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뺏긴 뒤 북한군 포위로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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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낙동강 방어선 전투 ㉻

1950년 9월 북한군 2군단
대구 대신 영천 돌파 ‘맹공’
전사자 늘어난 미8군 후퇴
국군 증원 등 반격태세 강화
후방 침투 북한군 포위 성공

1980년 경북 영천시 마현산 정상에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는 영천지구 전적비가 건립됐다. 강선일·김태형 매일신문 기자 1980년 경북 영천시 마현산 정상에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는 영천지구 전적비가 건립됐다. 강선일·김태형 매일신문 기자
경북 영덕군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 재현된 상륙 당시 조형물에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빗발치는 적의 포탄 속에 좌초된 문산호에서 학도병들이 밧줄에 의지한 채 뭍으로 상륙하고 있다. 강선일·김태형 매일신문 기자 경북 영덕군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에 재현된 상륙 당시 조형물에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빗발치는 적의 포탄 속에 좌초된 문산호에서 학도병들이 밧줄에 의지한 채 뭍으로 상륙하고 있다. 강선일·김태형 매일신문 기자

1950년 9월 2일 북한군 2군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북한군의 작전 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대구·영천 일대에서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포위해서 소멸하여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 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미군 1245명 사상 ‘악몽의 날’

왜관·다부동에서는 미군 1기병사단이 국군 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 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1·3·13사단 등 3개 사단도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해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1사단이 17일 동안 방어 진지를 지켜 냈지만, 화력과 기동 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km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km였다.

미 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에서는 전사·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 포기는 인천상륙작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어떠한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내야만 했다. 주 지휘소와 육군본부를 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구에는 전방지휘소만 운용했다.

북한군 공격도 그때쯤 한계에 다다랐다.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과 병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북한군의 기세가 12일 무렵 시들해져 대구는 지켜졌다.

■영천 함락, 낙동강 전선의 위기

9월 들면서 북한군은 다부동을 통한 대구 정면보다는 영천 돌파에 더 치중했다. 당시 영천에는 국군 2군단 6사단과 1군단 8사단이 북한군 2군단 8·15사단과 대치했다.

북한군 8사단이 2일 밤 영천 서북쪽 신령 일대에서 국군 6사단을 공격했고, 북한군 15사단은 보현산 일대에서 국군 8사단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 8사단은 다음날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 무렵 국군 8사단 방어선 오른쪽인 운주산 일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이 북한군 12사단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철수하자, 국군 8사단의 오른쪽에 약 14km에 달하는 틈이 형성됐다.

이때 북한군 김무정 2군단장은 “12사단은 안강을 돌파했는데 15사단은 왜 영천을 돌파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박성철 15사단장을 해임하고 조광렬 소장으로 교체했다. 박성철 소장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은 개전 이래 동락리와 화령장에서 연거푸 국군에게 참패를 당한 부대였다.

사단장이 교체된 북한군 15사단은 국군 8사단 오른쪽에 형성된 14km 간격을 이용해 아무런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이어 15사단은 5일 새벽 1시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국군 8사단을 기습했고, 다음날 새벽 영천을 점령했다. 전광석화였다.

영천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철도, 대구(34km), 포항(40km), 경주(28km) 등으로 통하는 전략적인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한군의 영천 장악은 아군을 중동부 전선 양쪽으로 끊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낙동강 전선 전체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북한군 패착에서 이끌어 낸 승리

국군 1군단과 2군단의 경계지점인 영천이 돌파되자, 육군본부는 1군단 소속 8사단을 2군단으로 전환해 영천 일대의 지휘 체제를 정비했다. 위기에 직면한 유재흥 2군단장은 예하 백선엽 1사단장과 김종오 6사단장을 소집해 각 사단이 1개 연대씩 차출해 영천으로 가도록 했다. 당시 1사단과 6사단도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나 대안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북한군 15사단은 대구가 아닌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다.

때마침 국군 8사단 21연대는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영천 북방을 고수하며 돌파구 확대를 막고 있었다. 6사단도 북한군 8사단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상황은 후방 깊숙이 침투한 북한군 15사단이 국군에 포위된 형태로 바뀌었다. 반격 태세를 가다듬은 국군 2군단은 8사단과 새로 편성된 7사단을 투입해 9월 8일 오후 영천을 탈환했다.

9월 공세 당시 영천지역 전투는 8월 공세의 칠곡 다부동 전투와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낙동강 방어전의 분수령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영욱 매일신문 기자 hell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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