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반도체 강국 만든 의롭고 선한 맥락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놀라운 성과
수많은 맥락이 만든 기적의 드라마
전쟁 뒤 미국 과학자들 한국 건너와
서울대·경북대 등서 학생 지도 매진
물리·전자공학 첨단 실험법 등 전파
양성된 공학도들 반도체 신화 일궈내
반도체 산업이 한국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놀라운 선전은 중국과 인도의 약진 등에 힘겨워하던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반도체 산업 덕분에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유가 폭등 등 최근 위기 국면도 비교적 잘 돌파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주식시장도 연일 호황이다. 반도체 덕분에 다른 분야의 산업들도 AI(인공지능) 시대로의 대전환에 대비할 시간을 벌었다는 관측도 이어진다. 슈퍼사이클에 진입한 반도체 산업의 초호황은 삼성전자 직원에 대한 수억 대 성과급 등 많은 이슈도 몰고 왔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엔비디아, 대만 TSMC와 함께 AI 시대 세계 반도체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메모리 분야 최강자인 삼성전자의 경우 2026년 기준 D램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고 낸드 플래시 분야에서도 최상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I 산업 핵심인 GPU에 들어가는 HBM 분야에서 독보적 기업으로 꼽힌다. AI 시대 최대 수혜 기업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삼성전자는 시가총액 2000조 원대를, SK하이닉스는 1900조 원대를 상회하는 최정상권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으니 실로 엄청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현재는 과거의 크고 작은 수많은 맥락들의 총합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운 또는 불운이라고만 여겼던 각종 사건들도 지난 시간의 인과관계들이 얽히고설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오늘날 반도체 강국으로 만든 역사적인 맥락은 무엇일까.
통상 한국 반도체 신화의 원동력으로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결단과 정부의 적극적 지원 등을 꼽는다. 1970년대 삼성과 금성(현 LG) 등 당시 한국 기업은 미국과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사실상 하청 역할을 했다. 반도체 설계와 제조는 일본·미국이 담당하고 한국은 노동집약적 후공정 작업에 집중한 것이다. 그런데 1983년, 당시 73세였던 이병철 회장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어렵더라도 전력투구하겠다며 메모리 반도체 국산화와 대대적인 사업 투자에 나선다. 당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정부 내부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적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청와대 등의 적극적 지지로 생산라인 구축에 착수할 수 있었다. 금성과 현대도 정부 지원 아래 메모리 반도체 개발에 뛰어든다. 금성 후신인 LG전자는 현재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하지 않지만 현대전자는 SK하이닉스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반도체 신화의 또 다른 원동력으론 미일 기술패권 경쟁이 꼽힌다. 1980년대 중반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였던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견제가 한국에 기회로 작용했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 등을 통해 강한 압박을 받은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며 멈칫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이 D램 시장에서 도약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당시 한국이 보유한 수많은 고급 공학 인력도 반도체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1980년대 초에 우수한 과학 연구진과 공학 엔지니어 등을 대거 확보하고 있었을까. 자녀 교육열이 남달랐다고 하더라도 대학이 과학·기술 인력을 배출하려면 교수진과 실험 장비 등을 많이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1950~1953년 참혹한 전쟁을 겪은 데다 현대 과학 교육을 할 수 있는 유산 자체도 미미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전후 복구 지원 계획인 미네소타 프로젝트였다. 미국 과학자 등이 이 프로젝트에 따라 1950년대~1960년대 서울대와 경북대 등에서 강의하면서 한국 과학 육성의 밑거름을 구축한 것이다. 특히 이 외국인 스승들은 실험에 뿌리를 둔 최첨단 기초과학 연구법을 한국에 전파했다. 실험 장비도 해외에서 대거 지원됐다. 이후 이들에게 배운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유학 뒤 서울대와 지방 거점 국립대 등에서 열정적으로 물리학과 전자공학 등 과학 교육에 나서면서 한국은 단기간에 전자산업과 반도체에 최적화된 공학 인력 양성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 반도체 산업의 초호황은 한국물리학회 최초 외국인 회원인 미국 과학자 길버트 허드슨(Gilbert Hudson) 등 한국 과학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국내외 스승들이 뿌린 선한 씨앗이 이후의 다양한 맥락들과 절묘하게 결합해 만든 기적 같은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지금, 우리가 잊고 지낸 그 시절 과학자들을 기리는 작업도 본격화되길 소망한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미래는 우리가 현재 만들어낸 맥락들의 총합일 것이다. 미래의 한국, 이 땅에서 살아갈 후인들을 위해 의롭고 선한 씨앗을 더 많이 뿌리는 오늘이 되길 기원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