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형제의 나라' 멕시코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현 U-20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주목받지 못한 ‘언더도그’였다. 대표팀은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2로 패배했지만, 멕시코와 호주를 각각 2-1로 연파하고 사상 처음 8강에 올랐다. 8강에서 우루과이를 2-1로 이겼고, 4강전에서 브라질에 1-2로 석패했다. 3·4위전에서 폴란드에 1-2로 역전패해 4위로 마감했지만, 4강 신화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당시 외신은 붉은 유니폼을 입고 끊임없이 그라운드를 누빈 한국 선수들의 체력과 투지에 감탄하며 ‘붉은악마’로 치켜세웠다. 이는 1997년 축구 국가 대표팀의 공식 서포터스 이름이 됐다. 멕시코는 ‘붉은악마’의 고향인 셈이다.
한국 축구가 멕시코와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본선 무대를 밟았다. 차범근·최순호·허정무 등 레전드들이 나섰지만, 대진운이 나빴다. 슈퍼스타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유럽의 복병 불가리아와 함께 ‘죽음의 조’에 들어간 것이다. 1차전 아르헨티나에 1-3으로 졌지만, 대표팀 주장 박창선이 월드컵 본선 무대 사상 첫 골을 기록했다. 불가리아와 1-1로 비긴 뒤 이탈리아에 2-3으로 석패해 16강은 좌절됐다. 하지만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한국 축구의 강인한 저력을 각인시켰다. 멕시코 월드컵을 발판으로 한국은 2026 북중미 월드컵까지 11회 연속 본선에 진출했다.
한국은 북중미 월드컵 개최지인 멕시코에서 40년 만에 조별리그 경기를 치르는 중이다. 지난 12일 A조 1차전에서 체코에 2-1 역전승을 거뒀는데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됐다. 멕시코 현지 팬들이 자국팀처럼 한국을 응원한 것이다. 이들은 “한국 형제들, 당신들은 이미 멕시코 사람입니다”라며 연호했다. 각별한 인연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멕시코는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스웨덴에 0-3으로 대패하며 탈락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한국이 독일을 2-0으로 꺾으면서 멕시코가 극적으로 조 2위에 올라 16강에 진출했다. 당시 손흥민의 쐐기 골은 지금도 멕시코 팬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멕시코 전역에 확산한 K팝, K드라마 등 한류 열풍도 한국 호감도를 높인다. 지난달 BTS의 멕시코시티 방문은 국가적 행사로 다뤄질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오는 19일 한국의 2차전 상대는 멕시코다. 8년 전 ‘카잔의 기적’으로 이어진 특별한 인연과 뜨거운 형제애는 잠시 접어야 할 것 같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