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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에게]가족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흘렀다. 어린 시절 가난에 찌들고 살길이 막막하였다. 없는 집안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들도 많아서, 부모가 할 일을 대신하였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버티는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2013년 봄날에 세상과 이별하셨다. 하늘에서 후손들을 보면서 편안한 웃음을 지을 것으로 느껴진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도 친지와 지인들의 경조사를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분이셨다. 힘들어도 주변을 살피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분의 자식으로 살면서 원망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으로 묻어두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느낀다.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가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없는 살림에 제사는 꼬박꼬박 챙겼다. 1달에 1번 제사를 지내다 보면 한 해가 금방 흘러갔다. 아버지는 힘든 현장 생활을 하면서도 양심을 팔아 이득을 취하는 법도 없었다. 일상의 윤택함보다 정의를 항상 들려주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신 덕분에 자식들은 어긋나지 않게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지병을 얻었다. 오랜 병에 몸은 쇠약해지고 합병이 생겼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기력을 찾으려고 무단히도 노력하셨다. 병원비도 많이 들어갔지만 가족들이 갈등하고 불화가 있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똘똘 뭉쳤다.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나 역시 아버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자식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열심히 살아간다. 그만하고 싶어도 가족의 끼니가 걱정된다. 밤잠을 청하지 못하고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건물을 돌아다닌다. 교대 근무자가 오는 시간이 언제인고 기다리다 아침 해가 밝아지고, 해장국에 밤새 피곤해진 위장을 녹인다. 오토바이 소음과 주민들의 아우성 시간이 지나갈수록 어깨가 굽어진다. 땅을 보고 하늘을 보면서 위안 삼는다.
아버지가 주는 용돈을 기다리는 아들, 올라간 물가에 투정 부리는 아내의 모습. 이백만 원 남짓에 살아 숨 쉬는 우리 가족. 젊은 시절의 내 몸은 온데간데없이 서서히 병들어가고, 턱없이 줄어든 일자리에 갈 곳이 없다. 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족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시는 납골당으로 달려가 꽃송이를 꽂고 아버지의 환한 모습에 행복이 고인다. -송인종의 아들 송하균
2026-04-1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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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에게]가난 속에서도 늘 자식 먼저였던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2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17세에 결혼해 6남매를 낳아 힘들게 기르셨다. 아버지는 평생 땅만 팠던 순수 농부로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농사 지어 다른 생필품을 샀던 물물교환 시대에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가족에게 헌신했다. 아버지가 사다준 갈치나 채소로 끼니를 이었다. 그나마 맛있는 반찬은 아버지와 자식들 먹이느라 당신은 침만 삼키며 맛도 보지 못했다. 늘 자식들이 우선이었고, 의복이나 학용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6명이다 보니 빈궁한 살림살이였다. 꽁보리밥에 반찬이래야 짜게 담근 김치와 양파, 마늘, 오이, 풋고추 등 채소가 주였다. 그래도 도시락만큼은 남에게 뒤질세라 최대한 차려 주셨다. 계란말이에 연뿌리, 오징어 무침 등 당시로는 아주 뛰어난 것들이었다. 남에게 궁색하게 보이기 싫었고 자식들 기 죽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평생을 농촌에서 홀로 지내셨다. 친구 사귀기도 힘들고 좁은 공간에 사는 게 답답하다며 한사코 반대하셨다. 억지로라도 모시지 못한 게 한이 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가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그 많은 무료한 시간을 어찌 홀로 보내셨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글이라도 깨쳤으면 책이나 신문도 읽고 TV 자막도 보면서 훨씬 편하게 사셨을 텐데. 그래도 평생 어머니가 허튼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경위에 발랐고 일반 교양과 상식은 충분히 갖추셨다. 그래서 자식들을 타이를 때면 감히 아무도 대꾸조차 못했다.
말년에 갑작스레 고관절을 다쳐 돌아가시는 바람에 효도할 기회를 못 가져 한스러웠다. 해마다 기일이 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어머니를 추모하고 산소에 간다. 간단히 차린 음식과 꽃을 놓고 절하면서 북받치는 눈물을 맘껏 흘린다. 비록 육신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의 자태와 정신만은 가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살아 있을 것이다. -최남이의 아들 우정렬
2026-04-0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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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에게] 당신이 사랑했던 부산을 떠올립니다
남편은 생전 부산을 참 많이도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기억이 머무는 곳이자, 너무 일찍 곁을 떠나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한데 어우러진 마음의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부산은 단순히 자라온 동네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였고,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그리움의 실체였습니다.
우리는 주로 휴가철을 이용해 부산을 찾곤 했습니다.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올라가면, 세월의 때가 묻은 남편의 옛집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우리 가족을 반겨주곤 했습니다. 결혼 후 설레는 마음으로 나란히 걷던 그 길을,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어느덧 부쩍 자란 아들의 손을 잡고 다시 찾았습니다. 남편은 아이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골목길 어딘가에 남아 있을 아버지의 흔적을 말없이 더듬곤 했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저는 남편이 찾고자 했던 것이 단지 옛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따스한 품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도 남편은 “올여름에는 부산에 한 번 다녀올까”라며 그곳의 푸른 바다와 가파른 언덕을 습관처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소박한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한 채, 그는 서둘러 먼 길을 먼저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쯤 남편은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요.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부산의 어느 정겨운 골목을 유유히 거닐고 있을까요, 아니면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 긴 회포를 풀며 웃고 있을까요. 어느 곳에 있든 남편이 더는 외롭지 않기를, 그리고 그리움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보, 이제는 그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잠드세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부산의 시원한 바람과 아버지의 포근한 품 안에서, 부디 영원히 평안하기를 빌어요. 당신과 함께 걸었던 부산의 길들을 이제는 우리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김승원의 아내 이효정
2026-03-24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