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북풍’이 ‘외환’을 몰고 온다면
KAL기 폭파·총풍 사건, 남북 정상회담
북한 변수에 따라 우리 선거판 요동쳐
비상계엄 북풍 공작설 국가 안보 위협
철저한 수사로 국론 분열·혼란 막아야
북한의 존재는 우리에게 늘 리스크다. 코리아디스카운트도 결국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의 다른 이름이다. 북한의 행동은 크든 작든, 군사적이든 비군사적이든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권위주의 정권은 북한의 이 같은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선거철이면 판세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한다. 이름하여 ‘북풍(北風)’이다. 그런데 최근 비상계엄 정국에서 북풍이 논란이다. 비상계엄 분위기 조성을 목적으로 북한을 자극해 전시 상황을 유도했다는 의혹인데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태풍으로 몰아칠 전망이다.
1987년 발생한 ‘KAL기 폭파 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김포공항에서 압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선거 틈 노린 북한 대남 공작
북한의 선거 개입과 심리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7년 대선을 불과 19일 앞두고 발생한 ‘KAL기 폭파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 의한 공중 폭파 테러라고 발표했다. 북한이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어렵게 할 목적으로 벌인 만행이라는 설명이었다. 선거 전날 김현희가 국내로 압송됐고 13대 대선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가 크게 작용했지만 북풍의 영향도 만만찮았다. 1995년 15대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북한 무장 병력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침입해 총격전을 벌였다. 참패가 예상됐던 신한국당은 139석을 차지했고 원내 1당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풍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2010년 발생한 북한의 천안함 폭침도 지방선거를 겨냥한 도발이라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분석이었다.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 등이 확산하며 선거철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북한의 도발은 의도야 어찌 됐든 보수 진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한성기, 오정은, 장석중 피고인(왼쪽부터)이 1997년 대선 직전 북한 인사와 접촉,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 달라고 요청한 혐의(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위반)와 관련한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2001년 4월 10일 호송버스에서 내리고 있다. 부산일보DB
∎정권 차원의 북풍 정치적 활용
북풍이 보수 진영에 유용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정권 차원에서 북풍을 조장하는 사례들도 나왔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는 ‘남한 조선노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해 이 가운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 등 62명을 구속하고 300명을 추적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고 당시 평민당 후보 김대중의 비서가 관여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김영삼 후보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보수 진영이 노골적으로 북풍 공작을 벌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1997년 15대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등이 중국에서 북측 인사들을 만나 무력시위를 해 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총풍 사건’이다. 이회창 후보가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지시했는지 여부가 선거 기간 내내 쟁점이었는데 결국 선거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과 관련된 대북공작원 흑금성의 일화를 다룬 게 영화 ‘공작’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북 화해 무드 조성에 신 북풍
2000년대 접어들면서 북한 변수는 영향력이 점차 줄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인식이 많이 달라졌고 국민 의식도 변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선 제2연평해전과 2차 북핵 위기로 북풍이 불었지만 ‘노무현 바람’을 꺾지 못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도 이명박 정부가 적극 활용했지만 그해 6월 지방선거는 여당 참패로 끝났다. 북풍의 위력이 미풍으로 변화는 사이 신 북풍이 일기도 했다. 남북 화해 무드로 진보 진영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 것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정상회담을 가졌고 북미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그해 지방선거는 진보 진영에 대승을 안겼다. 그러나 정권 교체와 함께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됐고 국민들의 정서도 다시 냉정해졌다.
‘12·3 비상계엄’ 기획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24일 오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뉴스
∎비상계엄을 위한 북풍 공작설
12·3 비상계엄 사태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서 ‘NLL(북방한계선)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라는 손 글씨가 발견됐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도발을 유도해 계엄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는 의혹과 맞물린다. 10월 북한이 남한 무인기가 평양 상공에 침투했다고 주장한 사건이 북한 자작극이 아닌 우리 군의 소행일 가능성도 제기되는 마당이다. 북한 오물 풍선 부양 시 경고 사격 후 원점 타격을 지시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국가정보원이 비상계엄 선포를 한 달 앞두고 백령도에서 북한이 띄운 오물 풍선을 ‘레이싱 드론’으로 여러 차례 격추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외환에 해당할 수 있는 엄중한 사안이다. 군 당국은 아직 이런 의혹들에 대해 공식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만큼 수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야 할 일이다.
공작은 정보의 비대칭에서 비롯되는데 갈수록 세상은 투명해진다. 어설픈 북풍은 역풍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북풍 공작이 국민들의 안전을 담보로 한 것이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외환의 죄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물론이고 심리전까지도 과학적으로 그 영향을 분석하고 대처해야 하는 게 국가의 책무다. 그게 북한이 의도하는 국론 분열과 혼란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강윤경 논설위원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