한 정황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시공사인 롯데건설은 사고 사실을 감독기관인 부산시에 10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보고했고, 부산시는 한술 더 떠 “섣불리 사고를 공개하면 시민들의 과도한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사흘간 사고 자체를 은폐했다. 황당하게도 산하기관인 부산교통공사에도 늑장 통보했다. 사고 현장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부산도시철도 3호선 만덕~미남역 구간에서는 지하철이 평상시처럼 70km로 달리다 27일 오후 5시께에야 뒤늦게 속도를 25km로 줄였다.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사고 지점 바로 위에는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 빌라가 밀집해 있다. 연약 지반에서 토사가 더 무너져 내렸다면 땅 꺼짐은 물론이고, 싱크홀 현상으로 대형 인명 피해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구포 열차 참사가 발생한 지 30년이나 지난 부산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와중에 “대심도 사업이 부산에서 도심지 구간에 최초로 건설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우려하시는 부분이 없도록 면밀히 살피겠다”는 부산시의 사후 약방문식 궤변은 누구를 걱정하고 챙기겠다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다. 사고 이후에도 현장 30m 지점에서 시민을 가득 태운 지하철을 쌩쌩 달리게 하면서, 사건을 사흘이나 은폐한 것이 혹여나 건설업체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는 아닌지 걱정스럽다. 혹여나 건설사의 입장을 ‘면밀히’ 고려해 땜질 처방으로 끝낼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방정부라면 시민 안전을 인질로 잡은 대심도 배짱 공사가 시민에게 과연 필요한지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대심도 건설은 기술이나 경험 부족으로 사고 위험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터널공법(TBM)으로 30~60m까지 땅을 파 지하에 도로나 지하철을 건설하는 대심도는 국내에 제대로 건설된 적이 없다. 오죽하면 중앙정부도 최근 ‘대심도 지하 고속도로 추진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안전성 확보 대책 마련에 고심할 정도다. 게다가 부산 대심도는 착공 이전에 지질 조사가 촘촘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연약 지반이 더 있을 수 있고, 사고 지점 전방 어디까지 불안정한 지층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구포 열차 전복, 세월호 침몰, 이태원 압사 등 최악의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반복됐다. 모두 말의 성찬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작 사고가 나면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 당사자는 찾을 수 없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죄 없는 국민만 눈물 흘릴 뿐이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의 안전 보장이다. 부산시는 재난 상황을 예방하고, 단계별로 대처하고, 이에 따른 예산과 조례를 마련해 집행하는 국가 행정기관이다. 시민의 생명이 걸린 일엔 언제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처해야 한다. 시민의 안전보다 소중한 가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산은 안전한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박형준 부산시장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023-03-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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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다이내믹 후쿠오카!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시 하카타의 호텔 프런트. 무의식적으로 집어 든 일본 규슈 최대 일간지 〈서일본신문〉에서 ‘규슈 관광의 부흥’이란 사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지난해 10월 코로나19 대책이 대폭 완화되면서 일본 방문객은 꾸준히 늘었다. 해외 관광객 유치에 탄력을 붙여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규슈 해외 관광객 수는 이전보다 30~50%가량 줄었지만, 4개월 전부터 해외 관광객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2022년 11월 외국인 입국자 수가 12만 3538명으로 2년 9개월 만에 10만 명을 다시 넘어섰다. 후쿠오카국제공항은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데만 2시간가량 걸릴 정도로 북새통을 이뤘다. 대부분이 한국인 관광객이었다. 하카타역 일대 호텔에도 여행용 트렁크를 든 커플 셋 중 하나는 한국어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일본이 해외 관광객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었다.
3년 만의 방문에서 놀란 것은 북적거리는 관광객만이 아니었다. 텐진은 물론이고 하카타역 인근 식당과 커피숍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석이었다. ‘이전에도 이랬나’라며 의아할 정도로 유동인구 대부분이 20~30대로 도시가 젊고 활기찼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겪고 있는 수도권 집중, 저출산·고령화,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후쿠오카만 비켜 간 듯했다. 텐진 다이마루백화점 옆 일본 전통식당에서 오랜만에 마주한 서일본신문 기자 선후배들은 그 해답을 ‘청년 인구와 좋은 일자리’로 설명했다. 2021년 경제 센서스 조사 결과 2016년에 비해 대부분 도시에서 코로나로 사업장과 취업자 수가 줄었지만, 후쿠오카시는 사업장은 물론이고 취업자도 4만 명 이상 증가한 몇 안 되는 도시였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구도 매년 8000~1만 명씩 급증하고 있다. 2013년 150만 명을 돌파하고, 지금은 163만 명 이상이 되면서 일본에서도 ‘가장 젊은 도시’로 주목받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후쿠오카시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통근·통학으로 도시에 들어오면서 낮 시간에 활동하는 주간 인구 비중이 야간 인구(거주 인구)의 109.8%를 차지한다. 베드타운이 아니라, 일하고 배우러 오는 활기찬 도시라는 점을 역설했다.
이들은 후쿠오카시가 자동차, 철강, 반도체, 관광 산업이 골고루 발전하고, 대학이 집적한 원인도 있지만, IT와 콘텐츠 산업이 발달하면서 좋은 일자리가 늘어났고, 도쿄보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교육 환경이 뒷받침되면서 도쿄로 떠난 젊은이들이 U턴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후쿠오카에서 취업자가 1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청년층 취업 비율이 높아지면서 소비 향상으로 이어지고, 아르바이트 등 저렴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공급하면서 다양한 서비스 산업이 다시 발전하는 선순환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도시를 역동적으로 변모시키는 모양새다. 물론 지방정부와 민간 기업의 협력과 창의성, 젊은 리더십이 큰 흐름을 만들었다.
기업 사무실과 호텔 공간 수요가 급증하면서 텐진과 하카타에는 도심 재개발 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텐진 빅뱅’과 ‘하카타 커넥티드’ 프로젝트다. 단골 스시집 이소가이가 있던 이무즈 빌딩, 갈 때마다 앉아서 중고책을 고르던 츠타야 서점의 후쿠오카 빌딩, 텐진 비브레, 텐진 코어 등 건물 70개 동이 철거된 후 고층 빌딩으로 재개발되고 있다. 후쿠오카시가 보조금을 주는 대신에 용적률과 고도제한 규제를 풀어 부가가치가 높은 공간을 만들어 일자리도 창출하겠다는 목표다. 물론 텐진이 패션과 서비스 위주에서 오피스 빌딩으로 바뀌고, 시내 주거지가 밖으로 밀려나면서 생활환경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신텐초 상가의 운치, 골목의 감성이 사라진 것도 살짝 아쉽다. 서일본철도 하야시다 코이치 사장마저도 “작은 도쿄처럼 되고 싶지 않다. 후쿠오카만의 개성을 살려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였다.
한국인으로 가득 찬 귀국 비행기 안에서 의문이 생겼다. 지난 3년간 부산은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며 도시 경쟁력을 끌어올렸을까. 빗장을 푼 후쿠오카와 맞장 뜰 준비가 돼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지난해만 20대 청년 4277명이 떠나는 등 34년째 인구 순유출이 지속되는 부산, 지하철 이용객의 33%가 65세 이상인 ‘노인과 바다’의 도시, 부산의 해답을 후쿠오카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부러우면 진다’라고 하지만,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부산이 역동성(Dynamic)이 떨어진 도시로 전락해도 괜찮은지(Good) 부산의 리더들에게 돌직구를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답이 ‘아니오’라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부산의 미래를 위해서.
2023-02-0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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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계묘년에 배워야 할 토끼의 지혜
호랑이의 해가 가고 ‘검은 토끼의 해’(癸卯年)가 밝았다. 귀를 쫑긋쫑긋 세우는 앙증맞은 모습의 토끼는 속담, 동요, 설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친숙한 동물이다. 힘센 호랑이로부터 목숨을 구하는 ‘꼬리가 얼어붙은 호랑이’ 설화에서부터 거북의 꾐에 빠져 용궁에서 간이 뽑혀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는 판소리 ‘수궁가’까지 권력자와 양반 아래 신음하던 민중의 한을 풀어 주는 단골 소재였다. 토끼는 한 번에 4~8마리의 새끼를 낳는 강한 번식력 때문에 다산과 번성, 풍요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십이지신(十二支神)이기도 하다.
2022년 엄혹한 코로나 시기에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말만 믿고 산 것처럼, 2023년 계묘년에는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토끼와 관련한 고사성어와 속담에서 살아갈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동물에 빗댄 삶의 많은 경험과 철학을 선대로부터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각 개인과 기업, 도시 부산과 대한민국 등 모든 주체가 토끼로부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심오한 전략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무엇보다 ‘현명한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숨을 수 있는 굴을 셋이나 판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의 지혜가 절실하다. 토끼들은 평균 1.5m 길이의 굴을 파는데 유사시에 대비해 비상구와 다른 굴과의 통로도 만든다고 한다. 초식동물로 먹이 사슬의 제일 아래인 토끼는 호랑이, 삵, 독수리, 매, 부엉이까지 사방이 천적이다. 안전과 방어는 당연한 생존 전략이다. 오죽했으면 ‘토낀다’는 말이 도망치는 토끼의 동사형일까. 새해는 저성장-고물가 복합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서민과 소상공인, 기업까지 각자도생 경쟁에 내몰리면서, 경제적 약자들에게는 생존 전략이 절실하다. 영끌 사태로 대변되는 코인과 주가, 주택 가격 급락을 비롯해 급등한 금리와 대출 제한,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와 구조조정 등 개인에게 들이닥친 위기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 기업, 도시, 국가 모두가 스스로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생존 전략과 포트폴리오를 촘촘하게 짜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으면 두 마리 다 놓친다’는 속담도 새겨들어야 한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돈과 명예, 일과 사랑처럼 동시에 성취하기 힘든 두 가지 목표를 욕심을 부려 쫓아다니느라, 하나도 제대로 못 건진 경우가 허다하다. 부산은 2030월드엑스포 유치와 가덕신공항 조기 착공이란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오는 4월 파리 세계박람회기구의 부산 현지 실사에는 2029년 공항 조기 개항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매립이든 해상 플로팅이든 6년 안에 3.5km 활주로 공항 완공을 전제로 2030부산엑스포를 개최할 수 있을지 셈법이 복잡하다.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에 자칫 길을 잃고 우왕좌왕할 우려도 있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노력을 기울이되, 어느 순간에는 전략적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시나리오도 세워 둬야 한다.
정치 리스크에 대한 토끼의 경고는 너무나 심각하다. 여야 정치권은 국민 통합은 포기한 채 극단의 진영 정치에 집중하고 있다. 콘크리트 지지층만 결집하는 ‘집토끼론’과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산토끼론’이 대표적이다. 국민 10명 중 4명은 정치 성향이 다르면 밥도 같이 먹기 싫어할 정도라고 한다. 손자병법의 ‘모든 곳을 지키면 모든 곳이 약해진다’는 글귀는 적을 이기기 위한 사생결단의 군사 전략이지 국가 통합의 철학은 아니다. 실제로 산토끼와 집토끼는 유전적으로 교배조차 힘들다고 한다. 담장을 허물고 대화하고 반목의 매듭을 풀어야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시작하는 윤극영의 동요 ‘반달’에서처럼 달에는 ‘옥토끼’가 산다고 한다. 옥토끼는 계수나무 아래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절구로 방아를 찧고 있는 천년을 사는 영물이다. 594만㎞를 비행해 지난해 연말 달 궤도에 안착한 한국 첫 달 탐사선 다누리가 옥토끼의 근황을 영상으로 보내고 있다. 전설의 옥토끼에게 2023년 대한민국과 부산, 우리 개인은 어떻게 생존해야 하고, 어떻게 번성해야 하는지 지혜를 물어볼 참이다.
아마도 옥토끼는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는 용기를 가지면서 죽음 직전에 기지로 생명을 구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답할 듯하다. 교만하게 자신의 재주만 믿고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낮잠을 자다가 시대에 뒤처지는 ‘이솝우화’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을 것이다. 언덕 위를 향해 깡충깡충 뛰어오르는 토끼처럼 국민 모두가 2023년 행복과 행운이 가득 차기를 기원한다.
2023-01-0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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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간절함으로 도전하는 월드컵!
“폭풍을 뚫고 나갈 때 고개를 높이 들어라/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자/ 비록 너의 꿈이 상처받고 흔들리더라도 걷고 또 걷자/ 가슴속 희망을 품고/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 가사를 담은 응원가 ‘당신은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라(You’ll Never Walk Alone)’를 들으면 영국 명문 구단 리버풀FC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1989년 4월 15일 영국 셰필드의 힐즈버러 구장에서 벌어진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FA컵 준결승전. 경기 시작 후 리버풀 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밀려 넘어져 96명이 압사한, 비극적인 ‘힐즈버러 참사’가 일어났다. 사고 직후 경찰은 ‘리버풀 팬들의 무질서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리버풀구단과 팬들은 유족과 연대하여 ‘힐즈버러 가족 지지모임’을 결성하여 줄기차게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결국 영국 하원을 움직여 2010년 민간 주도의 ‘힐즈버러 독립 패널’ 구성으로 이어졌다.
2년 반 동안의 조사 결과 ‘경찰 과실과 시 당국의 부적절한 대응, 응급 구조 공조 실패’로 인한 참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리버풀 팬들과 구단은 2013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시작 전 홈구장에 ‘진실’ ‘정의’ 두 단어로 관중석을 꽉 채운 뒤 리버풀 응원가 ‘You‘ll Never Walk Alone’을 합창하며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추모와 연대를 표현했다. 축구가 지역 주민과 팬, 희생자 유족을 하나로 묶어 주면서 23년간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힘이 된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해안에서 10㎞ 떨어진 로벤섬 교도소에는 악명 높은 흑인차별정책에 저항한 넬슨 만델라 등 정치범들이 수감됐다. 재소자들은 교도소 당국에 “축구를 하게 해 달라”고 4년간 투쟁 끝에 1966년 매주 토요일 30분이 허용됐다. 1991년 감옥이 폐쇄되고, 흑인차별정책이 중단될 때까지 이곳에서는 매주 리그가 이어졌다. 축구는 야만적인 국가 폭력을 잊게 해 주고, 심신을 단련시키고, 노선이 다른 정치 집단을 결집하는 끈이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우리는 단순히 공을 찬 것이 아니고 축구를 통해 서로를 붙들어 주었다. 서로에게서 힘을 얻었다. 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일으켜 주었고 그 과정에서 둘 다 강해질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1954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스위스 월드컵에서 패전국 서독이 우승을 차지하는 ‘베른의 기적’이 연출되면서 전쟁의 폐허에 허덕거리던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 주고, 전후 경제 부흥의 촉매제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계층과 인구가 즐기는 축구는 이처럼 스포츠를 넘어서서 정치가들, 국민을 함께 뛰게 하고, 같은 희망을 품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다.
그런 축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21일 카타르와 에콰도르 개막전 호루라기 소리를 시작으로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열렸다. 24일(우루과이 전), 28일(가나 전), 12월 3일(포르투갈 전) 대한민국 대표팀과 5000만 국민은 심장이 터지도록 함께 달리고, 함께 고함을 지르고, 거친 태클에 함께 뒹굴면서 밤을 지새운다. 축구 선수가 존재하는 이유인 월드컵은 국가의 이름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선수 개인의 운명은 물론이고, 국가적 자부심과 민족적 열정을 표출하는 현장이다.
32개국 대표팀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한 몸으로 뛰면서, 모든 것을 쏟겠다는 간절함이 실력과 함께 승패를 결정짓는다. 그런 연유에서 검은색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얼굴 절반을 가려서 ‘쾌걸 조로’란 별명까지 얻은 국가대표팀 캡틴 손흥민(30·토트넘)의 메시지는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제가 뛰는 것이 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위험 감수는 제 몫이다. 1% 가능성만 있다면 앞만 보며 달려가겠다”는 승리의 열망 때문이다.
물론 부상으로 인한 신체적 변화에 적응하고,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경기 시작 1분 만에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팀 승리가 너무 필요하고 기여하고 싶었다”면서 풀타임을 뛰고 승리(2020년 2월 16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애스턴빌라 전)를 거머쥐었던 그 간절함을 대표팀과 붉은악마 응원단,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공유하고 연대한다면 16강의 꿈에 조금이라도 다가설 수 있다.
국민 모두가 신새벽에 ‘승리를 위하여’ 응원가를 부르면서,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공은 둥글다. 누가 더 간절하게 한 몸으로 뛰고, 누가 더 모든 것을 쏟아붓고, 누가 더 한목소리로 응원하는가에 따라 그 공이, 그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 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타고난 재능과 투지, 승리에 대한 열망과 헌신, 공감과 존중이 한데 뭉쳐져 승패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아름다운 이유다.
2022-11-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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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메가시티라는 허상과 거짓말
2008년 5월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는 ‘광역경제권 시대의 지역 발전 전략’ 토론회가 열렸다. 부산과 울산, 경남발전연구원과 국토연구원 박사들은 물론이고, MB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 분과 간사로 ‘5+2 광역경제권’ 정책에 관여했던 박형준 부산시장도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여했다. 박 시장이 토론회에서 정부 내부 기류를 묻는 기자에게 “지역에서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성취해야 한다”라고 말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당시 토론회에서 “수도권 규제 완화는 현금이고, 광역경제권은 어음”이라면서 “광역경제권 구상이 수도권 규제 완화를 위한 명분 쌓기로 끝날 수도 있다”는 한 연구자의 주장이 눈길을 끌었다. “지역이 광역권 개발이라는 허상을 좇는 사이 경제 침체와 인구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수도권만 더 큰 공룡으로 키울 우려가 높다”는 경고였다.
노무현 참여 정부 시대부터 시작한 ‘초광역경제권’ 논의는 이명박 정부에서 ‘5+2 광역경제권’으로 구체화됐고, 박근혜 정부의 ‘중추도시권’, 문재인 정부의 ‘특별연합’ 지방자치법 개정안, 윤석열 현 정부의 메가시티 지방시대 110대 국정 과제 포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2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백 년을 기다려도 황하(黃河)의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는다”는 백년하청(百年河淸)만 연상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일을 해결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론회에서 ‘설마~’라며 흘려들었던 그 경고는 섬뜩할 만큼 현실화했다. MB 정권이 끝나자마자 ‘5+2 광역경제권’ 정책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광역경제위원회와 광역교통본부는 동시에 간판을 내렸다. 광역 관광 마케팅은 논의조차 못했다. 광역권 토론회가 열렸던 해운대그랜드호텔이 허물어진 것처럼. 그런 10여 년 전의 일이 지난 12일 ‘부울경특별연합 파기 선언’과 함께 데자뷰처럼 일어나고 있다. ‘부울경 시도지사 회의’를 부산시청에서 가진 박형준 부산시장과 김두겸 울산시장,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은 실효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출범하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까지 마련된 정책을 포기한 셈이다.
특별연합 정책을 지지한 86.4%의 부울경 주민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처럼 낭패를 당했다. 초광역권은 물건너갔고, 수도권만 커질 거란 경고만 현실화했다. 그동안 지역에 일어난 변화는 쪼그라든 것 뿐이다. 부울경 인구가 빠르게 줄면서, 60.6%에 해당하는 읍면동이 소멸 위험에 처했다. 국내 경제 권역 중 지역 성장 잠재력은 최하위다. 지역 대학은 이젠 신입생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지경이다. 두려운 사실은 10년 뒤에는 인구 감소와 초고령화가 심화되면서 변화를 시도할 세력이나 경제 활력의 모멘텀조차 갖추기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막차가 떠나고 있는 판세다.
다 차려진 밥상을 엎은 부울경 단체장 3명은 “특별연합 대신에 ‘부울경 경제동맹’과 ‘부산·경남 2026년 행정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지난 20년간 필요성만 거론됐을 뿐, 논의조차 못한 행정통합을 꺼낸 것은 합의 결렬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지역 간에 갈등을 부채질하고, 도시의 에너지만 낭비하는 꼴이다.
지역이 초광역권 꿈을 좇던 20년간 변하지 않은 점은 단 한가지다. 역대 정권이 지역 발전을 말로만 외쳤다는 사실이다. 메가시티는 윤석열 정부가 110개 국정과제에 포함시키고, 지방자치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의 지방시대 중추 정책이다. 그 지방시대를 열어 갈 핵심 이슈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대통령은 여느 정권처럼 수수방관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 병폐를 해소하고, 또 하나의 국가 성장 엔진을 만들겠다’는 선거용 대의는 희미해졌다. 애초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을 상대로 헛꿈만 꾸게 하는 역대 수도권 정권의 거짓말과 지방정부의 무능이 한심하다.
이제 와서 대통령과 중앙정부, 지자체장에게 메가시티 불씨를 살리라는 말을 하는 것도 소용이 없을 듯하다. 윤석열 정권의 지방시대 중심 정책이 사라진 이상, 부울경을 비롯한 전국 지자체는 당분간 각자도생을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소멸 중인 지역을 부활시키고, 국가 성장 엔진을 키워야 하는 모든 숙제는 윤석열 대통령과 부울경 단체장들이 져야 한다. 그 숙제를 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86.4%의 부울경 주민이 그간의 경험으로 무능인지 속임수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과 지자체장의 몫이다. 해답을 미리 알려 주자면, 우는 아이에게 엿이나 물려주는 ‘희망 고문’이 아니라, 운명을 걸고 지방시대를 펼치라는 민심이다.
2022-10-1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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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기후 변화와 자연 재해
“모든 전력을 상실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1·2호기 원자로를 함께 관리하는 중앙제어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계측기가 흔들렸다. 붉은 램프, 흰색 램프, 노란색 램프 등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깜빡이고 벨이 윙, 윙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화재경보기도 울렸다. 한번 껐다 켜자 경보기가 멈췄다. 오후 3시 27분 쓰나미 제1파, 오후 3시 35분경 제2파가 후쿠시마 제1 원전에 밀려들었다. 해발 4m 높이에 설치된 비상용 해수펌프를 삼키고 10m, 그리고 13m 위까지 솟구쳐 올라와 원자로 건물과 터빈 건물을 덮쳤다. 1·2·4호기는 내부 비상용 배터리로 움직이는 직류전원도 모두 상실했다. SOB-스테이션 블랙아웃, 교류전원 완전 상실이다. 모두 말을 잃었다.” 일본 아사히신문 후나바시 요이치 전 주필이 저서 〈후쿠시마 원전 대재앙의 진상〉에서 사고 상황을 묘사한 장면이다.
원전 사고… 위험한 건 전력 상실
원전 운영에 가장 큰 위협이 정전이다. 지진으로 전기가 끊기고, 낮은 지대에 설치돼 있던 비상용 발전기까지 바닷물에 침수되면서 원전 내 모든 전기 시설이 손상됐다. 후나바시 전 주필은 “후쿠시마 사고 당시 비상 매뉴얼북에는 교류와 직류 전원을 모두 상실해 전기가 일절 들어오지 않는 상황은 아예 없었다”면서 “직원들은 암흑천지의 중앙제어실에서 감과 전화로 상황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서술했다. 전기가 끊기면서 원자로를 식히기 위한 냉각수 펌프는 모두 멈췄다. 치솟는 원자로의 열기에 냉각수가 증발하면서 노심 온도가 1200도까지 상승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수백 개의 연료봉이 녹아내렸다. 그러자 엄청난 양의 수소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격납용기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압력밥솥 터지듯 폭발했다. 상상하기 힘든 방사성물질이 대량으로 대기와 바다로 대거 방출되는 ‘대재앙’이 발생했다. 모두 쓰나미에 의한 침수로 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 전체 침수와 블랙아웃
경북 포항시 포항제철소 공장 안으로 해병대 상륙함이 출동했다. 지난 6일 새벽 ‘괴물 태풍’ 힌남노로 인해 포항 일대에 50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면서 오전 6시 20분께 냉천이 범람을 시작했다. 강물은 포스코 내 발전소와 제2문에 위치한 변전소 전기 배전시설을 덮친 뒤 공장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변전소가 침수되면서 공장 전체가 블랙아웃에 빠졌다. 오전 7시. 여의도 면적의 3배가 넘는 포항제철소 대부분이 흙탕물에 잠겼다. 이어 만조를 타고 바닷물까지 공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예고된 태풍임에도 불구하고, 1973년 쇳물 생산 이후 49년 만에 처음으로 포항제철소 고로가 모두 멈춰 섰다.
포항제철소는 정전 사태를 풀기 위해 추석 연휴 기간에 하루 120만 원 일당까지 지급하면서 복구에 올인했다. 용광로는 겨우 재가동하기 시작했지만, 국내 유일의 전기강판과 스테인리스 등 최첨단 열연공장의 피해는 여전히 심각하다. 완전 정상화까지를 두고 산업부는 최대 6개월 이상, 포스코 본사는 3개월, 현장에서는 주요 전기 설비가 설치된 지하가 물에 잠겨 6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500년 만에 한 번 내릴 폭우와 만조가 겹쳤던 불가항력적인 부분과 냉천 상류 오어지의 홍수 조절 기능 부재, 냉천 하천정비사업과 구조물 문제, 포스코와 포항시의 불협화음 등 인재가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만 난무하고 있다. 확실한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 이변과 안일한 준비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재해라는 점이다.
‘괴물 태풍’ 가능성 점점 높아져
힌남노는 기후 관측 사상 처음 있는 태풍이었다. 태풍은 주로 적도 인근에서 발생하고,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북서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힌남노는 최초로 북위 25도 이북에서 발생해 반시계 방향으로 남서진하다가 급격히 북상하면서 다른 열대성 저기압을 흡수하며 ‘태풍 먹는 태풍’으로 커졌다. 제주도 한라산을 지나면서 “하늘이 뚫렸다”고 할 정도로 1년 내릴 양에 버금가는 1059mm의 비를 쏟아붓기도 했다.
걱정스러운 점은 괴물 태풍과 물 폭탄 등 이상기후 현상이 거의 매년 반복되고, 강도가 점점 세진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도 파키스탄은 폭우와 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기후 전문가들은 “예전에는 100, 200년에 한 번 오던 폭우가 이제는 2, 3년마다 찾아올 수 있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1년에 몇 번이고 ‘괴물 태풍’을 겪을 가능성도 한층 커졌다”고 지적했다.
태풍에 멈추는 원전, 과연 괜찮을까
한반도 태풍의 상륙 경로인 동해안을 따라 18개 원전(고리 5, 새울 2, 월성 5, 한울 6)이 밀집해 있다. 원전은 냉각장치에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바닷가에 입지한다. 이에 따라 태풍과 폭우, 해일 등에 따른 침수로 발전소 내부뿐만 아니라 송전선로 문제로 인한 외부전원 공급 차단 등 다양한 사고의 변수가 상존해 있다. 게다가 기존 원전은 고준위 핵폐기물 임시 적치장 역할까지 맡고 있어 예상치 못한 사고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실제로 태풍 힌남노 반경에 있었던 신고리1호기 원자력발전소가 수동 정지됐다. 신고리1호기는 당시 강풍으로 원전 터빈발전기에 영향을 줬고, 한수원은 전력 설비 이상을 사고 원인으로 추정했다. 태풍으로 인한 원전 가동 중단 사례는 과거에도 빈번했다. 2020년 9월 태풍 마이삭이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고리원전 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월성 2~3호기 등 8개의 원전에서 전력 계통 문제가 발생해 잇따라 가동이 중단됐다. 2003년 9월에는 태풍 매미로 고리 1~4호기와 월성 2호기가 동시에 정지되는 사고가 있었다.
물론, 해일 등에 대한 안전 조치도 차츰 이뤄지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3년 고리 원전의 콘크리트 해안 방벽을 기존 7.5~9.5m에서 10m, 총연장 2.1km로 증축하는 등 안전 설비를 강화했다. 하지만, 감사원은 2018년 “최고 해수위가 17m에 이를 수 있어 10m 방벽으로는 해일 등으로 인한 파고를 막지 못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운에만 맡길 수 없는 안전
기상청은 힌남노 내습을 앞두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피해를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포항제철소가 창사 이래 처음으로 공장 전면 침수와 3~6개월 조업 중단 사태를 겪고 있듯이, 원자력발전소도 이상 기후에 100% 안전하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을 총괄했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저서 〈나는 왜 탈원전을 결심했나〉에서 “화력발전소 화재 사고는 언젠가는 연료가 다 타버려 사고가 수습된다”면서 “이에 비해 원전 사고는 제어할 수 없는 원자로를 방치할수록 사태는 악화되고, 연료는 타지 않고 방사성물질을 대기와 해양으로 계속 방출한다”고 밝혔다. 간 전 총리는 “지금이라도 같은 사고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면서 “원전 사고는 한 민간 기업이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없고, ‘원전은 비용이 저렴하다’는 주장마저 붕괴했다”고 강조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마주 선 인류. ‘타지 않는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에는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모자람이 없다. 기상은 인간의 상상 이상으로 엄혹해지고 있고, 원전 사고는 단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2022-09-2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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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윤석열과 승리의 기술
‘다윗과 골리앗 싸움’은 신생 왕국 이스라엘의 투석병(기동포격 부대)과 지중해 크레타섬에서 이주해 온 해양 민족 블레셋의 중보병이 맞선 고대 전쟁이었다. 돌멩이 5개를 든 다윗은 30m 이상 먼 거리에서 초당 6~7회전으로 휙휙 돌린 물매로 돌을 날려 골리앗의 이마를 때렸다. 청동기 갑옷과 방패, 창으로 중무장해 몸이 무거운 골리앗은 날아오는 돌을 피할 틈조차 없이 맞고 쓰러졌다. 왜소한 양치기 다윗이 2m 거구의 전사 골리앗을 돌팔매질 한 번으로 이기는 드라마틱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응원하고 환호했다. 말콤 글래드웰은 ‘다윗과 골리앗-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 저서를 통해 “몸이 무겁고 시력이 좋지 않은 골리앗의 약점을 파악하고, 빠른 몸과 작은 돌로 목표물을 겨냥할 수 있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다윗의 전략이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다윗, 약자의 기술로 골리앗 쓰러뜨려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 극대화 전략
윤 대통령, 공정·정의로 정권 교체
집권 후 성공 방식 잃고 지지율 추락
“모든 동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상식·균형발전으로 민심 회복해야
성서적 관점을 빼고 보면, 윤석열의 정치 입문 전략은 약자인 다윗의 승리 기술과 비슷했다. 몸집(세력)도 작고, 경험(정치)도 없고, 후원자(소속 정당)도 없는 약자였다. 문재인 정권의 검찰총장 출신으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면서 임명권자에 맞선 강단, 속도와 기동력, 민심에 대한 자신감, 기존 정치권과 다른 신선함이 골리앗과 같은 진보 기득권을 무너뜨렸다. ‘공정, 정의, 상식, 민생, 지방균형발전’이 윤석열 대통령이 정권 교체를 위해 던진 다섯 개의 돌이었다. 이 돌팔매질이 거대 여당 갑옷을 입은 민주당 후보의 부패 의혹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약점을 정확히 겨냥하면서 승리했다. 정치 입문 1년 만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정권 교체라는 최고의 순간 이후 몰락하는 대한민국 대통령 흑역사를 반복할 조짐마저 보인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국정 운영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30%마저 붕괴된 상황이다. 70대 이상에서 긍정 평가가 과반수 나올 뿐, 보수 텃밭 영남권에서도 절반 이상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20~40대의 지지율을 잃은 상황에서 70대 이상, 극우파의 결집을 유도하는 극약 처방을 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5개월을 윤핵관의 권력 싸움으로 허송세월했다. 학벌 좋고 유능한 ‘검찰 동생’들과 학교 선후배를 중용한 인사,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온갖 잡음은 애써 그를 지지하려는 중도층뿐만 아니라, 보수 지지층의 등을 돌리게 했다. 근원적으로는 강자를 이긴 약자의 기술을 잃었기 때문이다. ‘공정, 정의, 상식, 민생, 지방균형발전’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기존 정치권과 다른 특유의 강단과 속도도 거품처럼 꺼져 버렸다. 정치적 부채가 없어서 탕평 인사와 명료한 정치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함께 사라졌다.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보수의 역량은 약에 쓰려도 찾기 힘든 지경이다.
왜 정권 교체를 했는지 아랑곳 하지 않는 권력 핵심의 오만과 망각, 이를 방치한 무능함 탓이다. 그 와중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장동·백현동을 비롯한, 성남FC 광고 수주, 변호사비 대납 의혹 해소는 고사하고, 오히려 민주당으로부터 ‘김건희·이재명 특검’이란 쌍특검 맞불에 이어 김건희 여사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되는 등 ‘야당 탄압’ ‘정치 전쟁’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
괴물 태풍 힌남노가 6일 새벽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동해로 빠져나갔다. 윤 대통령은 이런 초특급 정치 태풍을 앞으로도 여러 번 겪어야 한다. 태풍에 맞서 국정을 이끌고 개혁을 주도할 힘은 자신을 대통령 자리로 밀어 올린 ‘공정, 정의, 상식, 민생, 지방균형발전’을 실현하겠다는 초심이다. 말뿐인 희망 고문과 내로남불로 일관했던 과거 정권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이를 실천하는 길이다. 애초의 약속과 자신만의 승리 기술로 돌아가면 된다. 문제가 된다면 김건희 여사의 주변도 YS와 DJ 재임 기간에 자기 아들들을 사법처리하듯 상식과 원칙에 따라 정리하면 될 일이다. 그게 바로 민심이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 2대 왕에 오른 다윗도 절대 권력자가 되면서 점점 나태해졌다. 가장 가까운 장군의 아내를 임신시키고, 그 장군을 죽음에 내모는 등 숱한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운 절대자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반성했다고 한다.
이제 추석이다. 코로나 3년 차로 모처럼 모여 앉은 추석 민심을 잡기 위한 해답은 “모든 동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8월 8일 도어스테핑)는 윤 대통령 말에 있다.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지지와 성원이 언제든지 비판과 분노로 바뀔 수 있다”는 선언(2021년 11월 5일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되새기면 된다. 상식과 정의의 원칙으로 돌아가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을 보고 싶다.
2022-09-0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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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그깟 탈북자 하나라도!"
1단짜리 기사가 시작이었다. 해양수산부를 출입하던 〈부산일보〉 서울지사 기자의 기사 제목은 ‘한국 선원 7명 승선 페스카마15호 통신 두절’(1996년 8월 19일 게재)이었다. 부산해양경찰서를 출입하던 당시 4년 차 사건기자는 “뭔가 있다”라는 특종 욕심에 타사 기자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해경 형사계를 들락거렸다. 형사계 사무실에서 라면을 함께 먹으며 “우리가 남이가”라며 의리를 과시했던 고참 형사 3명이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형사계장을 닦달했지만, “여름휴가”라는 미심쩍은 답만 돌아왔다.
익숙한 해경 전화번호로 날라 온 삐삐(무선 호출기) 한방에 부산항 8부두 옆 해경 형사과로 뛰어갔다. “온두라스 국적 원양참치연승어선 페스카마15호(295t)에서 중국 교포 선원 6명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한국인 7명과 인도네시아인 3명, 중국인 1명 등 선원 11명을 흉기로 살해한 뒤 바다에 버렸고, 현재 부산항으로 예인하고 있다.” 긴장한 탓인지, 해양경찰서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대한민국 최초로 발생한 해상살인강도 사건의 서막이었다.
외교 분쟁을 우려한 일본 해상보안청은 한국 해경과 협의 끝에 자국 영해로 표류해 온 페스카마호를 공해로 밀어냈다. 수사관 등 체포조 30여 명을 태우고 급파된 3001구난함(3000t)이 용의자인 중국 교포 선원 6명과 페스카마호를 확보했다. 배가 부산해경 부두에 닿자 해상 범죄 베테랑 수사관들과 부산지검 검사 3명이 투입돼 선상 반란을 주도한 전재천 씨 등과 피해자 신문을 하고, 현장 검증보고서를 시간·장소별로 세밀하게 작성했다.
경찰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보름을 버틴 끝에 현장 검증보고서를 살짝 넘겨받아 ‘남태평양의 선상 반란’ 기사를 썼던 26년 전 기억이 갑자기 호출되고 있다. 2019년 동해상에서 나포된 ‘북한 오징어잡이어선 선원 살인 및 강제 북송’ 사건이 연일 정국을 강타하면서다. 두 사건이 판박이인 듯하지만, 페스카마호 취재기자의 눈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첫 번째가 아무리 자료를 살펴봐도 살해된 피해자가 15명인지, 16명인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범죄 동기와 피해자 인적 사항 등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 육하원칙에 따른 사실관계가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수사 경찰과 검사에 의한 현장 검증과 대질 신문도 없었다. ‘흉악범’이라는 거친 주장만 있을 뿐,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려던 적법한 노력은 애초부터 없었다.
두 번째가 페스카마호와는 달리 모두가 훤히 보이는 17t 짜리 소형 어선에서 선원 2명이 경험 많은 선장 등 동료 선원 15~16명을 분산·유인해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합리적 의심이다. 페스카마호는 선원 20여 명이 거친 남태평양에서 1년 남짓 살 수 있는 295톤급 참치잡이 원양어선이다. 조타실, 기관실, 침실, 선장실, 음료수·식량·어구 창고, 냉동창고 등이 미로처럼 나뉘어 6명이 다수인 11명의 선원을 개별적으로 유인해 조직적으로 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전 정권의 각료들이 “오빠 못 믿나”를 외치며 한국군의 SI(특별취급정보)와 합동심문 결과를 흔들고 있다. 합동심문은 위장귀순자나 위장간첩을 적발하기 위한 수준이지, 범죄 수사 전문가가 참여해 현장검증을 하는 제대로 된 수사는 아니다. 결국 15~16명이 살해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와 수사 결과조차 갖지 못한 채, 북한 선원을 강제 송환했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북한 어선과 용의자들에 대한 공개수사와 현장 검증, 재판과 자유로운 언론 취재가 진행되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면, ‘카더라’ 첩보에 의존한 정치 공방이 생길 여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최근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가 속한 법무팀이 강도상해 혐의로 기소된 탈북자 여성에 대한 공익변호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자 “영업에 지장을 준다”며 임원급 변호사가 불만을 토로한다. 우영우의 멘토인 정명석 변호사는 “그래도 그깟 탈북자 하나라고 생각하진 말자”라면서 적극적으로 변호해 집행유예란 최선의 판결을 받아낸다.
윤석열 정부도 “그래도 그깟 탈북자 하나라고 생각하진 말자”는 자세로 ‘해상 살인 및 강제 북송’ 사건의 실체적 진실만 제대로 밝히고, 문제가 있으면 관련자를 징계하면 그만이다. 혹시나 지지율 회복이란 당장의 욕심에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을 정치 쟁점화한다면 ‘전 정권 보복 수사’라는 멍에만 쓰고, 대한민국을 끝 모를 분열과 정치 투쟁에 빠뜨리게 된다. 사실은 명명백백하게 밝히되, 정쟁 거리로 비화시키지 않는 자제의 지혜도 필요하다. 그래야 잇따를 제2, 제3의 탈북 사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국가가 진정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peter@busan.com
2022-07-2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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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윤석열 대통령의 위기십결
“남 목숨 소중한 줄 아는 자라야만 내 목숨 소중한 것도 알 수 있는 법, 그런 마음으로 어찌 이기기를 바라고, 국수를 도모하리!” 명적사 조실 백산노장은 조선의 국수(최고의 바둑 고수)를 꿈꾸는 양반집 어린 도령 김석규에게 “돌을 거두라”고 일갈한다. 노장은 승부에 집착하는 석규에게 “나를 살리고 남을 죽이는 판가리(판가름)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친다. 바둑을 소재로 조선 말기 정치와 사회 현상을 세밀하게 파헤친 김성동 작가의 소설 〈국수〉의 한 장면이다.
중국 후한 시절 역사가 반고는 “천지의 조화도, 제왕의 정치도, 패군의 권세도, 전역의 방도도 모두 바둑의 이치에 감추어져 있다”라고 썼을 정도로 동양에서 바둑이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바둑에서 얻은 지혜를 삶에 적용하면서 다양한 ‘바둑의 비결’이 전해 온다. 대표적인 것이 당나라 현종 시대 지어졌다는 바둑 십계명 ‘위기십결’이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예측할 수 없는 수와 다양성을 갖고 있다. 착수된 돌들도 상황에 따라 역할이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바둑은 살아 움직이는 정치판과 유사한 면이 많다. 정치는 바둑돌처럼 하나하나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상대편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윤석열 새 정부의 인사와 전 정권 수사 급물살, 국회 공전 사태 등을 관전하면서 고비마다 위기십결이 떠오른다.
수천 년 얻은 지혜 동양 사회에 영향
바둑은 살아 움직이는 정치판과 비슷
억지로 이기려는 욕심은 실수만 유발
다르고 불편하지만, 공존도 생존 방법
거대 야당과 싸움보다는 협치 필요
상대 공격보다 자신의 내로남불 살펴야
첫 번째가 바둑계 전설 이창호 9단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한 ‘부득탐승’이다. ‘이기려는 목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바둑을 그르치기 쉽다’는 말이다. 특수통 검사로 승승장구한 윤 대통령은 이기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억지로 이기려는 욕심은 판세를 읽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위기십결에서는 ‘신중하고, 경솔하지 마라’(신물경속)고 경고한다. 경솔하고, 빠르면 수읽기를 덜 하게 되고, 착각과 실수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 이후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산업부 블랙리스트’ ‘여가부 대선 공약 개발’ 등 전 정권 수사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 “정치 보복”이란 비판에 “중대 범죄 수사는 국민 여망”이라고 대립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의 억울함은 당연히 풀어 줘야겠지만, ‘범죄와의 전쟁’ 같은 마음으로 이기려는 욕심과 서두름은 실수를 수반한다. 완생(집이나 돌이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을 놔두고 상대방의 미생(집이나 대마가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을 계속 추궁하면 완생마저 위태로워진다. 불편하지만, 가끔은 공존이 방법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높은 정권교체 열망에도 불구하고,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회에는 172석의 거대 야당이 포진해 있다. 위기십결에서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자중하고 자신을 보강한다’(피강자보)와 ‘세력이 빈약한 경우, 분란 대신 타협이 우선’(세고취화)이란 정석을 제시한다. 지지 기반이 약함에도 자기 능력만 믿고 상대의 집에 마구잡이로 뛰어들거나, 내 돌의 약점이 많은 곳에서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민주당이 반대하면 민생에 가장 시급한 유류세 추가 인하를 위한 법률 제정조차 할 수 없다. “의회주의를 늘 존중하겠다”라는 윤 대통령의 협치 약속이 꼭 지켜져야 할 현실적인 이유다. ‘강대강’ 대립에서 벗어나 야당과 협상으로 하나하나 푸는 것이 기리(수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이치)에 맞다. 혹시나,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면 상대방이 돌을 던질 것이라는 불계패의 기대는 접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게 가해졌던 법치주의 잣대를 스스로에게도 적용하는 ‘공피고아’(상대를 공격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점을 살펴라)도 중요하다. 만취 운전 경력이 드러난 장관 후보자, 검찰공화국으로까지 불리는 고위직 인사에서 문재인 정권의 대명사였던 ‘내로남불’이 지금은 없는지 냉철하게 따져 봐야 한다. 위선을 반복하면 패망하기 십상이다. 바둑에서는 유독 ‘버려라’는 말이 많다. ‘봉위수기’(위기에 처하면 버리라)가 대표적이다. 버릴 줄 모르면 결코 높은 수준의 바둑,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소설 〈국수〉에서 백산노장은 “삼라만상이 다 그렇듯 (바둑)돌 또한 살아 있는 목숨이니라. 이러한 이치를 모른 채 돌을 잡은 자… 다만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만 이끌려 있으므로… 돌을 죽일 뿐만 아니라 나를 죽이는 일이다”라고 설파한다. 윤석열 새 정부가 수천 년 쌓아 온 위기십결의 교훈을 경청하라고 훈수하고 싶다. 바둑 고수들은 한 수 한 수 목숨을 걸고 두다가도, 한번 지면 다음날 다시 두면 된다. 하지만, 5년 뒤 윤 대통령에게는 복기할 겨를도, 다시 새판을 둘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2022-06-2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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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정치에 무슨 품격…”
매년 5월이면 어김없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제2묘역에서 위쪽으로 걷다 보면 좌우로 천안함 46용사 묘역,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이 펼쳐져 있다. 어디에선가 트럼펫 진혼곡 소리와 함께 흐느낌이 터져 나온다. 그 슬픔 쪽으로 감히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6·25 전쟁 이후 72년, 일제 강점 이후 112년. 시대도 이념도 배경도 다르지만, 저분들의 피와 눈물, 회한과 애국심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다.
13만 8000여 영령을 품고 있는 100만 평 대전현충원 묘역은 단아하다. 흔한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듬은 봉분과 묘역의 잔디밭, 자원봉사자가 수시로 닦은 비석, 가지런히 꽂힌 조화를 보노라면 옷깃부터 여민다. 잔디 봉분과 비석만으로 희생에 보답하기에는 가당치도 않지만, 현충원에서 느낀 ‘국가의 품격’이 대한민국 사람이란 것을 뿌듯하게 한다. 한글을 지키려다 옥사한 선열들이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한글 가사 노래를 세계인이 흥얼거리는 모습에 “내 새끼들 장~하다”면서 환하게 웃으실 듯하다.
현충원 눈물·마음이 대한민국 떠받쳐
선진국, 국가의 기품 위해 노력
한국 정치, 국가 브랜드 갉아먹어
가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상식 이하
소용없는 복수에 함몰돼 내전만 거듭
통합·배려·대화로 국가의 품격 높여야
국립대전현충원에서처럼 국가도 개인도 갖춰야 할 위엄과 기품이 당연히 필요하다. 선진국은 국가의 품격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나라이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달포 이상 지난 한국 정치판은 “정치에 무슨 품격…”이라면서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자기편은 선, 상대편은 악’이라는 진영 싸움 깃발 아래 멱살잡이는 일상이다. 진영 내에서는 성추문마저 횡행하는 처지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작심 비판했던 ‘4류 정치’는 27년 뒤인 오늘 ‘5류 정치로 역주행’(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한 형국이다.
민간부문의 국가 브랜드를 갉아먹는 저질 정치는 지난 10일 각국 축하사절단과 정·재계 인사 등 내외빈 160여 명이 참석한 대통령 취임 기념 만찬에서도 드러났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와 만나 함박웃음을 짓자, 민주당 동료로부터 “진짜 바보인가” “웃음이 나오냐”라는 비아냥이 쇄도했다. 주빈인 거대 야당 대표 정치인의 미소가 비난거리가 되는 게 한국 정치다. 정책과 예산을 놓고 독하게 싸우더라도, 국가 만찬 그 순간은 환한 미소가 기본이다.
가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상식 이하다. 공식 임기 마지막 날 밤, 집도 절도 아닌 곳에 내쫓기듯 보내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후임에게 성공과 당부의 손 편지를 남기고 가는 미국 백악관의 관행은 기대하지도 않지만, 정권교체기 한국 신구권력의 드잡이질은 ‘역시나’라는 절망만 안겼다. 천년고찰 통도사 인근 고즈넉한 평산마을에 난데없는 욕설과 확성기 소음도 세상에 낯부끄러운 일이다.
19세기 영국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이 그저 자신의 쾌락과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품격이 있는 사람들은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할 것이고 이러한 감정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이라고 지적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우아한 사회를 만들고, 곧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국가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다. 갈등 없는 민주주의 국가는 찾기 어렵지만, 한국 정치판처럼 상대편을 굴복시켜야 하는 적으로 본다면 ‘폭력적 해결 방식’만 남게 된다. 대화와 포용을 통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본인과 지지층에게도 평생 앙금을 남기고, 역사에서 보듯 어떤 계기가 생기면 폭발한다.
이 시점에 “민주주의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서로 대화해야 하는데, 한국 정치는 복수에 함몰돼 내전을 벌이고 있다”라는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의 지적에 얼굴조차 들기 힘들다. 이승만 시대 한국 정치를 보고 “별 의미도 없는 소용돌이 같은 정치 투쟁 때문에 나라에 남아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갈파한 미국 역사학자(그레고리 헨더슨)의 회고가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아 민망하다. 그나마 16일 국회 본회의장 시정연설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당 측에 허리 굽혀 인사하고, 민주당이 기립박수 하는 모습에서 협치와 포용, 배려와 희망의 미래를 잠시 엿보았다.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여야 대치 정국은 천길만길 나락이다.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이 볼 수밖에 없다.
선진국은 높은 연봉과 비싼 아파트만으로 될 수 없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처럼 서로 다르지만, 국가를 위한 한결같은 마음이 합쳐진 우아함이 그 본질이다. 정치인들이 철마다 찾아와 헌화하며 고요함을 깨는 대신, 배려와 포용으로 스스로 우아해져 국가의 품격을 올리는 모습이 선열께 보답하는 길이다. 분열하고 역주행할 것인지, 포용하고 도약할 것인지 그 갈림길에 한국 정치가 서 있다. “우리 후손들 정말 장~하다”는 선열들의 함박웃음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
2022-05-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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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인사이트] '산업은행 이전 반대' 민주당 생각인가?
지난해 2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어업지도선을 타고 가덕신공항 예정지를 선상 시찰했다. 브리핑을 듣던 문 대통령은 “내가 관광 가이드 할게요”라며 마이크를 넘겨받아 “가덕도 연대봉 옆에 튀어나온 곳이 조선 시대 봉수대”라면서 자신의 고향 일대를 안내했다. 선실에서 문 대통령은 일행에게 “수도권 사람들이 지방의 아픔을 모른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5년 만에 경남 양산 사저로 돌아올 문 대통령은 ‘지방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느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앓고 있는 ‘인지 부조화’ 증상 때문이다.
신념과 행동의 불일치로 인한 불편한 상태, 지금까지 했던 가치 및 철학과 행동이 철저하게 부조화되는 전형적인 현실 부정을 심리학에서는 인지 부조화라고 일컫는다. 미국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발표한 인지 부조화 이론은 정치판의 자기 합리화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곧잘 사용된다. 어쩌면 인간이 자신을 속이고 자기 결정을 합리화하는, 아주 바보 같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최근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부산 이전에 대한 민주당 일부의 반대 행보는 정치권 인지 부조화 현상의 전형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 “수도권, 지방 아픔 모른다”
5년간 공공기관 이전 거짓말로 일관
민주당 의원들 ‘이전 반대’ 기자회견
“가자 20년!” 산은 이 회장 반발 앞장
균형발전 2003년 시작된 노무현 유업
윤 당선인 산은·수은 부산 이전 공식화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은행 직원들의 반발은 어쩌면 당연하다. 생활인으로서 ‘물설고, 낯설고, 말 설은’ 지방에 살아야 하는 두려움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공공기관 이전과 국가균형발전은 민주당 당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산업은행 지방 이전 공약을 철회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면서 국회 기자회견까지 열고, 이전 반대 운동을 지원하고 부추기고 있다. ‘노무현 정신’을 입버릇처럼 되뇌던 민주당 의원들의 스스로를 부정하는 듯한 이율배반적 모습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민주당은 언제부터인가 ‘노무현’ 이름 석 자만 들먹일 뿐, 그의 철학은 잃은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10월 국회 연설에서 “서울과 수도권은 이미 포화상태… 인력과 기술, 산업과 자본의 집중이 한계… 서울로만 올라오던 이삿짐 보따리가 지방으로 되돌아가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2개월 뒤 44석의 꼬마 여당이 국가균형발전특별법 등 지방화 3대 법률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보다 더 발전된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던 문재인 정권에서 ‘시즌 2’ 노력은 찾기 어려웠다. 여권 좌장인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수도권의 122개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추가 이전해 국가균형발전이 이뤄지도록 당이 책임지고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거짓말이었다. 5년 동안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다가, 대선에서 패배했다. 민주당은 윤석열에 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패한 것이다. 가업 정신을 잇기 위한 고통보다는, 유산 챙기기에 집중했다. 겨우 44석으로 통과시켰던 국가균형발전법을 172석 거대 여당이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정체성, 꿈을 잊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면서 실패에 대한 성찰은 아랑곳없다. 오히려 넋 잃고 반대로 내달리고 있다.
인지 부조화 증세는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산업은행 이동걸 회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노무현 정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출신인 이 회장은 이해찬 전 대표 출판기념회에서 “절실하게 다가온 말 중 하나는 (이 전 대표의) 우리가 20년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면서 “가자 20년!”이란 건배사를 제창했다. 그런 그가 노무현의 꿈이었던 ‘산은 부산 이전’에 반발하고 나섰다. “(산은)지방 이전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며 “(금융에 대한)이해가 부족하다”라고 반대하고 있다.
졌잘싸 망상에 빠진 민주당 172석의 뒷배를 믿거나, ‘20년 장기 집권’이란 인지 부조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울 지경이다. ‘지방시대’를 선언한 윤석열 당선인은 “기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전체의 균형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라면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부산 이전을 공식화했다. ‘노무현 시즌 2’를 보는 듯하다.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두관 민주당 의원이 국책은행 본점을 지방으로 이전할 수 있는 개정안을 2018년 이후 다시 대표 발의해 체면치레했을 정도다.
‘권모술수의 대가’로 오해받는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약속을 어길 땐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지난 5년 국가균형발전과 공공기관 지방 이전 약속을 어기고, 대선 패배 이후 몇몇은 오히려 반대하는 ‘정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혹여나 ‘윤석열 정권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모습이 처량하다. 국민은 묻고 있다. ‘산업은행 이전 반대’가 민주당 일부의 일탈인가, 아니면 당론인가. 민주당의 소중한 꿈은 무엇인가.
2022-04-07 [1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