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쫓다] 2부-부산다움의 근원 부산요 6. 17~18세기 동북아 물류 중심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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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왜관서 일본은 물론 중국·동남아 물품까지 유통

특주은(왼쪽·1710년)과 수입은. 김동철 제공

공무역으로 수입된 동남아시아 물품들

중국에 가는 연행사는 무역이 허용됐지만, 일본에 가는 통신사는 허용되지 않았다. 17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의 합법적 무역은 부산 왜관에서만 이루어졌다. 왜관 무역에서는 두 나라 물품만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 물품도 거래되었다. 전근대 무역은 외교에 부수되는 통교무역적 성격이 강한 특징을 보인다. 두 나라의 무역은 크게 공무역, 사무역(개시), 밀무역의 세 형태로 전개되었다. 공무역은 운영 주체가 국가나 국가기관이었다. 공무역은 쓰시마에서 연간 8회 정도 정례 사절이 올 때 이루어졌다. 조선 측에서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파견된 일본어 통역관인 훈도와 별차가 담당하였다. 공무역에는 진상과 회사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공무역이 있다. 진상은 대마도주가 조선 국왕에게 물품을 바치는 행위다. 이에 답례하는 것이 회사다.

물소뿔·단목·후추 등 동남아 물품
나가사키와 대마도·부산왜관 거쳐
조선 국왕에게 진상품으로 바쳐져

왜관 내 개시대청서 사무역도 진행
조선 인삼·일본 은, 중국 백사와 비단
직접 교역과 중계무역으로 전개
18세기 중엽 비단 수입 금지 이후
주요 무역 품목이 약재와 구리로 전환

왜관은 변방인 동래의 발전 큰 기반
‘승정원일기’에 번화함 잘 나타나

진상품은 호초(후추) 단목(소목) 명반(백반) 등 동남아 물품과, 진주 무늬종이 벼루집 문갑 병풍 등 일본 물품이 주종이다. 회사품은 인삼, 호랑이 가죽, 표범 가죽, 흰 명주, 흰 모시, 흰 목면, 검은 삼베, 족제비털 붓, 참먹, 매, 화문석 등이 주종이다. 공무역 수입품은 구리 납 놋쇠 등 일본 물품과 물소뿔(수우각·흑각) 호초 단목 명반 등 동남아 물품이다. 특히 구리 납 물소뿔 단목 등 네 품목이 중심이다. 특히 구리와 납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공무역은 물품, 수량, 가격 교환 비율이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수입품에 대한 가격은 목면과 쌀로 지급했다. 이 두 물품이 공무역의 주요 수출품이다.

이처럼 공무역(진상 포함)으로 구리와 납 등 일본 물품은 물론 물소뿔 단목 호초 명반 등 동남아 물품이 조선에 수입되었다. 동남아 물품은 중국 배나 네덜란드 배가 싣고 와서 일본 나가사키에 판 것이다. 쓰시마는 나가사키에서 물품을 구입한 후 다시 부산 왜관으로 보냈다. 공무역 수입품은 동남아에서부터 먼 이동 경로를 거쳐 수입되었다. 조선이 직접 산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구입한 것이지만, 왜관은 동남아 물품이 유통되는 공간이었다. 단목은 붉은 색 물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 명반은 옷감의 염색을 촉진하는 매염제 역할을 하였다. 단목과 명반을 넣어서 붉은 옷감으로 염색하는 것이다. 호초는 조미료나 약재(소화 불량, 구토, 설사 등)로 많이 사용했다. 물소뿔은 활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궁각(弓角)’이라고 부른다. 물소뿔은 동남아에서 왜관까지의 긴 경로 때문에 수입이 제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1694년(숙종 20)에는 물소뿔 수입을 전담하는 ‘궁각계’라는 공인계가 만들어졌다. 다른 동남아 물품과는 달리 물소뿔은 무기 원료로서 공급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동래상인과 일본어 역관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이 계는 동래상인이 공무역을 한 대표적인 사례다.

왜관에서 만난 인삼과 은, 비단과 은의 길

일본 교토대 도서관 소장 <조선도회> 속 개시대청(네모 표시한 곳). 시대청(市大廳)이라고 쓰여 있다

공무역과 사무역(개시)은 왜관 안에 있는 개시대청(시대청)에서 이루어졌다. 개시는 두 나라의 상인들이 거래하는 형태다. 일부 금지 물품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는 물품, 가격, 수량에 제한이 없었다. 개시 때 상인들은 다양한 물품을 교역하였다. 수입품은 은 구리 납 황련(약재) 등 일본 물품과 단목 호초 침향 등 동남아 물품이 주종이다. 수출품은 백사(흰 비단실, 생사), 비단, 인삼 등이 주종이다. 백사와 비단은 중국 물품, 인삼은 조선 물품이다. 인삼은 평안도 강계 것이 유명했다. 1684년의 한 일본 측 자료를 보면, 수입품은 일본 은이 70%, 구리 납 등이 20% 정도이고, 수출품은 중국 백사와 비단이 약 80%, 조선 인삼이 약 20% 정도였다. 일본에서 수입된 은은 다시 백사와 비단을 수입하기 위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인삼 수출 대금도 대체로 은으로 받았다. 따라서 개시는 조선 인삼과 일본 은의 직접 교역과 중국 백사·비단과 일본 은의 중계무역이라는 이중구조로 전개되었다.

1727년(영조 3) 5월 25일 <승정원일기>를 보면, 일본 풍속에 조선 인삼의 효과가 커서, 서울에서 70냥에 산 인삼이 왜관을 통해 에도(현 도쿄)에 들어가면 300여 냥에 판다고 하였다. 조선 인삼은 불로장생의 명약으로서 일본에서 최고 인기 상품이었다. 1679년 네덜란드 상관장은 에도로 가는 도중에 오사카에서 쓰시마 사람들이 생사와 비단을 매매하는 현장을 보고, “예년과 같이 대마도주가 조선에서 가져온 중국 생사 14만~15만 근과 비단 2만 7000반(反)을 며칠 전에 오사카로 보내왔다. 난징 광둥 푸저우에서 만든 것과 길이가 다른 물건이다. 오늘 공매에 넘겨졌는데 가격은 정확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엄청난 양의 중국 생사와 비단이 중국-조선-부산 왜관-쓰시마-오사카로 이동하여 매매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은 나가사키에서 무역을 했다. 나가사키 무역은 막부가 직접 관할하였다. 왜관 무역은 막부 지시를 받는 것도 있지만, 대체로 쓰시마가 관할하였다. 그 때문에 나가사키에서 중국과 일본이 무역을 할 때에도, 왜관에서 조선 상인이 중국과 일본의 중계무역을 한 것이다. 조선 인삼의 길, 중국 비단의 길, 일본 은의 길이 서로 부산 왜관에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왜관 무역은 이 세 길의 수요·공급과 연동하면서 전개되었다. 일본의 수출 은은 순도가 80% 정도였다. 그런데 1697년 이후 순도 64%의 은이 인삼무역에 통용되자, 조선은 인삼 수출을 거부하였다. 쓰시마는 조선 인삼을 확보하기 위해, 순도를 올려줄 것을 막부에 호소하였다. 그 결과 1710년에 조선 인삼의 수입을 위해 순도 80%의 은이 특별히 주조되었다. 그만큼 일본의 조선 인삼 수입이 중요하였다. 이 은을 ‘특주은’ ‘인삼대왕고은’이라 부른다.

18세기 중엽 이후 왜관 무역의 변화

17세기 말 이후 일본은 줄곧 나가사키 무역에서 은 수출을 제한하는 통제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1715년에는 무역을 가능한 억제하는 새 무역정책(정덕신령, 正德新令)을 실시하였다. 은 수출 통제는 왜관 무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은 일본 은의 수입이 급격히 감소하자, 중국으로 은 수출하는 것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은 수출의 주요 요인은 중국 백사·비단의 수입 때문이었다. 1746년(영조 22)에 고급 비단 수입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비단 수입 금지책은 국내 상인은 물론 중국 상인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인 중국 상인은 정세태(鄭世泰)였다. 그는 당시 조선에 대한 비단 수출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강남에 비단 직조를 정지시켰지만, 사전에 주문 생산한 비단량이 과다하였다. 그래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정태세 집안은 쇠퇴하였다. 1746년에 이어 1787년(정조 11)에 다시 고급 비단의 수입을 금지하는 ‘금문사목(禁紋事目)’이 반포됐다.

조선의 인삼 생산 부진, 일본의 인삼 국산화, 일본의 은 수출 통제, 조선의 고급 비단 수입 금지 등 여러 요인으로 인삼, 백사, 비단, 은의 세 물품을 주축으로 하는 왜관 개시무역은 1740~50년대에 변하였다. 1760년대 이후에는 수출품은 황금(黃芩, 약재)과 말린 해삼, 수입품은 구리로 변했다. 19세기에는 수출품은 우피(소가죽), 우각조(소뿔·발톱), 황금, 말린 해삼의 네 물품이 주종이었다. 특히 소가죽이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다. 수입품은 구리 황련 진피 청피 등 약재가 주종이었다. 특히 구리가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물품은 물론, 중국과 동남아의 물품도 거래되었다. 왜관 무역은 변방의 도시 동래를 발달시킨 가장 중요한 물적 기반이었다. 1808년(순조 8) 6월 30일 <승정원일기>에서는 “동래는 ‘물중지대(物重地大, 물품이 많고 땅이 큼)’하여 번화함이 전주와 다름없다”고 하였다. 동래부사 김석의 <래부일기>에서는 “동래는 의관과 문물이 낙하(洛下, 서울·경기)와 비교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다. 왜관의 도시 부산은 동북아 물류의 허브 도시였다. 


김동철

부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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