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사다리’냐 ‘그림자 사금융’이냐… 두 얼굴의 전세 [비즈앤피플]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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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만 보편화된 독특한 주거 형태
산업화·도시화 거치며 본격적으로 정착
보증금 저축 효과 내 집 마련 ‘징검다리’
월세 가구 늘어나면서 비중 점점 줄어
깡통전세·전세사기 등 부작용도 뚜렷
해외 금융기관, 한국 경제 ‘뇌관’ 지적
이 대통령 ‘사라질 제도’로 언급하기도

내 집 마련을 위한 징검다리로 여겨져 왔던 전세 제도가 최근 전세사기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사회적 재앙의 뇌관처럼 취급받는 처지가 됐다. 부산 수영구 금련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영구와 해운대구의 도심 모습. 대형 아파트 단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종회 기자 jjh@ 내 집 마련을 위한 징검다리로 여겨져 왔던 전세 제도가 최근 전세사기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사회적 재앙의 뇌관처럼 취급받는 처지가 됐다. 부산 수영구 금련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영구와 해운대구의 도심 모습. 대형 아파트 단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종회 기자 jjh@

최근 정부가 비거주 주택 소유자와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 강화 방침을 밝히면서 이들이 임대 시장에 내놓는 전월세 물건들이 사라지고, 공급 부족으로 인한 전월세 대란이 빚어지고 있다. 내집 마련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 서민층의 주거 사다리가 걷어 차였다는 비판과 함께, 위험천만한 사금융에 기댄 전세는 사라져야 할 제도라는 지적도 있다.

■두 얼굴의 전세, 어느 쪽을 봐야 할까

주택 임대차 제도인 전세는 한국에만 보편화돼 있는 독특한 제도다. 과거 서민들에게는 무일푼에서 시작해 ‘내 집’ 마련으로 가는 고마운 주거 사다리였고, 집주인에게는 무이자로 목돈을 융통하게 해주는 자금줄이었다. 도시가 급격하게 커지며 발전하던 격변기,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며 전세 제도는 새로운 주거 안전망이자, 민간 사금융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전세 제도가 한국 주거 환경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뚜렷하다. 가장 큰 이유는 서민 가계의 주거비 절감이다. 매달 수백만원의 소모성 지출을 없애는 대신 전세금을 예치해 두고 월 임대료를 아끼는 것은 가계 부담을 크게 줄여줬다. 또한 전세보증금은 ‘강제 저축’으로 묶여 서민들이 목돈을 모아 더 나은 주거지로 이동하거나 최종적으로 내 집 마련을 하는 데 있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주택 수요가 폭발하던 시기 민간 주택 공급을 촉진하는 순기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전세는 역전세, 깡통전세, 전세사기에까지 등장하며 사회적 재앙을 야기하는 뇌관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이재명 대통령은 전세를 결국 사라질 제도로 규정했다.

대규모 전세사기 사태에서 보여주듯, 무리한 갭투자와 과도한 레버리지의 부작용은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협하고 평생 모은 자산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전세보증금 비율이 90%에 육박하는 소형 아파트나 신축 빌라의 경우 수천 만원으로도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면서 보증금을 이용해 다음 집을 사는 수십, 수백 채 보유 기업형 무자본 갭투자자들도 등장했다. 주택 가격과 전세 가격이 함께 뛸 때는 위험이 드러나지 않지만 주택가격과 전세가격 하락, 금리 상승 시기에는 다중채무로 인한 보증금 사고 위험이 훨씬 커진다. 소자본 갭투자가 집값 상승을 부추기기도 한다.

■독특한 제도 전세, 언제 시작됐나

전세 제도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시대의 ‘전당’ 제도가 조선시대의 ‘가사전당’으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담보 대출에 가깝다는 의견이 더 많다. 그보다 보증금을 맡기고 집을 빌려 살다 나갈 때 원금을 돌려받는 현대적 의미의 전세 관행은 189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기 시대부터로 보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 인천, 원산 등 3개 항구가 개항되고 일본인 거류지가 조성되자 농촌 인구가 서울 등 대도시로 급격히 유입됐다. 좁은 도심에 갑자기 사람이 몰리자 극심한 주거난이 발생했고, 자연스럽게 주택 임대차 관계가 형성됐다. 1910년 조선총독부의 관습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전세 가격은 기와집이냐 초가집이냐에 따라 달랐지만, 보통 집값의 절반 정도였다. 비싼 곳은 집값의 70~80%에 이르기도 했다. 전세 기간은 보통 1년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고 1960~198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와 도시화가 추진되면서 전세는 한국의 독보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금융이 빈약해 은행에서 장기, 저리의 대출을 받기 어려웠던 시절 전세 제도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완전히 맞물리게 해준 고마운 ‘시장 발명품’인 셈이다. 1981년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공포되면서 전세 세입자는 명확한 법적 보호 대상이 됐다. 확정일자와 보증금 우선변제 같은 ‘안전장치’도 추가됐다.

일각에서는 1700년대 전후로 존재한 세매(貰賣) 제도 유래설을 주장한다. 최영상 주택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세의 원형, 조선후기 세매 관습의 특성에 관한 분석’에서 조선 영조와 정조 시기 승정원일기에 나온 세매 제도를 근거로 들며 전세가 세매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승정원일기(1742년)에는 광성부원군의 자손들이 궁핍한 사정으로 사직동에 있는 가문의 본가를 세로 팔고(貰賣) 낙향했고, 영조가 이를 측은히 여겨 400냥을 지원해 그 본가를 찾아 주라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전세가 한국에만 있는 제도라는 견해가 다수지만, 안데스 지역에서 유사 사례를 찾아낸 연구도 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전세의 역사와 한국과 볼리비아의 전세 제도 비교분석’ 논문에서 “실제 시장에서 전세가 관찰되는 나라는 한국, 볼리비아, 인도(극소수 지역) 등 3개국”이라고 밝혔다. 볼리비아·안데스 지역의 ‘안티크레티코(Anticretico)’는 우리나라 전세와 매우 유사하다.

부산의 한 부동산에 붙어 있는 매물(위)과 지난해 열린 전세사기 피해자 집회. 김종진 기자 kjj1761@·연합뉴스 부산의 한 부동산에 붙어 있는 매물(위)과 지난해 열린 전세사기 피해자 집회. 김종진 기자 kjj1761@·연합뉴스

■그림자 사금융 전세, 해외서 잇단 경고

해외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와 국제금융협회,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오랫동안 한국의 가계부채 리스크를 강력하게 경고해 왔다. 특히 해외 전문가들은 거대 규모의 전세대출과 사적 임차보증금(전세 부채)을 그림자 금융으로, 숨어 있는 뇌관으로 보기도 한다. IMF 아시아·태평양국은 “부동산 가격 변동성이 커질 때 이 그림자 사금융이 한국 금융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해외에서는 보증금을 최소화하고, 에스크로(제3자)를 이용해 미반환 위험성을 낮춘다. 독일의 경우 민법을 통해 임대 보증금을 최대 월세 3개월치로 제한하고 보증금은 세입자와 공동명의 또는 신탁 권한을 지닌 제3자 은행의 에스크로 계좌에 분리 예치해 보관한다. 프랑스와 벨기에 등 대다수 유럽 국가들도 보증금의 상한선을 정해두고 에스크로 시스템을 제도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이와 유사한 전월세 안심신탁 제도를 내놨다.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유럽 사례와는 차이가 있지만, 전세 안심신탁도 HUG와 임대인, 임차인이 3자 계약을 맺고 임차인이 전세금을 HUG에 예치하는 방식이다. HUG는 대신 임대인에게 매달 월세에 해당하는 수익(최대 5% 육박)을 지급하고 임대차계약이 끝나면 임차인에게 전세금을 직접 돌려준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전세금 미반환 위험과 갭투자를 원천 차단하고 전세금 등을 재원으로 조성된 펀드 자금은 HUG가 보증하는 PF사업에 투입해 주택공급 활성화에 기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사다리냐 원흉이냐’ 전세 진짜 사라질까

이 대통령은 앞서 지난 6월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전세 대출을 많이 해준 게 집값 상승의 주된 원인이고 전세 사기도 생겼다. 정상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전세를 사라질 제도로 규정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전세는 월세에 밀려 점점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5년 단위로 이뤄지는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가구 중 전세 비중은 1975년 17.3%에서 1995년 29.7%까지 늘었다. 그러다 2000년에는 27.4%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고 2020년에는 15.5%까지 줄었다. 2020년 기준 부산의 자가 점유율은 59.7%다.

임차 가구 중 전세 가구 비율은 1995년 67.2%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월세 가구가 늘기 시작하면서 점점 줄어 2020년에는 39.9%로 줄어들었다. 3일 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확정일자 부여 기준 지난달 부산의 주택 전월세 비율은 전세가 32.2%, 월세가 67.8%로 나타났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연구원의 ‘한국의 사회동향 2025’ 보고서는 월세 비중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임대주택 시장에서 전세의 자산축적 기능과 안정성, 내 집 마련의 사다리 역할이 약화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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