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념으로 남아야 할 동래역 역사
/안대영 동래고 역사관 관장

코레일 동래역사(東萊驛舍)는 1930년대 일본의 건축양식으로 축조된 식민지의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건조물이다.
항일운동의 본거지인 동래 동래역 역사는 우리 민족의 지난 역사와 함께 수많은 애환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하지만 2013년에 일광까지 동해남부선 복선화 전철사업이 준공되면 동래역은 동래지하철 정류장과 같이 고가로 올라가고 1934년에 설립된 현재의 일본식 역사 건물은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놓여 있다.
동래역은 동래구 낙민동 12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동해남부선의 보통역이다. 동해남부선(총 연장 147.8㎞)은 1918년 10월 31일 경주~포항 구간이 먼저 개통된 이후 1935년 12월 16일 좌천~울산, 1937년 7월 16일에 부산~해운대, 동년 12월 해운대~좌천 구간이 개통되면서 완전히 개통되었다. 동래역은 1933년 7월 15일 보통역으로 시작해 1934년 동래역사 건물을 신축하여 수차례의 개·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민족학교인 동래고등학교 동래여자고등학교 원예고등학교(현 전자공고) 학생들 대부분은 울산 남창 좌천 기장 해운대 수영 등지에서 동해남부선으로 통학했다. 지금도 당시 기차통학을 했던 학생들은 동선회(東線會)를 만들어 지나간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동래역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동래역은 서양 선교사를 통해 근대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동래의 관문이며, 아울러 우리 민족의 수많은 애환과 함께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역사(驛舍)이기도 하다.1940년 11월 23일 부산 학생 항일 의거였던 노다이 사건으로 동래고 학생들이 대거 포승줄에 묶인 채 부산진경찰서로 이송 수감됐고, 학교 수업 대신 수영비행장 건설을 위해 학생보급근로대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전교생을 공사장으로 실어 나르던 동래역이었다. 새벽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교회 종과 수업 시종을 알리던 학교 종도 모자라 내상(萊商) 동래시장 명품 놋그릇 제기까지 수탈하여 부산항으로 실어 나르던 동래역!
어찌 이뿐이랴! 1937년 일본이 만든 조선 육군 특별지원법에 따라 학도병과 징용에 차출된 자들은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을 뒤로 한 채 '동래행진곡'을 부르면서 동래역에서 이별하였다. 또 나이 어린 소녀들을 정신대로 보낼 때 옷고름 부여잡고 '엄마! 엄마!' 부르며 울부짖던 절규를 동래역은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기적소리도 목이 메어 울었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18일에는 동래고 동래여고 내성초등 유락초등(현 낙민초등)이 육군에 징발되어 육군사관학교 육군보병학교 육군종합학교로 18일 만에 무려 현판을 세 번이나 바꿔 달면서 이곳에서 6주간 단기 교육을 받고 하루살이 소모품 소대장으로 배출된 초급장교 7천770명이 동래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방으로 투입돼 이들 중 1천770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동래역을 보전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하철 4호선 개통으로 동래역 접근성이 매우 용이해졌다. 둘째로 인근 동래패총 복천박물관 동래고역사관 박차정생가 충렬사 동래부동헌 동래향교 동래읍성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 기독교선교박물관 등 부산의 고대역사와 근대역사를 한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역사 문화관광 벨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래역 역사도 현 동래역 부지에 원형대로 이설하여 역사적 건조물 보존, 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이 전시되는 민속박물관을 만들어 부산지역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는 동래역사를 반드시 보존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