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부산의 뱃길]②낙동강 수로는 대륙과 해양의 숨길이었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 김수빈 부산닷컴 기자 suvely@busan.com ,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 강승민 부산닷컴 기자 kang00527@busan.com , 박정훈 부산닷컴 기자 pjh045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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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에서 안동까지 오가던 황포돛배
소금과 문화, 역사의 강물을 항해
낙동강 치수문화 새로운 관점 정립할 때

낙동강하구 조망대. 부산일보 DB 낙동강하구 조망대. 부산일보 DB

영남, 문화의 연결고리 낙동강 뱃길 ㅣ 대구 최초의 피아노가 들어온 사문진 나루터

유점길 선장은 일곱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황포돛배를 탔다. 낙동강 나루 구포에서 성장한 그는 황포돛배가 어떻게 갈게젓과 소금을 실어날랐고, 영남 내륙 깊숙한 생산한 쌀과 보리 콩을 가져와 구포장터에 풀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낙동강은 도로와 철도 등 육상 교통망이 발달하기 이전 수천년 동안 한반도 남쪽에 존재하면서 해양과 대륙의 문명 교류를 잇는 젖줄이었다.

지금은 경북 안동의 특산물이 된 안동간고등어는 영덕에서 생산한 고등어와 낙동강 하구에서 생산한 소금이 만나 만든 합작품이었다. 일본 건국 신화의 한 줄기가 경북 고령에서 비롯되었고, 고려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에서 합천 해인사로 올 수 있었던 것도 발달한 물길이 있어 가능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을 통해 보를 설치하면서 물길이 막혔지만, 낙동강은 부산을 지탱하던 내륙 교통의 거대한 축이었다.


황포돛배 선장 유점길 씨. 황포돛배 선장 유점길 씨.


갈게젓과 똥배가 오가던 곳

낙동강 하구 기수지역에는 수많은 생물이 서식했다. 특히 갈대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실뱀장어의 은신처였고, 그 뿌리는 큰고니의 살을 찌우는 먹이였다. 그런데 낙동강 하구 갈대밭에는 갈게가 있었다.

"장마가 지면 키가 큰 갈대의 머리 부분만 남습니다. 밤에 배를 저어 가까이 가면 갈대 끝 부분에 갈게가 새까맣게 붙어 있습니다. 금새 한 양동이 채웠습니다." 갈게로 만든 갈게젓은 낙동강 하구의 명물 음식이었다. 아마도 낙동강 유역에 사는 주민 중에 갈게젓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갈게를 소금으로 담은 갈게젓은 가을까지 잘 숙성돼 추수철이면 황포돛배에 실려 상류로 갔다. 삼랑진, 수산, 남지, 화원, 고령, 낙동, 고령, 상주, 안동에 도착한 황포돛배는 갈게젓과 소금을 부려놓았고, 물물교환을 통해 콩과 쌀, 보리 등이 빈배에 채워졌다. 가을걷이 무렵 상류로 올라간 배는 설날 즈음에 구포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3개월의 긴 여정이다.

똥배도 있었다. 삼랑진이나 김해 강변에 형성된 커다란 토지에 쓸 똥거름을 낙동강하구의 배들이 실어 날랐다는 것이다. 황포돛배는 다양한 화물을 실어날랐다.



김창명 무형문화재가 만든 하단포구 황포돛배. 김창명 무형문화재가 만든 하단포구 황포돛배.

황포돛배 장인의 수고로움

황포돛배는 바람을 이용할 수도 있고 노를 저어 이동할 수도 있다. 부산시무형문화재 김창명 장인은 아직도 황포돛배를 모은다. 배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은다고 했다. 여러 사람과 여러 도구가 힘을 합해 배 한 처을 이루는 것이다.

황포돛배는 규모도 커서 소금을 150석 이상 싣을 수 있는 큰 배도 있었다. 배가 크니 소금뿐만 아니라 귀한 물건들도 배로 옮겼다. 소금과 갈게젓를 싣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황포돛배는 쌀과 곡식을 가득 싣고 내려와 구포장 등에 풀어놓았다.

김창명 부산시 무형문화재 장인은 "황포돛배는 훌륭한 교통수단이었다. 낙동강을 주름잡았다"며 "내가 모은 황포돛배가 100척이 넘는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황포돛배는 신형 선박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대구 동산병원 선교박물관에 있는 미국산 피아노. 대구 동산병원 선교박물관에 있는 미국산 피아노.

사문진 나루터의 귀신통

대구 화원 사문진나루터에는 특이한 조형물이 있다. 피아노다. 피아노는 동산의료원에 근무하던 선교사와 의사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태평양을 항해한 피아노가 구포에서 낙동강 수로를 따라 들어온 것이 1900년이다. 당연히 황포돛배에 실려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피아노는 당시 좁은 길을 따라 운반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상여를 얹는 나무를 이용해 짐꾼들이 가마처럼 들고 현재의 동산의료원까지 왔다고 한다.

흔들릴 때마다 딩동 소리가 들리니 사람들은 귀신통이라고 불렀다. 조영수 대구광역시 청라언덕 문화해설사는 "당시 육로가 발달하지 않아 낙동강 수로는 지금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선교사 사택에 전시된 피아노는 당시 들여온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같은 회사에서 제작한 피아노였다. 동산의료원은 당시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주택을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주택이 너무 낡아 보수 중이어서 일반인들은 피아노를 관람할 수는 없다.


이용호 해설사가 개경포 인근 낙동강 물길을 설명하고 있다. 이용호 해설사가 개경포 인근 낙동강 물길을 설명하고 있다.

고령 개경포에서 일본을 만나다

화원에서 낙동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여전히 강폭이 넓은 개경포가 나온다. 경북 고령이다. 개경포는 고려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에서 합천 해인사로 올 때 뱃길을 통해 도착한 나루로 잘 알려져 있다. 개경포에는 팔만대장경 이운과 관련한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이용호 고령군 문화해설사는 특별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이곳 고령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천왕가 시조의 거주지였다는 것이다.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천왕가의 시조는 고천원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이주했는데 이곳이 한국의 고령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개경포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개호정 인근에는 특별한 비석 하나가 있다.

천반좌다. 천반좌는 서기 147년 고천원에 살던 천조대신의 손자가 일본으로 떠날 때 이곳 바위에서 배를 탔다고 해서 세운 비다.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서 이전할 때 주로 서해와 남해 항로를 따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 뱃길은 고려시대부터 조운선이 다니던 뱃길과 일치한다. 개경포는 일찌감치부터 국제 무역항의 역할을 감당했다. 일본 천왕가 전설도 있듯이, 개경포는 당시부터 근세까지 일본으로 향하던 중요 항구였다. 임진왜란 때도 한양의 보물을 탈취한 왜선이 이곳을 빠져나가려다 의병에 의해 격침된 사실도 있다.


의성 관수루에 올라 낙동강 전경을 취재하고 있는 취재진. 의성 관수루에 올라 낙동강 전경을 취재하고 있는 취재진.

대형 황포돛배의 종착지 낙동진

낙동진은 상주와 의성을 경계로 두고 있는 낙동강가에 있었다. 낙동진은 조선시대 중요한 국가의 재정 수단인 소금창고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전국 4대 수산물 집산지이기도 했다. 소금창고는 강 건너 의성 단밀면 낙정리에 있었다. 이곳 낙동강변에는 관수루라는 정자가 있어 지금도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조연남 상주박물관 학예사는 "낙동나루는 영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물류중심지 였다"며 "낙동강하구에서 올라온 소금이 이곳에 도착해 내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고 말했다.


안동간고등어 이동삼 명인의 아들 이정건 씨거 간고등어를 시연하고 있다. 안동간고등어 이동삼 명인의 아들 이정건 씨거 간고등어를 시연하고 있다.

삼강주막에 있는 조형물. 삼강주막에 있는 조형물.

삼강주막과 안동 간고등어

배가 다니는 나루마다 주막이 있었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삼강주막은 그래서 주막이 오래도록 번성했다. 마지막 주막이 사라지자 지자체는 이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주막 마을을 다시 세웠다. 이제는 뱃사공이 아니라 관광객이 주막을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낙동진에서부터 상류로 거슬로 올라가는 물길은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큰 배는 상주에 머물고, 작은 배에 짐을 나눠 실은 후 상류로 향한다. 그래서 도착하는 곳이 안동 개목나루다. 개목나루는 안동의 두물머리였다. 신향숙 안동시 문화해설사는 "개목나루가 영남의 최상류에 있는 나루여서 황포돛배의 종착지로 명성이 높았다"고 말했다.

내류수로의 소강종점이 셈이다. 일대에는 어전이 곳곳에 설치돼 융성했다. 영덕에서 보부상이 실어온 고등어는 이곳 안동에서 부산의 소금과 만났다.

이정건 간잽이 2세는 "영덕의 고등어와 부산의 소금이 만난 합작품이 안동간고등어였다"고 말했다. 그의 손대중은 이미 프로급이어서 소금 한 줌으로 고등어 한 마리를 간하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염전이 표시된 명지 일대 옛 지도. 염전이 표시된 명지 일대 옛 지도.

왜 부산의 소금이었을까

지금이야 전라도 염전에서 생산하는 천일염이 대세이지만, 사실 천일염이 융성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다. 그 전에는 소금을 자염이라고 불렀다. 낙동강 하구 명지 일대는 화력이 좋은 갈대가 많았다. 땔감이 풍부한 이곳 넓은 터에 자염터가 무수히 많이 존재했다.

자염은 바닷물을 가둬 농도를 짙게 한 뒤 끓여서 생산한 소금이다. 현재도 송정마을 일대 토지 가운데 지목이 염전이 곳이 있을 정도다.

류승훈 부산근대역사관 팀장은 "조선시대 소금은 자염이 대부분이었고, 낙동강 하구 일대는 거대한 염전터였다"고 말했다. 이곳의 소금이 낙동강 수로를 따라 내륙으로 번졌고, 우리 민족의 먹거리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활용된 것이다.


낙동강 하구 하신마을 사당. 이곳은 낙동강 하구 소금고 어물이 거래되던 곳이다. 낙동강 하구 하신마을 사당. 이곳은 낙동강 하구 소금고 어물이 거래되던 곳이다.

유람선이 다니는 낙동강 하구

낙동강 뱃길은 이제 끊겼다. 4대강 사업으로 곳곳에 보가 생겨 사실상 물길은 막힌 것이다. 낙동강은 뱃길의 가치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 관광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소중한 자원이다.

안병철 원광대 교수는 "낙동강하구는 뱃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지이고, 물류의 중심지였다"며 "뱃길과 물길 문화를 오늘날 재현하기 위해서는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낙동강 하구를 제대로 체험하고 탐방할 수 있는 기회 요소를 이곳 낙동강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낙동강 강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되살리기 위해서는 낙동강 뱃길을 가치를 제대로 부각해야 한다. 부산이 해양수도인 것은 낙동강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특별취재팀= 이재희 기자 jaeheee@ 김수빈 기자 suvely@ 조경건 기자 pressjkk@ 강승민 PD 박정훈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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