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트레비 분수에서는 왜 동전을 던질까?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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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문학기행-이탈리아〕 트레비 분수


로마에는 분수가 정말 많다. 크고 작은 걸 다 합치면 무려 2000개를 넘는다. 여러 나라의 많은 도시를 둘러봐도 로마만큼 많은 분수를 가진 곳은 없다.

유명한 곳만 해도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 무어인의 분수와 스페인 광장의 난파선의 분수를 손꼽을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판테온 앞 광장에도 어김없이 분수가 있다.

이처럼 헤아릴 수도 없는 로마의 분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연 트레비 분수다. 로마인은 물론 외국인도 이곳을 ‘분수의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다.

로마인은 수로를 만들면 크든 작든 꼭 분수를 건설했다. 고대는 물론 중세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트레비 분수는 이런 로마의 수로 건설 역사는 물론 중세 시대 교황의 분수 건설 역사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곳이다.


트레비 분수 전경. 트레비 분수 전경.

■물 부족 도시의 수로


로마인은 건국 후 400여 년 동안은 테베레 강과 우물, 샘에서 퍼온 물을 이용하는 데 만족했다. 테베레 강은 수량이 충분치 않았고 수질이 그다지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건국 초기에는 인구가 많지 않아서 물이 모자라지 않았다.

왕정 시대는 물론 공화정 시대에도 상당기간 동안 강에서 물을 끌어와 식수 등으로 사용하는 데 만족했다. 여기에 소규모 개울이나 우물, 샘은 물론 빗물을 받아두는 저수조도 적극 활용했다.

BC 4세기 무렵부터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이민자가 크게 늘고 외국 상인이나 노예도 로마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급증한 탓에 물 수요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강물을 끌어 쓰거나 개울, 우물, 샘으로는 수요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공화정과 제정 시대에 목욕탕이 늘어나면서 물 부족은 더 심해졌다.

공화정 시대에는 물 부족 때문에 난리가 날 정도였다. 다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강에 물을 뜨러 가야 했다. 이런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집정관은 강의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강둑에서 일정한 거리 안에는 집을 짓지 못하게 법을 만들 정도였다.

로마는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공화정 시대부터 도시 외곽에서 수원을 발굴하고 수로를 건설해 물을 시내로 공급하려고 애썼다. 새로 만든 수로에는 자금을 댔거나 공사를 관리한 책임자 이름을 붙여 아쿠아 아피아, 아쿠아 마르키아, 아쿠아 이울리아라는 식으로 불렀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터키의 수로.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터키의 수로.

로마 제정 말기까지 만든 아쿠아(수로)는 모두 14개나 됐다. 일부에서는 19~20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1세기 로마 시대 학자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자연의 역사』에서 ‘목욕탕, 저수지, 가정용, 해자, 정원, 교외 빌라에 물을 대는 수로의 수와 그 수로가 지나가는 산과 계곡, 아치의 거리를 계산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놀라운 일은 따로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감탄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로마의 수로 건설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게 된 것은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수로 관리 책임자였던 율리우스 프론티누스가 쓴 『로마의 수로』라는 책 덕분이다. 로마의 물 공급, 관리 시설 및 물 공급 상황을 정리한 책이었다. 책을 펴냈을 정도였으니 로마인이 물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인은 수로를 통해 이송한 물을 시내 곳곳에 만든 분수로 배분했다. 아쿠아마다 물 공급 구역은 달랐다. 아쿠아 아피아는 7개 구, 아쿠아 마르키아는 10개 구, 아쿠아 테풀라는 4개 구, 아쿠아 비르고는 3개 구에 각각 물을 공급했다.

분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았다. 대개 돌을 깎아 만든 지름 10m 정도 분수였다. 평범한 화병 모양이 일반적이었다. 삼각대 모양도 있었다. 청동 조각상을 분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로마인은 수로를 통해 얼마나 많은 물을 공급했을까? 역사학자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하루 1억 300만~1억 6000만L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로마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 공급량을 인구로 나누면 1인당 하루 1300~1600L에 해당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인구가 15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1인당 하루 물 공급량은 830~1060L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400L라고 하니 로마의 공급량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비교할 수 있다.


트레비 분수 측면. 트레비 분수 측면.

■아그리파의 아쿠아 비르고


BC 3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도 물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제국의 전성기를 맞아 각종 건물이 늘어나고 로마로 몰려오는 사람이 증가한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황제는 친구이자 장군이며 사위였던 아그리파에게 새로운 수로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아그리파가 처음에 만든 수로는 아쿠아 율리아였다. 그는 새 수로를 기존 수로인 아쿠아 테풀라와 연결해 로마로 물을 운송했다.

아그리파는 15년 뒤에는 대중목욕탕에 물을 공급할 수로를 하나 더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트레비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아쿠아 비르고였다.

총 길이 20㎞의 지하 수로인 아쿠아 비르고는 매일 로마에 10만㎡의 물을 공급했다. 물이 아주 깨끗해 목욕탕 용수는 물론 식수로도 호평을 받았다. 이 수로의 발견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해진다.

‘전쟁에 나선 로마 병사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몹시 목이 말랐다(아그리파가 샘을 찾으라고 보낸 병사라는 말도 있다). 그들은 물을 찾아 돌아다니다 젊은 양치기 소녀를 만났다.

병사들은 “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소녀는 주저하지 않고 물이 풍부한 온천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양치기들이 사용하던 곳이었다.

로마에 돌아온 병사들은 정부에 온천 이야기를 전했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로마 시내에 식수를 공급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그리파는 손뼉을 쳤다. 그는 당장 수로 시설을 설치해 물을 시내에 공급했다.

온천 위치를 가르쳐준 사람이 소녀였다는 점에 착안해 그 수로를 ‘처녀의 물’이라는 뜻인 아쿠아 비르고라고 불렀다.’


트레비 분수 조각. 트레비 분수 조각.

■수로의 쇠퇴와 복원


로마의 쇠퇴와 함께 수로는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5세기 무렵에는 알라리크가 이끈 서고트족의 로마 포위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알라리크는 성문을 닫아걸고 버틴 로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물 공급을 끊었다. 테베레 강을 막는 한편 수로도 파괴해버렸다.

알라리크가 물러간 뒤 부분적으로 복원된 수로는 다시 토틸라가 이끈 동고트족의 공격 때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비잔틴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6세기 무렵에는 대부분 수로가 기능을 상실했다. 아무도 수로를 유지, 보수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000년 동안 로마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초창기 로마인처럼 테베레 강이나 도시 인근 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사정은 16세기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 중세 시대에 물 문제는 역대 교황의 고민거리가 됐다.

당시 부분적으로나마 기능을 발휘하던 수로는 아쿠아 비르고 하나밖에 없었다. 이 수로는 퀴리날레 언덕 아래 삼거리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이곳을 라틴어로 트리비움 또는 트레이오라고 불렀다.

아쿠아 비르고를 정비하는 일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교황은 니콜라오 5세(1447~55년)였다. 식수난 해결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던 그는 아쿠아 비르고의 분수를 보수하고 여기에 새 시설 몇 개를 덧붙였다. 이름은 아쿠아 베르지네로 바꾸었다. 베르지네는 ‘처녀’를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라틴어인 아쿠아 비르고를 단순히 이탈리아어로 바꾼 데 불과했다.

당시 아쿠아 비르고에 물을 공급하고 있던 샘은 고대 로마 시대 아그리파가 발견해 연결했던 양치기 소녀의 샘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대에 비해 물맛이 나빴고 수질도 좋지 않았다.

바오로 3세(1534~49년)는 이 점을 고려해 아쿠아 비르고를 옛 샘과 다시 연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교황청과 로마 시청의 관료주의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 헐뜯기 바빴던 건축가들 때문에 사업이 막혀버렸다.

바오로 3세의 뒤를 이은 비오 4세(1559~65년)와 비오 5세(1566~72년) 때에야 비로소 아쿠아 비르고 복원 작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두 교황의 의지와 노력 덕분에 수로는 옛 샘과 다시 연결돼 원래 수질을 되찾게 됐다. 또 아쿠아 비르고와 연결되는 지하 수도관이 만들어져 시내 곳곳의 분수에 물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트레비 분수에 몰린 관광객. 트레비 분수에 몰린 관광객.

■새 분수를 만들자


아쿠아 비르고와 수도관을 나름대로 정비한 교황청은 1570년 11월 4일 ‘샘 위원회’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기경들이 참석한 위원회의 목적은 하나였다.

‘로마에 새롭게 분수를 만들자!’

위원회는 아쿠아 비르고에서 물을 공급받는 주요 지점에 웅장한 분수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위원회가 고른 분수 건설 장소는 포폴로 광장, 콜로나 광장 등 열 곳이었다. 당시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이 덕분에 로마에서는 분수 건설 바람이 불었다. 궁전 소유자나 시 행정관, 교황, 그리고 재산을 제법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수를 짓고 싶어 했다.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분수 건설 기술도 발달하게 됐다.

특정 건축가 한 명이 아니라 조각가, 공예가 등 다양한 예술가가 협업을 통해 분수를 만드는 게 일상적이었다. 건축가는 분수 건축을 의뢰받으면 기본 설계안을 만든 뒤 모양, 비용을 건축주와 상의한 뒤 최종 결정을 내렸다.

분수 건설에 필요한 석재는 먼 산의 채석장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이나 시내에 산재한 고대 로마 공중목욕탕에서 뜯어오는 게 더 간편하고 쉬웠다.

물론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가 모두 예정대로 건설된 것은 아니었다. 수도관 수압이 낮아 분수를 짓기로 했던 장소까지 물이 운반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공간이 너무 좁아 분수를 세우기에는 부적합한 경우도 있었다.

위원회에서 계획했던 분수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곳은 1572년 포폴로 광장의 분수였다. 2년 뒤에는 나보나 광장에도 분수가 건설됐다.


포폴로 광장의 분수. 포폴로 광장의 분수.

■트레비 분수를 재건하다


아쿠아 비르고의 종점인 트리비움에 새 분수를 만들려는 계획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교황은 우르바노 8세(1623~44년)였다. 그는 오래 되고 작은 분수를 새롭게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가 지안로렌조 베르니니에게 일을 맡겼다.

베르니니는 폴리 궁전 앞의 좁은 광장을 크게 넓혀 분수 조성 공간부터 확보했다. 기존 분수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단순한 수조는 없애버렸다. 대신 아주 큰 수조 두 개를 새로 설치했다.

하지만 교황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원자가 없어져 사업은 중단돼 버렸다. 이후 여러 교황은 다양한 이유로 트리비움 분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미뤄졌던 트리비움 분수 사업에 다시 손을 댄 사람은 교황 클레멘스 12세(1730~40년)였다. 이번에도 착공은 쉽지 않았다. 공사를 어느 건축가에게 맡기느냐를 두고 교황과 로마인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클레멘스 12세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 출신 건축가 겸 조각가 알레산드로 갈릴레이를 로마로 불러 라테라노 대성당에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인 카펠라 코르시니를 만들게 했다.

갈릴레이를 좋아한 교황은 더 많은 일을 주고 싶었다. 그는 공모전이라는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그래서 1732년 두 차례 공모전을 개최했다. 하나는 라테라노 대성당 정면 개축공사였고, 다른 하나는 트레비 분수 건설공사였다.

갈릴레이는 첫 공사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했다. 로마 건축계에서는 로마 출신인 살비의 설계안이 더 훌륭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심사위원단이 1등으로 뽑았으니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트레비 분수를 건설하기 위한 두 번째 공모전에서도 갈릴레이가 1등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더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교황은 결국 살비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트레비 분수 공사는 1732년에 시작됐다. 클레멘스 12세는 3년 안에 공사를 마무리 짓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열정에 차 있었다. 그러나 사업비가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공사는 계속 미뤄져 30년 뒤에야 겨우 마무리될 수 있었다.

클레멘스 12세는 건축이 끝나기 전에 눈을 감고 말았다. 1762년 5월 22일 분수 개통식의 영광은 후임 교황인 클레멘스 13세(1758~69년)가 차지하게 됐다.


트레비 분수 측면. 트레비 분수 측면.

■바다 길들이기


건축가 살비가 생각한 트레비 분수의 주제는 ‘바다 길들이기’였다.

폴리 궁전 정면 벽 아래쪽에 붙은 긴 바위의 개선문 아래로 물을 상징하는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가 등장한다. 그는 히포캄스(말) 두 마리가 이끄는 조개 모양 전차를 타고 있다. 모든 물을 다스린다는 뜻을 담은 홀을 들고 있다.

왼쪽 히포캄스는 광폭하게 날뛴다. 반대쪽 히포캄스는 거꾸로 아주 온순하다. 바다는 때로는 폭풍이 휘몰아치며 난폭한 곳이지만 때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온한 곳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오케아노스의 양쪽에는 석상이 두 개 있다. 왼쪽 석상은 풍요를, 오른쪽 석상은 건강을 나타낸다. 풍요로우면서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에 걸쳐 인간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오케아노스 뒤편에는 양각 부조가 두 개 붙어 있다. 하나는 트레비 분수가 연결된 고대 로마 수로인 아쿠아 비르고를 만든 아그리파의 모습을, 다른 하나는 로마 병사들에게 온천을 가르쳐준 젊은 양치기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양각 부조 뒤에는 조각 네 개가 세워져 있다. 사계절과 물의 이점을 상징하는 조각이다.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풍성한 과일, 비옥한 들판, 가을의 선물, 편리한 초지와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분수 꼭대기에는 완공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3세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트레비 분수의 오른쪽 벽에는 화분처럼 생긴 조각 ‘아소 디 코페’가 세워져 있다. 이 조각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살비는 분수 건설 공사를 관리하면서 하루 종일 공사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식사도 공사장에서 했고, 때로는 잠도 여기서 잤다. 이발은 공사장 주변의 이발소에서 해결했다. 그가 이발소에 갈 때마다 주인 이발사가 트레비 분수의 설계와 조각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 데 없는 말을 했다.

한두 번은 참았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살비는 이발소 출입을 중지한 것은 물론 이발사가 가게 안에서 분수 공사장을 볼 수 없게 하려고 조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아소 디 코페였다.’


트레비 분수의 히포캄스. 트레비 분수의 히포캄스.

■트레비 분수의 동전 던지기


트레비 분수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두고 두 가지 가설이 전해진다.

분수는 세 개의 수조로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3’을 뜻하는 트레비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주장이 있다. 분수가 있던 장소는 ‘삼거리’라는 의미의 트레비움이었다. 여기에서 트레비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트레비 분수 주변에는 늘 관광객이 붐빈다. 지명이 삼거리였던 만큼 여러 곳으로 길이 트여 있어 오고 다니기가 편하다. 게다가 무더운 로마의 여름 날씨에 한참 돌아다니다 지치면 분수 앞에 앉아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쉴 수도 있다.

트레비 분수의 물에는 석회 성분이 없다. 고대 로마 시대에 아주 맛있고 건강에 좋은 물로 여겨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분수에서 물을 바로 마실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마시지 않는 게 건강에 좋다.

트레비 분수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뒤로 돌아서서 동전 던지기다. 이 이벤트의 유래를 놓고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온다.

먼저 1954년 아카데미영화제 주제곡상을 받은 영화 ‘분수와 동전 3개’라는 영화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영화에는 ‘동전 한 개를 던지면 로마로 돌아오고, 두 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세 개를 던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부터 동전 던지기가 시작됐다고 상당수 여행 가이드는 주장한다.


트레비 분수의 동전 던지기. 트레비 분수의 동전 던지기.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풍습은 19세기 한 독일인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유럽 중산층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였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유물 상인이었던 볼프강 헬비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헬비그는 1862년 독일고고학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로마에 갔다가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아예 눌러 살게 됐다. 그곳에서 만난 러시아 공주 나디야 샤코브스코이와 결혼한 덕분에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부자가 됐다.

헬비그는 부인 덕분에 상류층과 어울리게 됐고, 그들을 위해 큰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는 트레비 분수 앞에서 축제를 진행하던 도중 “고대 로마인은 분수와 다리의 신에게 희생물을 바쳤다”면서 분수에 동전을 던졌다.

헬비그의 행동을 본 여러 사람이 여행 서적이나 편지에 그 내용을 담아 유럽 곳곳에 퍼뜨렸다. 이후 트레비 분수에서 동전을 던지는 관습이 생겨나게 됐다.

실제 고대 로마 시대에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온 여행자가 로마 인근에 도착했을 때 개울을 다스리는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헬비그와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 온 여행자 중에는 조상의 관습을 따라 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유래가 어떻든 동전 던지기는 재미있는 관습이다. 그렇다면 트레비 분수에 고대 로마의 동전인 세스테르티우스를 던지면 어떨까? 금화인 아우레우스를 던질 수는 없고….

그렇게 하면 옛날로 돌아가 화려했던 고대 로마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상상은 늘 여행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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