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사 완전히 뜯어고쳐 봐야 한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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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 문풍 살핀 증손 노치허 거사
최근 ‘자암서당문풍과 적흔’ 출간
퇴계는 남명 경계에 크게 모자라
인조반정 이후 심학이 망각됐다
소눌 벽설 청량한 기풍 전하고파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자암서당문풍과 적흔>(학자원)을 출간한 선객 노치허(74) 거사는 한말 유림의 종장인 소눌 노상직(1855~1931)의 증손이다. 소눌은 김해 출신으로 밀양에서 자암서당을 열었던 당대의 대표 유학자였다. 30여 년 제자를 길렀는데 기록된 제자들이 807명에 이르렀고, 그 제자들은 경남·북은 물론 전라 충청 경기 황해 함경도에까지 걸쳐 있었다. 소눌은 1910년 한일병탄 이후 형 대눌 노상익(1849~1941)과 함께 1년여 중국에 망명했고, 1919년 유림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파리 장서 사건’ 때 제자 13명과 함께 서명했다. 이번 책은 소눌 문풍(文風)의 정수를 새롭게 드러낸다.

노치허 거사는 조선 유학을 완전히 새롭게 고쳐 본다. 깨달음인 견처(見處)가 열렸냐, 하는 것이 판가름의 요체다. “견처가 열리지 않으면 궁리사변(窮理辭辨)에 머물고, 견처가 열리면 지경자득(持敬自得)에 거처한다.” 얽히고설킨 논설로 복잡하고 시시하게 따지는 것이 궁리사변이라면, 수양으로 묘지(妙智)를 얻어 공자 심학을 올곧게 이어 공부하는 것은 지경자득이다. ‘언어로 전달하는’ 소인유(小人儒)와, ‘마음으로 깨닫는’ 군자유(君子儒)가 그렇게 갈래지어진다고 한다.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노 거사는 조선 500년 유학 전통을 크게 뒤집어 말한다. “견처를 따질 때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을 훤칠하게 뛰어넘어 있었다고 보면 된다. 퇴계는 남명에 갖다 댈 수 없을 정도다. 퇴계는 전답 36만 평에 노비가 300명이 넘었으나, 남명은 먹을 것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이를 보아 훤히 알 수 있다.” 한갓된 앎은 교조처럼 세워지고 입으로 인륜과 의리를 읊조리면서, 힘들고 어려운 지경 공부를 차단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 남명이 지워졌던 것은 남명 학파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절멸하다시피 했고, 조선 후기 내내 망각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 중기 밀양에 이름 높은 유학자로 송계(松溪) 신계성(1499~1562)이 있었다. 그는 견처가 열려 십수 년간 장좌불와한 인물로, 남명이 “우리들(吾黨) 중에 최고”라고 치켜 꼽았던 ‘그 사람’이다. 하지만 북인 정권을 몰락시킨 인조반정 이후 조선 사상의 방향은 틀어지면서 이런 이들이 모두 잊혔다. 송계처럼 견처가 열린 조선의 인물을 꼽을 수 있다. 매월당 김시습, 대곡 성운, 남명 조식,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율곡 이이, 상촌 신흠 등이 그들이다. 중국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인데, 그런 맥이 그만 잊혔다는 것이다.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노치허 거사는 “소눌은 초·중년에는 궁리사변학풍에 젖었으나 만년에 지경자득학풍으로 나아갔다”고 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만년의 벽설(壁說)이다. 밀양 자암서당 벽에 써붙여 서벽(書壁)이라 하는데 소눌의 견처, 소눌 심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간추려 옮기면 ‘성인의 도를 배우는 요체는 무욕이다. 무욕하면 텅 비고, 곧다. 텅 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곧으면 사무사(思無邪)하고 마음이 허공처럼 넓다.’ 그렇게 지수(止水) 심학(心學) 자득(自得) 극기(克己) 역행(力行) 등을 말하고 있다.

노 거사는 “소눌은 세속 학맥에서는 퇴계와 성재 허전을 이었다. 그러나 심학에서는 한강 정구를 통해 남명 조식을 사숙했다”고 말한다. 한강을 다리 삼아 남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눌의 학풍이 남명과 율곡의 지경(持敬)에 기울었다는 것이다. 산천재가 있는 김해의 신산서원은 남명을 모신 서원이다. 이곳에 송계 신계성을 함께 모신 일을 주도한 이가 소눌이었다. 소눌의 학풍이 지경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소눌 노상직의 증손인 노치허 거사. 최학림 기자 theos@

노 거사는 “자암서당의 문풍을 살펴 뒷사람의 공부에 청량한 기풍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소눌 문풍의 정수가 심학에 있다고 보는 <자암서당문풍과 적흔>은 ‘자암서당기문’ ‘자암서당상량문’ ‘자암문인록’ ‘소눌연보’ ‘소눌선생묘갈명’ ‘벽설’ 등 19편의 글과, 노 거사의 ‘소눌의 주요저술고’ ‘자암문도의 독립운동’ ‘벽설고’ ‘소눌의 학풍’ 등 4편으로 구성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인 박병련 남명학연구원장은 “소눌 벽설의 무욕은 조선 심학의 맥으로서 심오한 경지를 드러낸다”며 “증손 노치허가 아버지 노재찬(전 부산대 교수) 선생의 뜻을 이었다. 소눌의 사상과 행적을 알리는 책에 이름을 보태는 영광을 사양하는 사람이 있겠는가”라며 서문을 썼다.

<자암서당문풍과 적흔>. 학자원 제공 <자암서당문풍과 적흔>. 학자원 제공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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