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해사법원 부산 설립 불 지필 때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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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사건 해결 외국에 의존 연 5000억 손실
설립 법안, 여야 정쟁에 밀려 국회서 표류 중
당위성 차고 넘치는 부산 설치 논의 재개해야

요즘 인천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24시간 내외국인들로 붐비는 대한민국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얘기가 아니다. 이달 5일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이 공식 출범과 동시에 인천에 개설된 데 이어 13일 인천에서 ‘해사(海事)전문법원 인천 설치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서명운동은 인천시가 인천상의, 인천지방변호사회, 인천지방법무사회, 인천항발전협의회 등으로 구성된 ‘해사법원 인천 유치 범시민운동본부’와 함께 추진하는 일로, 인천 시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인천시는 오는 11월까지 시민은 물론 국민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펼치는 한편 7월 집중 서명 기간을 운영해 100만 명 목표를 앞당겨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인천의 이 같은 움직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 서울에서 해사법원 설립을 사법 분야 공약의 하나로 발표한 데 기인한다. 이에 따라 인천이 해사법원을 유치해 도시 발전을 가속화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서울에서의 대선공약 발표보다 앞선 대선 운동 기간에 부산에서 공개한 11대 부산공약집에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아예 명시한 바 있다. 이는 해사법원 부산 설립이 오래전 부산에서 필요성을 제기한 뒤 줄기차게 요구해 온, 부산 시민의 숙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의 간절한 바람이나 인천의 서명운동과 달리 현재 해사법원 신설을 위한 논의는 여야 정치권의 극심한 정쟁에 밀려 표류하는 모양새다. 부산이 주도적으로 논의의 불씨를 되살리면서 부산 유치에 절대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과 ‘해사법원 설치 추진 부산·울산·경남협의회’가 2022년 9월 29일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개최한 ‘해사법원 설립 정책토론회’. 부산일보DB 국민의힘 안병길 의원과 ‘해사법원 설치 추진 부산·울산·경남협의회’가 2022년 9월 29일 국회 도서관 강당에서 개최한 ‘해사법원 설립 정책토론회’. 부산일보DB

■해사법원 꼭 필요한 이유

해사법원은 국내외 바다를 매개로 발생하는 각종 사건과 법적 다툼 등 해사사건을 전담해 처리하는 전문 법원을 말한다. 국내에서 일어난 선박 충돌사고나 선원법, 해상보험 관련 사건의 경우 수요가 있는 서울고법과 서울중앙지법, 부산지법 등 4곳의 민사법원 내 해사사건 전담재판부에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접근이 쉽지 않은 해상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데다 판사들의 전문 지식과 사건 처리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처리가 지연되거나 분쟁 당사자들의 불만을 사기 일쑤다. 담당 재판부 법관들이 일반 사건을 같이 맡고 2~3년마다 보직이 바뀌는 상태에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해사사건의 신속하고 명쾌한 처리에 역부족인 게다.

이 때문에 국내 선사와 기업 상당수는 해사 분쟁이 생기면 빠른 해결을 위해 영국과 싱가포르, 홍콩 등 해양 선진국의 전문 중재소나 해사법원에 의존하고 있다. 외국 기업과 얽힌 해사사건이 증가하는 가운데 사건 내용도 해상 운송 계약과 선박 건조 약정, 해양 규제 위반 등으로 다양화되고 복잡다단해진 것도 한 이유다. 외국 재판에 맡긴 해사사건은 통상 1건당 소송 비용이 10억여 원이나 된다. 이 바람에 매년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3000억~5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엄청난 국부 유출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세계 1위, 선복량 세계 5위, 무역 세계 7위 등 세계 10위권의 해양강국이면서도 정작 해사법원이 없는 우리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닌 셈이다.


2018년 3월 2일 부산항 신항 해상에서 발생한 선박 간 충돌사고로 한 컨테이너선의 선체 뒷부분과 일부 컨테이너 박스가 파손됐다. 부산일보DB 2018년 3월 2일 부산항 신항 해상에서 발생한 선박 간 충돌사고로 한 컨테이너선의 선체 뒷부분과 일부 컨테이너 박스가 파손됐다. 부산일보DB

■국내외 설립 추진 움직임

국내에 해사법원이 설립된다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지식산업 시장이 열리고 한국 법률 시장의 외연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해사법원 도입은 수요가 큰 해운업을 포함한 해양수산 관련 다양한 산업과 관련 서비스 업종의 발전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몇 년 전에 해안 지역 도시에 10여 개의 해사법원과 30여 개의 지원을 설치해 연 1조 원 이상 규모의 해양지식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이유다. 중국은 근래 세계 유명 판사 영입, 믿을 수 있는 판결 등을 국내외에 홍보하며 아시아 해사법률 서비스 시장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법조계에서도 해사법원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 소속 사법정책연구원은 2021년 발간한 <해사법원 설치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해사법원 설치를 위한 정책적 기반을 제시했다. 이어 지난해 1월 법원행정처가 합의부 2개, 단독부 4개 등의 해사법원을 설치하는 의견을 국회에 보내기도 했다. 부산은 훨씬 일찍이 해사법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부산에서는 2011년부터 법조계와 해양수산 업계,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해운 서비스업의 발전과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해사법원을 설립하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함께 지난해 기준 세계 7위의 컨테이너 물동량, 세계 2위 환적화물 처리 실적을 기록한 부산항을 가진 글로벌 해운·항만·물류 중심도시인 부산에 해사법원을 설치해 국가균형발전을 꾀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2021년 5월 13일 ‘해사법원 부산 설립 범시민추진협의회’가 부산지방변호사회 대회의실에서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산일보DB 2021년 5월 13일 ‘해사법원 부산 설립 범시민추진협의회’가 부산지방변호사회 대회의실에서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산일보DB

■논의 중단 속 유치는 4파전

10여 년에 걸친 부산의 끊임없는 해사법원 설치 여론에 지역 국회의원들이 압박을 받았다. 이에 따라 지난 20대 국회에서 당시 더불어민주당 김영춘·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유기준 등 부산 출신 두 의원이 해사법원 신설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회 임기가 만료되는 바람에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현 21대 국회에서도 국민의힘 안병길(부산 서동구) 의원이 해사법원 부산 설치 등의 내용을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해 놓고 있다. 또한 같은 당의 윤상현(인천 동미추홀을)·배준영(인천 중강화옹진) 의원과 장동혁(충남 보령서천) 의원, 민주당 이수진(서울 동작을) 의원이 각각 발의한 해사법원 신설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들 법안은 발의 의원들의 지역구가 있는 도시에 해사법원을 두기로 해 문제가 있다. 법안별로 부산과 인천, 세종(장동혁 의원 법안), 서울 등 4곳이다. 해사법원 유치 4파전인 셈이다. 네 지역 간 유치 경쟁은 해사법원 설립 논의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해사법원 신설 문제가 유치 신경전이 치열한 탓에 대화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여야가 다른 사안들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하며 다투기에 바쁜 것도 한 원인이다. 이러다 해사법원 관련 법안은 임기가 겨우 9개월가량 남은 21대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천의 경우 부산항에 이어 국내 2위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는 인천항, 국제 항공화물 세계 2위이며 국제 여객 세계 5위인 인천공항, 해양경찰청,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 아태지역사무소 등의 소재지란 점을 강조하며 해사법원 유치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인천이 서울과의 접근성이 뛰어나고 우리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가깝다는 걸 장점으로 내세운다. 서명운동은 향후 해사법원 설립 논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서울에서는 해사 분쟁이 많은 해운회사와 화주 기업, 보험사의 본사 대부분이 있고 변호사도 많은 서울에 해사법원을 두는 게 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또 본원은 서울에 설치하고, 부산 등지에는 지원을 설치하자는 입장이다. 세종은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해양수산부 등 해양정책 기관과의 연계성과 전국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이미 확보된 법조청사 부지를 고려할 때 해사법원의 적합지라는 것이다.


인천시와 ‘해사전문법원 인천 유치 범시민운동본부’는 지난 13일 구월동 문화의 거리에서 해사법원 인천 설치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을 펼쳤다. 인천시 제공 인천시와 ‘해사전문법원 인천 유치 범시민운동본부’는 지난 13일 구월동 문화의 거리에서 해사법원 인천 설치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을 펼쳤다. 인천시 제공

■최적지 부산, 선택 아닌 필연

인천, 서울, 세종 3개 도시의 주장은 저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해사법원 신설과 부산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공을 들인 세계적 해양도시 부산에 비하면 타당성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바다와 연관된 해사사건을 전담할 전문 법원을 세종과 서울 같은 내륙 지역에 설치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인천이나 서울에 해사법원을 두는 것 역시 국가경쟁력을 떨어트리는 주범으로 지적되는 수도권 비대화를 심화할 뿐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30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로 대구(235만 명)를 제친 데 이어 부산(331만 명)까지 위협하는 국내 제3 도시로 올라선 인천은 해사법원이 아니라 고등법원 설치가 더 시급한 실정이다. 인천은 인구 규모에 맞지 않게 별도의 고법이 없어 서울고법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불편이 크다. 해사법원은 부산에 양보하고 인천고법 설치 운동에 주력하는 게 맞다.

이에 반해 부산에 해사법원이 있어야만 하는 절박함과 부산이 최적지인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부산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수출입 화물 99%를 수송하는 해운의 물동량 가운데 무려 75%를 책임진 굴지의 글로벌 해양도시다. 해양사고를 담당하는 해양안전심판원을 비롯해 전국 해양수산 관련 기관단체의 70%가 집중된 부산은 조선업과 조선기자재 및 해양플랜트 산업이 발달한 이웃 울산·경남권까지 감안하면 ‘해양수산 수도’라고 불러도 될 테다. 해양레포츠와 해양관광 분야마저 급성장 중인 부산에 국내 첫 해사법원이 들어서야 할 필요성은 불문가지라고 하겠다. 증가 추세인 해사사건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선 최적의 환경과 인프라를 갖춘 부산에 해사법원을 설치해야 마땅하다. 윤 대통령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공약한 이유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는 부산이 주도적으로 나서 해사법원 부산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논의의 불씨를 되살리고, 부산이 가진 수많은 당위성을 적극 알려 나가야 할 것이다. 올 들어 부산에서는 2030부산월드엑스포(국제박람회) 유치전에 총력을 쏟으면서 해사법원 문제를 등한시한 측면이 있다. 인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이 앞장서고 전 시민과 각계각층이 뭉쳐 가라앉은 해사법원 부산 유치 열기를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이미 발의된 관련 법안들은 여야 간 정쟁 지속과 내년 4월 10일 22대 총선에 대한 관심에 밀려 이번 국회에서도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통령이 부산 시민에게 약속한 대선공약을 빠르게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요구된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당정 협의를 통해 해사법원 설립 문제를 상의함으로써 여당이 국회 논의를 조속히 구체화하도록 만들 일이다. 해사법원 설치의 주체인 대법원도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부산·인천 간 유치 경쟁이 치열해질 경우 부산 본원, 인천 분원 체제 도입을 검토할 만하다. 세계 주요국 해사법원과 경쟁할 수 있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해사법원 신설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강병균 논설위원 강병균 논설위원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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