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일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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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정치·사회 파트장

한국 정부의 강제 징용 피해자 보상 해법
피해자 개인보다 다수 국민 이익에 방점
일본은 과거사 사과할 수 있는 용기 내야

‘정말로 머리 좋은 혼은 태어날 때 어떤 나무에서 왔는지 기억하고 있지만, 경솔하게 입 밖에 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숲 속에 들어가 우연히 ‘나의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나이를 먹은 자신을 만나는 수가 있지.’

일본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집 〈‘나의 나무’ 아래서〉의 한 구절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비판하며 정치인들의 신사 참배와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1935년생인 그가 지난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 소식은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안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려졌다.


정부 발표와 오에 겐자부로의 별세 소식이 겹치면서 그가 미래 세대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쓴 이 에세이집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정부가 ‘제3자 변제안’을 강제징용 피해 보상의 해법으로 제시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2001년에 발간된 그의 에세이는 그가 자란 마을에 전해지는 ‘나의 나무’ 전설에서 시작된다. 뿌리에서 나온 혼이 사람이 됐다가 죽을 때 돌아가는 ‘나의 나무’가 마을 사람마다 있고, 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어린 내가 어른이 된 나를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오에 겐자부로는 그 전설을 듣고 어른이 된 나를 만나면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과거와 미래가 이어져 있는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되는 ‘나의 나무’ 전설은, 우리의 아이들이 현 세대에게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묻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안을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으로 표현하는 대목은 개운치 않다. 공정의 가치와 인권 감수성이 이전 세대보다 높은 미래 세대가 개인의 피해 회복보다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다수의 이익에 방점을 찍은 이번 해법에 찬성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근 사적 복수를 다룬 드라마들이 하나의 장르물처럼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세간의 인기를 끄는 현상은 이런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학폭을 주제로 다룬 ‘더 글로리’나 범죄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처단하는 내용의 ‘모범택시’ 등의 살벌한 사적 복수극들은 하나같이 평범했던 개인이 당한 피해를 사회가 해결해 주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 사법 체계가 개인의 피해를 구제하지도, 복수를 대신하지도 못 한다는 사회적 좌절감과 분노가 드라마 인기의 기저에 깔려 있다. 개인의 권리나 존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태의 반영으로도 해석된다.

정부의 제3자 배상안이 “국가는 개인의 피해를 구제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그 피해가 주권을 잃은 나라 때문에 생긴 것이라도. 국민 다수의 이익이 몇 명 안 되는 개인들의 고통에 발목이 묶여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미래 세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아닐까?

강제징용 피해자가 겪은 고통의 본질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다. 끔찍한 폭력을 당한 이들이 바라는 것은 드라마 ‘더 글로리’의 대사처럼 당시 처참하게 무너졌던 자신의 명예와 영광의 회복일 것이다.

현재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정부의 의도에는 동의하지만, 하필이면 미래를 위한 전진이 일제 수탈 피해자의 고통을 지렛대 삼았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부의 통 큰 선제적 호의에 비해 현재까지 일본 정부의 호응은 소극적이기 그지 없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일본에 대한 원망을 안고 가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한때 힘없는 나라에서 이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조국에 대한 원망까지 안고 가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의 나무’ 아래서〉에는 오에 겐자부로가 일본 제국주의 패망 전후 겪었던 유년 시절 이야기가 흥미롭다. 용감하고 강한 일본 군인이 영국군을 물리쳐 싱가포르에서 보낸 고무공 구입권에 당첨되어 기뻐한 일, 학교 선생님이 미국을 적국으로 가르치다 전쟁 패배 후 친구라고 말하자 학교를 가지 않았던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전쟁터에 나가 낙오되거나 적군을 죽이는 악몽을 꿨다는 회고도 나온다. 전쟁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은 인간을 한없이 들뜨게도, 두렵게도 만든다.

일본이나 한국의 현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대한 이해와 현명한 대응이다. 일본은 과거의 폭력에 대해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한국은 개인 존엄에 대한 예의를 가지고 있다고 미래 세대에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라는 나무 아래에서 마주친 미래 세대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물었을 때 말이다.


송지연 기자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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