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혼종의 시대, 공존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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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기계 안고 잠드는 혼종과 공존의 시대
AI 시대, 거장이 묻는 가족·인간 가치
아들 모습 휴머노이드 수용 가능한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상자 속의 양' 스틸컷. (주)NEW 제공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상자 속의 양' 스틸컷. (주)NEW 제공

그 상자 속에 정말 ‘양’이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가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양이라고 믿고 사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상자 속의 양’은 부재를 존재로 바꾸고, 기억을 사랑으로 이어 붙이는 영화다. 그런데 이미 떠난 사람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를 예전의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사랑과 상실의 경계를 담담히 응시한다.

드론이 날아다니며 택배를 배달하는 가까운 미래. 건축가 ‘오토네’와 목재소를 운영하는 ‘켄스케’ 부부는 7살 아들 ‘카케루’를 사고로 잃었다. 아들을 떠나보낸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부부는 여전히 상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상자 하나가 배달된다. 고인의 얼굴과 목소리, 생전 사진과 영상을 학습해 휴머노이드를 제작해 주는 렌탈 업체 ‘리버스(환생)’의 광고물이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들의 모습을 한 휴머노이드를 ‘배송’ 받는다.

아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음식을 먹을 수도, 물에 들어갈 수도 없으며 정기적으로 충전을 해야만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카케루.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현실은 부모에게 위로와 혼란을 동시에 안긴다. 처음엔 낯설었던 부부도 카케루와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웃음을 되찾고, 적막했던 집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는 쉽게 감동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카케루가 아들의 빈자리를 채워갈수록 오히려 아들의 부재가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목소리를 재현하고 기억을 학습한다고 해도 휴머노이드는 진짜 아들이 아니다. 게다가 휴머노이드와 함께하는 삶에는 미래가 없다. 오늘은 행복하지만 그 행복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기에 언제나 불안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가져온 영화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양을 그려 달라는 어린 왕자의 부탁에 조종사는 양 대신 상자 하나를 그려 보이며,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재하는 양이 아니다. 상자 안에 자신만의 양을 상상하고, 믿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 눈앞의 형상 너머를 상상하는 일. 영화는 그 모티프를 카케루를 바라보는 방식과 겹쳐 놓는다. 부모는 상자 속에 자신이 원하는 카케루를 투영하지만 자신들의 뜻대로 될 리 없다. 게다가 휴머노이드 카케루는 스스로 상자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만의 카케루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작품을 두고 SF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기술이 열어갈 미래보다 인간 감정의 본질에 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도 휴머노이드 기술의 작동 원리나 윤리적 논쟁은 드러나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 내내 건축가 오토네를 통해 ‘공존’을 말한다. 기계와 인간, 유리와 나무 등 이질적 존재가 어우러지는 ‘집’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기계를 품에 안고 잠드는 사람들이 있는 혼종과 공존의 시대임을 알리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버려진 아이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 ‘어느 가족’의 혈연 너머 공동체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줄곧 관계의 본질을 탐구해온 감독이다. 이번 작품은 다소 낯설 수 있지만 그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질문의 대상이 인간에서 휴머노이드로 확장됐을 뿐이다. 이미 중국에서 실제로 등장한 ‘디지털 부활 서비스’에서 영감을 얻은 이 영화는 첨단 기술을 소재로 삼지만, 결국 향하는 곳은 인간이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삶은 때로 보이지 않는 상자 안의 무언가를 믿는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여전히 인간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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