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 부산] ⑦ 서면 학원가에 학생이 쏟아지던 때가 있었지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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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부산’은 부산 추억의 장소를 독자들의 사연과 <부산일보> 소장 사진·기사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1989년 부산 부산진구에 위치한 부산단과학원 앞의 모습. 학원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 1989년 부산 부산진구에 위치한 부산단과학원 앞의 모습. 학원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DB 일러스트=이지민 에디터 mingmini@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눌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죠. 물론 학원에 다니지 않고 공부를 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한 번쯤 학원에 가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괜히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고, 더 공부하고 싶은 의욕에서일 수도 있죠.

부산은 서울 못지않은 대도시였고, 명문 학교들도 많았던 덕분에 학원도 성행했습니다. 특히 서면 학원 골목에는 수업 마치는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곤 했죠. 부산에는 경남학원, 청산학원, 부산학원, 서면문리학원, 혜화문리학원, 현광문리학원, 서전학원, 대신학원 등이 운영되다 추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이제는 추억이 된 그 장소. 그 시절 학원과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독자들의 사연을 만나봤습니다.


■ 그때 그 시절

#현광문리학원

2000년 중반쯤, 지금은 경찰학원이 많은 서면 학원 골목에 현광문리학원이 있었어요. 근처에 혜화문리학원도 있었고 단과학원이 많았었네요. 그때만 해도 부산에 학생들도 많았고, 인터넷 강의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라서 다들 단과학원 많이 다녔어요. 유명한 선생님들 강의 들으러 줄서고 했는데, 사람이 진짜 많아서 빨리 안 가면 엄청 뒤에 앉아서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만 해도 부산 학원 거리가 노량진 뺨치는 정도의 인기였던 것 같아요. / 부산 연제구 32세 이*영


#서면문리학원

1989년 서면문리학원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 1989년 서면문리학원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모습입니다. 부산일보 DB

서면문리학원 건물과 옆 건물 사이 좁은 신문 가판대가 아버지의 일터였습니다. 아버지는 나이 90이 되도록 27년 가까이 엄마와 함께 그 자리를 지키셨죠. 저도 대학생 때 방학이면 가판대 일을 도와 드리기도 했었네요. 그러다 엄마가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6개월 정도 아버지와 제가 그 가판대를 지켰어요. 당시엔 서면 학원 거리에 재수생뿐 아니라 직장인도 영어 공부하느라 많이들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 덕분에 우리 집 살림살이도 많이 나아졌지요. 참 추억의 서면 학원 동네입니다. / 부산 부산진구 54세 정*숙


#서전학원

2007년 부산 동래구 서전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칠판을 보니 국어 수업인 듯 보이네요. 부산일보DB 2007년 부산 동래구 서전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칠판을 보니 국어 수업인 듯 보이네요. 부산일보DB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1995년~1997년 2월까지 동래 서전학원 다녔어요. 처음 다닐 땐 서전학원이 아니라 '문봉학원'이었고, 1996년도에 서전학원으로 이름 바뀌었어요. 동래시장에서 멀지 않았던 곳에 있었는데 1996년에 명륜초등학교 근처 새 건물로 이사 갔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 들어갈 때 반편성고사도 치고 수준별로 반도 정했어요.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 학원이어서 맨날 영어단어 외워서 시험 치고, 학원에서 정기적으로도 시험도 쳤네요. 토요일에도 나갔던 것 같아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립네요. /부산 해운대구 38세 장지원


■ 시대에 따라 변한 학원

요즘 중·고등학교는 소위 '뺑뺑이(무작위 추첨)'로 가죠. 1960년대만 해도 시험을 쳐서 중학교에 진학했는데요. 명문 중학교 입학이 곧 명문대 입학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보니, 중학교 입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하기도 했다죠. 이 탓에 사교육 열풍이 입니다.

하지만 1969년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니, 고등학교 입시가 과열됐습니다. 부산에서도 이 시기 이름을 떨치던 학원이 있는데요. 부산 서구 대신동의 '경남학원'과 동구 초량동의 '청산학원'이었습니다. 경남학원엔 경남고 출신 강사가 많았고, 청산학원엔 부산고 출신이 많았다고 하네요.

1974년 고교평준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사교육은 본격적으로 대입 입시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다 1980년 '7·30 교육개혁 조치'가 내려지면서 재학생이 학원에 다닐 수 없게 됐죠.

1980년 경남학원 앞에 '당국의 지시에 의해 8월 1일부터 중·고등 재학생의 수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알림 글이 붙어있습니다. 부산일보 DB 1980년 경남학원 앞에 '당국의 지시에 의해 8월 1일부터 중·고등 재학생의 수강은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알림 글이 붙어있습니다. 부산일보 DB

1980년엔 재수생들만 학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국의 단속도 이뤄졌지만 사복을 입고 와 몰래 수업을 듣는 재학생도 있었다고 하네요.

이 시기 부산에서는 범천동 '부산학원'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을 모두 가르치는 종합학원이었죠. 당시 부산뿐 아니라 경남, 울산, 경북, 전남 등지에서도 몰려들었다고 하네요. 재수생 종합반이 있었고, 단과반도 운영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면 학원 거리에는 서면문리학원, 부산단과 학원이 들어섰습니다. 서면 광무교 근처 혜화여고가 있던 자리에는 혜화사관학원도 들어섰죠.

1989년 6월부터 중·고등학생이 방학 중에는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고, 1990년대 초에는 학원 관련한 규제가 풀리면서 학원가는 호황기를 맞이합니다.

1990년대 학원가는 주거지 이동에 따라 본거지를 옮겨갑니다. 양정로터리, 연산로터리, 동래로터리 쪽으로 중심이 옮겨가고, 이후엔 수영구, 해운대구로도 옮겨가죠. 양정한샘학원 연산한샘학원, 동래구 대동학원·서전학원·대신학원, 수영구 성문학원, 해운대구 서전·성문학원 등이 학생들을 끌어들였습니다.

2003년 동래 대신학원의 수업 모습.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 2003년 동래 대신학원의 수업 모습.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이네요. 부산일보DB

2000년대엔 동네 곳곳에 보습학원도 우후죽순 생겼습니다. 속셈학원에서 발전한 보습학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소소하게나마 동네 학생을 상대로 운영되어 왔죠. 또 영어와 외국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학원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 중·후반, 개인 PC와 휴대용 동영상 플레이어(PMP)가 보급되면서 '인터넷 강의(인강)'가 보편화됩니다.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강사에게 쏙쏙 뽑아 들을 수 있으니, 단과학원 중심으로 운영되던 서면의 학원가도 크게 타격을 받았죠.

KTX의 개통도 학원계에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부산~서울을 2시간 30분 만에 오갈 수 있으니, 주말 동안 서울 유명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도 생겨났죠. 또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이 기숙학원 사업을 확장하면서, 부산지역의 재수생마저 흡수해갔습니다. 2010년대엔 부산혜화사관과 부산학원이 통·폐합 됐고, 기숙 학원들은 모두 경남 김해나 양산, 울산 등지로 옮기면서 부산에는 기숙학원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수강생들이 줄어들면서 부산학원과 혜화사관학원이 통폐합 한 내용을 다루는 <부산일보> 2014년 2월 26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DB 수강생들이 줄어들면서 부산학원과 혜화사관학원이 통폐합 한 내용을 다루는 <부산일보> 2014년 2월 26일 자 기사입니다. 부산일보DB

부산학원총연합회 명예회장이자 대동학원 대표인 송긍복 대표는 "학령 인구는 줄어드는데 대입 정원은 대폭 확대되고, 학원 인가기준은 완화됐다. 예전엔 대형 학원만 운영할 수 있었는데 곳곳에 보습학원이 생기면서 규모가 큰 학원들이 서서히 문을 닫게 됐다"고 말합니다.

중·고등학생과 재수생들로 붐비던 서면 학원 골목엔 어느덧 공무원·경찰 등을 준비하는 고시생들만이 남게 됐죠.

"한 때는 부산이 서울보다 학원이 잘 됐어요. 서울 강사들이 부산 시장 장악하려고 내려 왔는데 부산 강사들을 이겨 내지 못했다니까. 물론 지금 부산에 계신 분들도 열심히 하고 계시지만, 예전 명성만 못 하죠." 송 대표의 말에서 아쉬움이 묻어났습니다.


■ 그때 그 사람

2000년 부산 서면 학원 골목에는 '현광문리학원'이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의 유명 강사 두 명이 함께 차린 단과 학원이었는데요. 영어 과목에 현광식, 국어 과목에 김광휘 두 강사가 함께 만든 학원이죠. 두 강사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현광'으로 지었습니다. 취재진은 부산과 서울에서 유명 국어 강사로 이름을 날렸던, 김광휘 씨를 만났습니다.

부산학원 국어 강사, 현광문리학원 원장, 부산종로학원 원장을 역임한 김광휘 씨의 모습입니다. 2014년 이후 학원 강사로서는 은퇴했지만, 아직 과외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유리 기자 yool@ 부산학원 국어 강사, 현광문리학원 원장, 부산종로학원 원장을 역임한 김광휘 씨의 모습입니다. 2014년 이후 학원 강사로서는 은퇴했지만, 아직 과외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유리 기자 yool@

서울 영등포구 출신에 인천교대를 나온 김 씨는 20대 초반까지 부산과 인연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군 생활을 부산에서 하고, 제대 이후 중등 임용을 치면서 부산에 머무르고 있었죠.

그러다 1968년 군대 선임의 부탁으로 부산 서면 대한극장 옆 ‘한성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시대 셔츠, 범표 신발 공장에서 근무하던 ‘공원’들이 검정고시를 치기 위해 다니던 학원이었습니다. 수강료를 안 받다 보니 월세를 내지 못했고, 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말죠.

이후 김 씨는 서면 복개천 근처 방직공장을 빌려 대안학교 격인 ‘부일재건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맡습니다. 이곳 역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자원봉사자로 나선 강사들과 함께 50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죠. 수강료를 받지 않으니 운영난은 절로 따라왔고, 학교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 집도 팔았지만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

생활은 해야 하니, 학원에 들어가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72년 처음 들어간 곳이 부산진구 범천동에 있던 범일 학원이었습니다. 이 학원은 이후 ‘부산학원’이라는 부산에서 가장 큰 대형학원이 되죠. 당시 국어는 김광휘, 영어는 옥진수, 수학은 박영돈, 사회는 송긍복 선생이 맡았습니다.

그는 '선생은 학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종합반 담임일 때 수시로 당구장에 도망가는 재수생을 붙잡아 엄하게 가르치고는 고려대 법대에 보내기도 했죠.

1990년 부산학원의 전경입니다.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의 유명 대학에 수강생들이 많이 합격했다. 부산일보DB 1990년 부산학원의 전경입니다.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의 유명 대학에 수강생들이 많이 합격했다. 부산일보DB

김 선생은 1982년엔 서울로 올라갑니다. 서울 성지학원과 서울역 옆 대일학원도 거쳤죠. 소위 '1타 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부산학원에서 다시 와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1~2년 정도만 있으려 했지만, 결국 눌러앉았죠. 부산학원 단과반 부원장도 하고 이후엔 종합반 수업도 했습니다. 그러다 독립해 동래구청 근처에 재학생 학원인 '관악학원'을 운영했죠.

2000년, 그에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부산에서 유명 영어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현광식 선생이었죠. 현 선생의 제안으로 서면에 현광문리학원을 엽니다. 현광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도 강의는 꾸준히 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단과학원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당시는 학원의 ‘브랜드’가 중요하던 때라서 서울로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부산에도 이름 있는 학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부산종로학원 원장으로 가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강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관리자의 삶을 살았죠. 2014년엔 부산종로학원을 그만두면서 학원 강사로서의 삶을 마치는 듯했습니다.

1년 정도 강의를 쉬고 있었는데, 후배와 제자들의 성화에 다시 수업을 하게 됐습니다. 2015년부터는 남천동의 한 학원의 공간을 빌려 과외 수업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읽는 법'을 가르친다고 하는데요. '읽는 법만 제대로 배우면 중3도 수능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요즘은 주말에만 수업을 하고, 평일에는 자료를 준비합니다. 어떻게 하면 '열 마디 대신 한마디 말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일주일을 보낸다고 하네요. 이제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내년부터는 진짜 쉬어볼까 하는 고민도 안고 있다네요.

지금껏 김 선생을 거쳐 간 제자가 수만 명은 넘을 겁니다. 고단한 수험생 기간을 견뎌내고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내고 있을 제자들에게 안부를 건넵니다.

“제가 학생들한테 ‘태어난 새는 창공을 날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꿈을 가지고 살라는 말도 했고요. 저를 거쳐 간 제자들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서 창공을 날고 있기를 바랍니다.”

*가비방, 마리포사, 민들레영토, 알렉산더 등 이제는 사라진 부산 카페·식당에 담긴 독자 분들의 추억을 들려주세요.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부산일보’ 계정 관련 게시글에 댓글 남겨 주시거나 메시지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yool@busan.com 메일함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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