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민국 고졸’이다 ⑧] 경쟁 안 하면 하향평준화? 거대한 거짓말!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부산일보> 디지털 청년기획 '고졸'
독일에서는 30대 고졸 소득이 대졸보다 높아
대학서열 없어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 수두룩
학생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부조리에 맞서야

<‘대학민국 고졸’을 곱씹으며>

대한민국 청소년은 매일 전쟁터에서 산다. 목표는 ‘좋은 대학’. 거기서 낙오한 아이들은 요즘 말로 ‘루저(패배자)’가 된다. 최소한 ‘괴물’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 처절한 경쟁 속에서 기를 쓰고 살아간다. 신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던 ‘대입 생존자’들 앞에는 더 큰 쓰나미가 덮쳐온다. 취업이다.

좌표 설정 없이 대학에 간 이들은 블랙홀 속에서 헤매기 일쑤다. ‘욜로(YOLO·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와 같은 말을 추종하며 현실을 탈출하려 하지만 세상은 요지부동. 좌절한 청년들은 더는 미래가 없다고 소리친다.

애초에 그들이 ‘고졸’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 엄청난 시간과 사교육비, 등록금을 꿈을 향한 일에 투자했더라면 어땠을까. 대학은 꼭 필요한 사람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일 순 없을까.

청년들의 꽉 막힌 숨통을 틔워 줄 근본적인 ‘혁명’이 그래서 절실하다. 고졸이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 고졸은 벤츠 타고, 대졸은 골프 타는 독일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교육정책 중 ‘3불(대학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보다 더 강력한 교육의 ‘4불’을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내용도 BTS 노래처럼 ‘다이너마이트’급이다. 3불의 고교등급제와 유사한 ‘특권학교 폐지’에다 ‘대학입시 폐지’ ‘대학서열 폐지’ ‘대학 등록금 폐지’가 4불의 핵심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주인공은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


한국 교육의 ‘4불(특권학교·대학입시·대학등록금·대학서열 폐지)’을 주장하는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 정수원 PD 한국 교육의 ‘4불(특권학교·대학입시·대학등록금·대학서열 폐지)’을 주장하는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 정수원 PD

지난달 20일 오전 서울 동작구 중앙대 캠퍼스. 김 교수의 연구실에서 온라인 강의 준비로 분주한 그를 만났다. 김 교수는 <부산일보>의 ‘나는 대학민국 고졸이다’ 기획 의도를 듣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을 표시하고, 귀를 의심할만한 독일의 실상 하나를 소개했다.

“독일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 세계에 뛰어든 사람을 ‘아추비(Azubi)’라고 해요. 그리고 대학에 가는 학생들을 ‘아비’라고 합니다. 아비라는 게 독일의 고교졸업시험 ‘아비투어(Abitur)’를 말해요. 독일에서 대학에 가려면 아비투어를 봐야죠. 대학에 가는 아비와, 고졸 아추비 사이에 통계적으로 임금 차이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실제로 한 40세 이전에는 아추비가 아비보다 수익이 좀 높아요. 그러니까 독일에서 ‘아추비는 벤츠 타고, 아비는 골프 탄다’는 말이 나오는 거죠.”


독일 고등학생 졸업시험인 ‘아비투어(Abitur)’가 진행되는 모습. 아비투어를 통과한 독일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지만, 25~34세 인구 중 대학 졸업을 마친 비율은 33.3%에 불과하다. DPA 독일 고등학생 졸업시험인 ‘아비투어(Abitur)’가 진행되는 모습. 아비투어를 통과한 독일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지만, 25~34세 인구 중 대학 졸업을 마친 비율은 33.3%에 불과하다. DPA

놀랍게도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졸업반인 4학년 즈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김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한 학생이 4년 동안 같은 담임교사와 지낸다. 교사는 20명정도 되는 학생을 맡으면서 학부모와 매달 상담을 한다. 즉 아이에 대해 100%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독일에서는 아이를 경쟁시켜 우열로 나누지 않는다. 아이의 개성과 소양, 취향에 관심을 둘 뿐이다”면서 “부모와 학부모가 4년 동안 아이를 두고 상시적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학부모는 교사가 추천하는 진로를 대체로 수용한다. 또한 학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 독일 학부모는 고졸을 더 원한다?

김 교수는 또 한 가지 대단히 흥미로운 독일의 사례를 설명했다. 독일 학부모들은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걱정을 한다고. “도대체 왜죠?”라는 질문이 절로 튀어나왔다.

“독일에서 기본적으로 대학에 간다는 건 학자나 예술가가 된다는 의미죠. 학자와 예술가는 미래가 불안정한 직업이에요. 만약에 교사가 학부모에게 ‘이 아이는 책 읽는 것 좋아하니 김나지움(Gymnasium·보통 9년제인 독일의 중·고교 과정) 보내서 아비투어 보게 하세요’라고 권유하면 부모들 대부분의 반응은 걱정이에요. 자기 애가 굶을 수도 있으니까요.”


올해 독일의 한 운동장에서 김나지움(독일의 중·고교 과정)의 아비투어 인증서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학생들. DPA 올해 독일의 한 운동장에서 김나지움(독일의 중·고교 과정)의 아비투어 인증서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학생들. DPA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일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대학 진학보다는 일반적인 직업 경로를 선택해 일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을 가장 바란다. 고등학교 단계에서 이뤄지는 우수한 직업교육의 수혜를 받고 졸업한 학생들은 다양한 직업 세계로 뛰어들 수 있다. 흔히 한국인이 인식하는 것처럼 독일에서는 고졸 출신이 열악한 환경 속에 단순 노무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독일 고졸이 취업하는 직업 세계에는 굉장히 다양하다. 은행, 증권회사와 같은 금융권은 물론 기술직, 행정직, 사무직 등 두루두루 진출한다”고 말했다.


이를 반영하듯 독일의 고졸자 고용률은 다른 국가에 견줘 상당히 높은 편이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고졸자 고용 현황을 보면, 독일이 82.8%로 가장 높다. 그 뒤를 이어 영국(81.4%), 프랑스(73.2%), 한국(72.2%) 수준이다. 한국의 고졸 고용률은 OECD 평균인 76.6%보다도 뒤처지고 있다.

우리 산업 현장에서도 ‘독일 모델’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부산경영자총협회 심상균 회장은 “일하면서 학습하는 독일식 모델이 우리나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고”고 말했다.


■ 노력으로 학벌 쟁취하는 시대는 끝났다?

한국의 고졸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현실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 체계와도 닿아있다. 우월감으로 무장한 서울의 일부 대학 출신과 모멸감을 내재화한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지방대 출신, 거의 ‘투명인간’ 취급 당하는 고졸자들이 함께 존재하는 게 한국의 현주소다. 10대 때 치른 단 한 번의 입시로 이 모든 게 결정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고소득층 출신의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학이 늘었다는 신문 보도. 중앙일보 문재인 정부 들어 고소득층 출신의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입학이 늘었다는 신문 보도. 중앙일보

더욱 심각한 것은 학벌이 대물림되는 현상이 강화되면서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계급이 됐다는 점. 김 교수는 “중산층 사회에서 학벌 세습이 나타나고 있다”며 “과거에는 서울대 입학생 절반 정도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기득권 계층이 더 좋은 학벌을 얻는 게 고착화됐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폐단을 뿌리 뽑기 위해 대학 입시를 없애고, 독일의 아비투어처럼 자격시험으로 전환해 학생들이 일정 점수만 받으면 모든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의 서열을 없애 야만적인 경쟁 교육을 뿌리 뽑는 것이다. 그럼 ‘하향평준화’의 길로 가자는 것인가. 김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독일도 1970년 이전에는 우리처럼 경쟁 교육 체제였어요. 그런데 ‘68혁명’을 계기로 1970년부터 대대적인 교육개혁이 일어나고, 교육 철학도 바뀝니다. 한 번 봅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딱 반세기가 지났죠. 그 이후에 독일 교육이 하향했다거나, 망했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김 교수는 독일 교육의 우수성을 가장 단순하게 볼 수 있는 지표로 노벨상을 꼽았다. 1970년 교육 개혁 이후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가 더 늘었다고 한다. 독일은 2019년 기준 노벨 과학상(물리학·화학·생리의학) 수상자를 70명이나 배출했다. 미국, 영국에 이어 3위다.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경쟁 교육을 시키는 한국은 현재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전무하다.

김 교수는 “한국의 교육이 이 보다 더 하향이 될 수 있나?”고 일침을 가했다. “우리나라에는 당분간 노벨상이고 뭐고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올 수 없다고 봐요. 이런 경쟁체제가 우리 잠재력을 다 죽여놨으니까. 학문적, 예술적으로 뛰어난 업적이 나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의 학문은 중하위권을 면치 못할 거에요. 경쟁 교육을 하지 않으면 교육 수준이 하향평준화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거짓말입니다.”


■ 서면·남포동에서 혁명의 촛불을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하면서 ‘교육개혁 공약’을 내세웠다. 대학 서열 체계를 극복하고 지식 암기 중심의 획일화된 수업과 평가를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 중심으로 개혁하겠다는 게 뼈대다. 문 대통령의 임기 하반기에 접어든 현재 정부는 이 공약을 지키고 있을까. 정부가 대학 서열화 해소 방안으로 채택한 것은 ‘국공립대 네트워크’와 ‘공영형 사립대’. 그런데 국공립대 네트워크는 국정과제 수립 단계에서 누락됐고, 공영형사립대 정책은 예산조차 편성되지 않은 상태다.

국공립대 네트워크는 프랑스의 ‘파리 1~13대학’처럼 국공립대를 네트워크화해 학생을 공동으로 선발하고, 공동으로 학위를 주는 것이다. 이 방안에는 서울대 수준으로 파격적인 예산을 배정해 대학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도 포함돼 있다. 현재 서울대의 한 해 예산은 8000억 원에 육박한다. 같은 국립대인 부산대의 2.47배, 경상대의 4.6배 수준이다.

경희대 사회학과 김종영 교수는 서울대와 지역거점국립대학 9곳을 넘어 기타 지역국립대학과 사립대를 포함해 5개 내외의 학교를 통폐합하는 작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지역거점국립대학 9곳부터 네트워크화를 추진하면 여기에 소외되는 다른 대학들의 반발도 뒤따른다”면서 “권역별로 지역 특성과 산업을 살려 대학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정부가 살인적인 경쟁 교육의 문제를 극복하기는커녕 ‘공정’을 앞세워 경쟁을 더욱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게 대학 입시에 정시를 확대한 결정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두고 정부가 우리 교육을 ‘야만’ 상태에서 ‘원시’ 상태로 후퇴시켰다고 단언한다. 김 교수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적인 경쟁을 부추기는 게 교육개혁이다? 말도 안되는 것이다”고 질타했다.


한때 프랑스 최고 대학이었던 소르본느 대학은 ‘68혁명’ 때 고등학생들의 요구로 해체됐다. 당시 소르본느 대학 앞에 모인 학생들. 부산일보DB 한때 프랑스 최고 대학이었던 소르본느 대학은 ‘68혁명’ 때 고등학생들의 요구로 해체됐다. 당시 소르본느 대학 앞에 모인 학생들. 부산일보DB

김 교수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고질적인 대학서열 문제, 학력·학벌주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이자 최대 피해자인 학생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 역사에서 모든 혁명은 ‘자기 혁명’이에요. 남이 대신해주지 않았죠.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을 노예처럼 묶어 놓고 정치적 미숙아 취급을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는 68혁명 때 고등학생들이 파리 시내를 휩쓸면서 소르본느라는 엘리트 대학을 해체했어요. 지금 파리의 모든 대학은 평준화 돼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부당한 현실에 맞서 스스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교사와 학부모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야죠. 필요하다면 남포동이나 서면에서 함께 촛불을 들어야 합니다.” -끝-

박세익·황석하·이승훈 기자 그래픽=노인호 기자 영상·편집 정수원 PD hsh03@busan.com

※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