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상조’ VS ‘노동자 안전 담보’ 놓고 산업현장 혼란
중처법 중소기업·노동계 입장
기업 존폐 위기 우려 유예 호소
“현장 사정 알면 법 적용은 무리”
산재 사망사고 많아 시행 강조
“영세 사업장 죽음 방치 안 돼”
정치권은 여야 합의 없이 눈치만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의 적용이 오는 27일 전면적으로 시행된다. 중소기업들은 ‘시기상조’라며 기업의 존폐 위기를 호소하며 ‘2년 유예’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노동계는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자며 강행을 촉구하는 중이다. 정치권은 여야가 법 개정에 뚜렷한 합의점을 내놓지 못하면서 중처법을 둘러싸고 산업 현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의욕 떨어져, 사고 날까 애간장”
부산에서 금속 가공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 대표는 중처법 확대 시행을 앞두고 불안에 떨고 있다. 업체 특성상 컨베이어 벨트에서 작업하던 부품이 작은 실수로 이탈하면 바로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4시간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럴 수도 없다. 영업·홍보 등 대표가 직접 외근을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A 대표는 “업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는 직원 부주의 등 책임 소재가 모호한데, 중소기업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면 이런 법은 있을 수 없다”며 “이러니 누가 제조업을 하려고 하겠나, 기업을 경영하는 데 신바람이 나지 않고 의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조선기자재 업체를 운영하는 B 사장도 비슷한 상황이다. B 사장은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업주를 처벌한다는 게 무슨 경제적 이득이 있냐”고 되물었다. 중처법의 목표가 처벌이 아닌 예방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B 사장은 “세상에 어느 사장이 자기 회사에서 사고가 나길 바라느냐”며 “처벌을 강화하면 안전사고가 줄어든다는 논리가 공포 정치가 아니면 뭐냐”고 오히려 기자에게 따졌다.
노사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중처법 처벌을 피하고자 사고가 발생해도 신고하지 않는 등 처리 과정이 음지로 파고들고 편법이 난무할 것이라는 염려다. 공산품 표면처리 업체를 운영하는 C 씨는 “만약에 법이 시행되더라도 제대로 지켜질지 의문”이라며 “처벌을 피하고자 업주는 사고를 돈으로 무마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노동자가 업주를 협박하는 상황도 올지 모른다”고 했다.
■“노동자의 죽음 방치말라”
노동계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산재 사망사고가 다수 발생하는 만큼 예정대로 법이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처법은 원청의 경영 책임자에게 현장의 안전 확보 의무를 부과하고 이를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법 시행을 또 유예한다면 현장에서 겨우 자리 잡기 시작한 안전 관리체계의 근간을 흔들 뿐 아니라 중처법 자체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18일 부산고용노동청에 따르면 지난해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발생한 중대재해 사망자 수는 총 101명이다. 지역별로 부산 40명, 울산 13명, 경남 48명이다. 50인 미만 사업장 사망자 수는 60명(59.4%)으로 전체 사망자 수 대비 절반을 훌쩍 넘는다.
중대재해 없는 세상만들기 부산운동본부 박수정 위원장은 “50인 미만 사업장 법 적용을 또 유예하자는 것은 정부가 그동안 산재 사고 예방을 위한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현장을 방치했다는 의미”라며 “중처법의 입법 취지는 안전조치를 다하라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다단계 원·하청구조에서 대기업이 요구하는 생산을 맞추기 위해 영세사업장에서는 안전은 뒤로 한 채 일을 하다 사고가 난다.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사망사고가 더 많이 발생하는데, 노동자의 죽음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여전히 안갯속 정치권
중소기업계와 노동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관련 사안을 중재해야 할 정치권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50인 미만 중처법 확대 적용에 추가 2년 유예를 골자로 하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오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여당의 중처법 유예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예정대로 27일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확대 적용된다.
법안 처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지난 17일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법 시행을 목전에 두고 2년 추가 유예 법안을 국회 보고 처리하라는 건 일방 통보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적용 유예 전제 조건으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과 산재 예방 예산 2조 원 확보 등을 제시하며 협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에 정부는 중대재해 대책 추진단 등 대비책 마련에 고심이다. 또 안전한 작업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정부의 역량을 집중하고 지원 방안도 강구할 계획이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