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민국 고졸'이다 ⑦] 교수 파벌, 성추행, 과잠…과거에 기생하는 대학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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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디지털 청년기획 ‘고졸’
인권, 예술 꽃피던 대학이 ‘문제아’로
기득권, 서열에 취해 학력 차별 촉발
사회 전체가 경각심 가지고 개혁해야


<‘대학민국 고졸’을 곱씹으며>

대한민국 청소년은 매일 전쟁터에서 산다. 목표는 ‘좋은 대학’. 거기서 낙오한 아이들은 요즘 말로 ‘루저(패배자)’가 된다. 최소한 ‘괴물’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 처절한 경쟁 속에서 기를 쓰고 살아간다. 신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던 ‘대입 생존자’들 앞에는 더 큰 쓰나미가 덮쳐온다. 취업이다.

좌표 설정 없이 대학에 간 이들은 블랙홀 속에서 헤매기 일쑤다. ‘욜로(YOLO·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와 같은 말을 추종하며 현실을 탈출하려 하지만 세상은 요지부동. 좌절한 청년들은 더는 미래가 없다고 소리친다.

애초에 그들이 ‘고졸’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 엄청난 시간과 사교육비, 등록금을 꿈을 향한 일에 투자했더라면 어땠을까. 대학은 꼭 필요한 사람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일 순 없을까.

청년들의 꽉 막힌 숨통을 틔워 줄 근본적인 ‘혁명’이 그래서 절실하다. 고졸이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 고장 난 ‘대학 시계’

2012년 11월 마지막으로 열렸던 제36회 MBC 대학가요제. 부산일보 DB 2012년 11월 마지막으로 열렸던 제36회 MBC 대학가요제. 부산일보 DB

‘샌드 페블즈-나 어떡해’ ‘심수봉-그때 그 사람’ ‘높은음자리-바다에 누워’ ‘신해철(무한궤도)-그대에게’ ‘김동률(전람회)-꿈속에서’….

과거 대학가요제를 주름잡은 명곡들이다. 1970~1990년대 대학은 뜨거웠다. 학생운동으로 시끌시끌했고, 문화와 예술이 곳곳에서 꽃피었다. 시대의 선봉에서 사회를 이끌었다.

지금 대학의 모습은? 과잠(학과 잠바), 신입생 군기, 교수 성추행, 교수 파벌…. 끼리끼리, 수직적 위계 문화에 취했다. 난립한 사립대의 강의 수준에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는 저 멀리 달려가는데, 대학의 ‘그때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대학은 과거에 멈췄다.

지난달 29일 광주 서구.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이하 학벌 없는 사회)의 작은 사무실. 앳된 얼굴의 황법량 상임활동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생인 그는 대학이 제 기능을 잃었다고, 오히려 학벌 사회를 부추기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광주만 하더라도 광주형 일자리, AI 등 지역 현안에 대해 그 많은 대학이 수준 높은 보고서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산이나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서든 기득권은 유지하려고 하고….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국민도 ‘왜 우리가 이런 대학에 국고를 지원해야 하느냐’며 지탄하는 상황이 올 겁니다.”

우리 사회 깊숙이 퍼진 학벌 사회.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까. 우리 사회 곳곳에 퍼진 병폐의 깊숙한 곳에는 ‘대학’이 있다고 이 단체는 진단했다.


■ 옥상옥 ‘SKY캐슬’

학벌 없는 사회 박고형준 상임활동가. 정수원 PD 학벌 없는 사회 박고형준 상임활동가. 정수원 PD

서연고(서울대·연세대·고려대), 서성한(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 중경외시(중앙대·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 건동홍(건국대·동국대·홍익대)…. ‘최상위 클래스’부터 나열한 서울지역 대학 서열이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도 이 사이에 끼어 있다.

수험생들은 더 높은 대학을 위해 빠르면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전쟁’을 시작한다. 학부모들도 이들 대학이 수시로 바꾸는 입시 정책을 놓칠까 봐 눈코 뜰 새 없다. 주변에 대학이 넘쳐나지만, 굳이 ‘이 대학들’을 고집한다. 양질의 일터 즉 ‘미래’가 이곳에서 결정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대학 서열화에 빠진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학력 차별 철폐’를 외치며 지난 2011년 광주에서 출범한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 교수, 학생, 교사 등 30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지역 경계 없이 전국구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학벌 없는 사회를 실현하려면 ‘대학 개혁’이 필수라고 말한다. 결국 대학 서열화가 입시경쟁 풍토, 학력주의 인식을 촉발하고,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학벌 없는 사회 박고형준 상임활동가는 “수시, 정시 비율을 조정하며 경쟁의식을 고취하는 것도 사실상 대학 서열화의 중심에 선 수도권 사립대 역할이 크다”면서 “대학 서열화부터 뿌리 뽑아야 대학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진 왜곡된 교육 목적을 바로 잡고, 그에 맞춰 초중등 교육도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치열한 입시 경쟁 문화를 꼬집는 액자들이 학벌 없는 사회 사무실에 걸려 있다. 이승훈 기자 치열한 입시 경쟁 문화를 꼬집는 액자들이 학벌 없는 사회 사무실에 걸려 있다. 이승훈 기자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수능 자격고시화’ ‘국공립대 네트워크 구축’ 등이 그것이다. 수능 자격고시화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어느 정도 기준 점수 이상이 되는 수험생에게 대학에 갈 자격을 주자는 제도다. 국공립대 네트워크는 프랑스의 ‘파리 1~13대학’처럼 국공립대를 네트워크화해 학생을 공동으로 선발하고, 공동으로 학위를 주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국공립대 네트워크’ 정책은 이미 15년 전부터 제시돼 왔지만 여전히 공회전 중이다.

박고형준 활동가는 “이 2개 정책이 연동되면, 일정 자격을 얻은 수험생이 거주지와 가까운 국공립대에 입학할 기회가 열린다”며 “국공립대만큼이라도 경쟁을 줄일 수 있고, 이에 따라 학부모들의 불필요한 학비 부담이나 지역 인재 유출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건학 이념, 공공성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립대에 지원금을 확대하는 방안 등도 거론했다.


■ ‘내로남불’ 대학

학벌 없는 사회 황법량 상임활동가. 정수원 PD 학벌 없는 사회 황법량 상임활동가. 정수원 PD

이른바 ‘잘나가는 대학’ 학부생 A 씨. A 씨는 평소 거리에 나가 학생 인권을 외쳐왔다. 여러 청년·시민단체와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 사회의 문제를 꼬집었다. 그러던 중 ‘학벌 없는 사회!’라는 구호가 나오자 A 씨는 침묵했다. 더는 현장에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학벌 차별 정책에 찬성하는 쪽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학생인 황법량 상임활동가가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갈수록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가 약해지니까, 명문대 일부 학생은 노골적으로 학력 차별 철폐 반대편에 섰어요. 인권은 엄청나게 민감해하면서도 학벌 사회에는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 등 일부 대학 구성원의 비판 의식이 불균형하게 발달해 있습니다.”

그는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해 ‘대학 안’의 구성원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잠(학과 잠바), 축제 등 대학이라는 학벌을 상품화하고 브랜드화하는 크고 작은 행동에 비판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무조건 과잠을 입지 말자는 게 아니라, 너무 비판 없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얘기”라며 “대학 본연의 역할을 잊은 채 기득권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잘나가는 대학 과잠 문화에 대응해 만든 ‘평등(equality) 과잠’을 황법량 상임활동가가 입고 있다. 이승훈 기자 잘나가는 대학 과잠 문화에 대응해 만든 ‘평등(equality) 과잠’을 황법량 상임활동가가 입고 있다. 이승훈 기자

폐쇄적인 대학 문화를 꼬집듯 대학을 모든 시민에게 완전히 개방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황 활동가는 “궁극적인 목표지만, 이제는 넘쳐나는 대학이 지역 문화센터나 공공도서관처럼 누구든지 궁금한 분야에 대한 강의를 신청해 들을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며 “필요한 사람만 시험을 치고 성적 증명서를 발급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 구석구석 번진 학벌주의

학벌 없는 사회는 대학 문제가 촉발한 차별이 사회 곳곳으로 번져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취업’ ‘승진’처럼 익히 알려진 것부터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문제도 있다고. 대학생들만 동원 훈련에서 특혜를 준다든지, 현역병 입대 조건에 중졸, 고졸 등 학력 기준을 넣은 사례 등이다.

서울 유명 입시 학원을 빗대 만든 ‘머가스터디(주)’ 액자. 청소년 자살률 1위 등을 언급하며 ‘beast’(야수) 단어를 넣어 홈페이지 주소를 구성했다. 이승훈 기자 서울 유명 입시 학원을 빗대 만든 ‘머가스터디(주)’ 액자. 청소년 자살률 1위 등을 언급하며 ‘beast’(야수) 단어를 넣어 홈페이지 주소를 구성했다. 이승훈 기자

박고형준 활동가는 “병무청이 현역병 입대 자원을 늘리거나 줄일 때 고졸, 중졸 등 학력을 기준으로 삼았었다”면서 “보통 ‘군대 안 가면 좋은 것 아니냐’라고 하지만 이는 명백한 차별 사례며,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해 개선했다”고 말했다.

채용 시장의 학력 차별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다. 여전히 입사 원서에 대학명을 요구하는 등 학력을 기준으로 채용 기회를 박탈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는다고. 실제 학벌 없는 사회는 최근 국적 항공사가 승무원을 채용할 때 학력에 따라 지원 기준을 제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또 광양보건대가 직원 채용 과정에서 학력에 따라 배점을 다르게 한 부분을 이슈로 만들었다. 당시 광양보건대 총장은 결국 ‘조카 채용 논란’에 휩싸이며 파면되기에 이르렀다. 이밖에 광주 청소년 수련시설 등 지역 곳곳에서 학력 차별적인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박고형준 활동가는 “이는 단순히 광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라며 “여러 분야에 다양한 모습으로 학력 차별이 이뤄지고 있어 개선해 나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광주시 조례에 따르면 정원 30인 이상인 광주시 출자·출연기관, 공기업 등은 매년 신규 채용인원의 100분의 5 이상을 고졸자로 우선 채용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최근 3년간 이 조례를 이행한 기관은 겨우 4곳이었다. 광주시 조례에 따르면 정원 30인 이상인 광주시 출자·출연기관, 공기업 등은 매년 신규 채용인원의 100분의 5 이상을 고졸자로 우선 채용하도록 규정한다. 그러나 최근 3년간 이 조례를 이행한 기관은 겨우 4곳이었다.

■ 작은 변화

“우리 단체가 해산하는 게 우리의 최종 목표입니다. 존재할 이유가 없어져야 학벌 없는 사회가 될 테니까요.”

박고형준 활동가는 느리지만 우리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학벌 사회에 지친 학생과 학부모, 시민단체 등이 곳곳에서 노력하고 있는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대안학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줄고 채용 비리, 학력 위조가 쉽게 드러나는 등 사회 전반에 학벌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최근 학력에 의존하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 것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고 입을 모은다. 학벌 사회를 없애고자 하는 공감대가 아직 부족하다는 게 큰 이유다. 특히 교육청, 대학 등의 동참이 관건이다. 문제를 제기하면 정부 지침이 아직 정비가 안 됐다거나 예산이 없다는 등 책임을 ‘중앙 정부’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위학교 구성원들의 감시 활동도 필요하다.

박고형준 활동가는 “광주만 봐도 대학이 넘쳐나고 초·중·고교가 300여 개가 넘는다”면서 “시민단체뿐 아니라 일선에서도 꾸준히 감시 활동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구본창 정책국장은 “국공립대 네트워크가 국정과제 수립 단계에서 누락되는 등 이번 정부가 대학 서열화 해소는 시동도 걸지 못했다”며 “대학도 뽑는 경쟁이 아닌 가르치는 경쟁으로 체질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했다.

광주=이승훈·박세익·황석하 기자, 영상·편집 정수원 PD lee88@busan.com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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