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보상은 많이 받았죠?" 돗대산 추락사고 피해자 향한 낙인…손배소 담당 임치영 변호사 인터뷰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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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법원 100억, 韓 법원은 1.5억 원 배상 판결
신공항 논의는 돗대산 추락 사고 계기로 시작
지역 이기주의, 정치적 논쟁으로 보면 안 돼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21분. 중국국제항공 CA129편이 경남 김해 돗대산과 충돌했다. 129명이 숨지고 37명만이 살아남았다. 국내에서 발생한 항공기 참사 중 최대 규모였다.

그 후 19년. 변한 건 없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 외로운 법정 싸움을 이어갔다. 사회는 이들에게 "그래도 보상은 많이 받았죠?"라는 오해와 낙인을 찍었다.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2002년 4월 15일 김해공항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는 12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부산일보 DB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2002년 4월 15일 김해공항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는 12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부산일보 DB

미국과는 달랐던 한국 법원의 판단

중국 민항기 돗대산 추락사고 후 6개월여의 조사 끝에 2002년 10월 당시 건설교통부 항공사고조사위원회는 '항공기 사고조사 보고서'를 발표한다. 보고서는 사고 원인으로 김해공항의 안전 시설 부재와 기장의 과실을 꼽았다.

조사 결과 CA129편 조종사는 착륙을 3차례 시도하다 선회 가능 구역을 벗어났다. 제1부조종사도 복행을 시도하지 않았다.

김해공항 경고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활주로 가시거리 측정 장비는 산악지형에 빼곡히 둘러싸인 공항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북쪽의 산악지형은 구름과 안개로 덮여 있었고 공항에는 강한 남풍이 불고 있었다. '최악의 조건'과 '미숙한 비행'이 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유족 76명과 생존자 10명은 명백한 과실을 바탕으로 손해배상을 위해 법정에 섰다.

모든 것이 쉬워 보였다. 항공사와 기장의 과실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소송을 결정한 유가족은 가장 먼저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는 그들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판례가 있었다. 1997년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 괌 공항 착륙 시도 중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승객 254명 중 228명이 사망했다. 3년여의 소송 끝에 괌 법원은 대한항공 보험사인 영국 로이드 보험사에 1인당 최대 10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5년. 똑같은 항공기 사고. 미국도 아닌 국내에서 이뤄지는 소송. 손해배상 소송을 맡은 피해자 측 변호인단도 승소를 자신했다. 괌 항공기 사고 소송에 참여했던 미국 허만 변호사와 당시 국내 5위권의 대형 로펌인 법무법인 충정이 소송에 참여했다.


2002년 김해공항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로 숨지거나 다친 탑승객들의 가족들이 항공사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자 원고측 임치영 변호사(가운데)와 유족 대표(오른쪽)가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부산일보DB 2002년 김해공항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로 숨지거나 다친 탑승객들의 가족들이 항공사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자 원고측 임치영 변호사(가운데)와 유족 대표(오른쪽)가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부산일보DB

3심까지 길고 길었던 8년, 그러나...

2002년 사고 직후 소송을 준비한 변호인단은 2년만인 2004년 4월 16일 손해배상 청구액을 확정하고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 대상은 중국국제항공. 이때까지 유가족과 생존자 중 60명은 항공사와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 이들의 빠른 합의는 '사고를 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아픈 결정이었다. 일반 사고와 다른 처참한 항공기 사고의 황망함 탓에 언제 끝날지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소송의 길로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 유족 85명, 생존자 10명만이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2007년 2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법정. 변호인단은 손해배상액 최대 108억 원(괌 사고 기준). 부상자의 경우 경상 최소 9억 원, 최대 32억 원의 위자료를 청구했다. 소송을 담당했던 임치영 변호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번 소송은 꼭 이겨야 한다.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위해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꼭 받아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던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3년여 재판의 쟁점은 항공기 사고를 보는 관점이었다. 국내에서 전례 없는 항공기 대참사. 유가족과 생존자가 겪는 사고 후 트라우마 등을 근거로 변호인단은 이 사고가 일반사고와는 다른 대형 재난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기존의 사고 위자료 산정 방식과 이번 사고는 달라야 한다는 논거를 펼쳤다. 재판 과정에서 생존자들은 사고 후 트라우마를 입증하기 위해 정신병동으로 향해야 했다. 정신감정을 통해 사고 후유증이 심하다는 걸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변호인단은 중국국제항공이 가입한 영국 로이드 보험사 보험증서도 자료로 법정에 제출했다. 항공사가 청구 위자료를 제출할 여력이 된다는 의미였다. 변호인단은 유가족, 생존자 한 명 한 명과 모두 면담을 진행했다. 생전 희생자와 가족의 단란했던 이야기, 사고 당시 생존자들의 생생한 목격담을 가지고 법정에서 호소했다.

재판부의 판단은 기대와는 달랐다. 최대 1억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청구액의 18% 정도 액수였다. 사실상 일반 교통사고와 같다는 논리를 펼쳐온 항공사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기존 교통사고 위자료 최대치인 5000만 원보다는 많았지만 유가족·생존자의 슬픔과 '악몽'을 덮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항소심과 상고심. 단 한 명의 유가족과 생존자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최악의 참사'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합당한 손해배상을 받는 것이 생존자들에게는 살아남은 도리였고 유가족에게는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대법원은 "항공기 사고에 피해자 과실이 개입될 여지가 없고 항공기 사고 피해 보상이 장기간 소요되는 점 등의 특수한 사정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하면서도 원고 측의 손해배상 청구액을 기각했다. 8년간의 소송 끝에 주어진 위자료는 일반 교통사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동차 사고든 대형 사고든 사람 목숨의 가치를 같게 평가한 단순 논리였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없어야 한다는 예방 목적으로 강력한 손해배상의 선례를 남겨야 한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임 변호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금과옥조처럼 믿었던 판례의 한계, 국내 법원의 한계를 실감했다. 그는 "그 전까지는 판례를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선례가 옳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8년간의 소송을 담당했던 임치영 변호사. 임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김해공항 돗대산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를 꼽았다. 이재화 PD 8년간의 소송을 담당했던 임치영 변호사. 임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김해공항 돗대산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를 꼽았다. 이재화 PD


김해공항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 6주기 추모제가 2008년 4월15일 오전 경남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 경남영묘원내 추모공원에서 열려 한 유족이 사망자 명단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고 있다. 부산일보 DB 김해공항 돗대산 항공기 추락사고 6주기 추모제가 2008년 4월15일 오전 경남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 경남영묘원내 추모공원에서 열려 한 유족이 사망자 명단이 새겨진 비석을 바라보고 있다. 부산일보 DB

19년, 변한 건 없다

2020년. 이제 유가족도 생존자도 추모비 앞에 모이지 않는다. 아픔을 잊으려 애써 살아가는 동안, 매년 추모비에 앞에선 '새로운 공항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곡소리를 대신한다. 사고 이후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2020년까지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벌써 잊었습니까"라는 희생자들의 목소리, "김해공항 안전 문제를 해결하라"는 시민들의 외침은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지역 이기주의로 곡해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사 8개월 후인 2002년 12월, 당시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는 신공항이 필요하다는 연구용역 결과를 냈다. 2006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 검토를 지시했다. 김해공항으로는 위험하고, 소음피해가 크며, 앞으로 늘어날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신공항 논의는 백지화됐다. 이후 재점화된 논의는 2016년 6월,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왔다. 박근혜 정부의 선택은 김해공항 확장이었다.

김해공항 확장은 관문공항, 안전한 공항을 염원한 부울경 시민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안이었다. 2017년 대선 때 신공항 논의는 다시 불붙었다. 당시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24시간 운영되는 동남권 관문공항’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가덕도 신공항을 염두에 둔 공약으로 해석됐다. 국무총리실의 재검증 끝에 '김해신공항'이 사실상 백지화했지만 다시 원점이다. 2003년부터 올해까지 부산시가 공항 이전 용역을 발주한 횟수만 10차례다.

박인호 신공항추진범시민운동본부 상임대표는 "신공항 논의가 돗대산 추락사고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며 "비슷한 사고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공항이 필요하다는 매우 간명한 이야기가 세월이 지나 지역 이기주의, 정치적 논쟁거리로 왜곡된 것은 통탄할 노릇이다"고 말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영상제작=이재화 PD jhlee@busan.com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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