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씹어먹기 ‘오도독’] 차 한잔의 호의는 어떻게 스토킹이 됐나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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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베이비 레인디어’

실화 기반 여성 스토커 이야기
입체적인 심리 묘사가 인상적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술집에서 맥주를 따르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무명 코미디언 도니(리처드 개드 분)가 일하는 가게 안으로 한 여성이 들어온다. 꾀죄죄한 몰골에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걷는 여성의 모습은 어딘가 처량하다. 꿈을 좇아 고향을 떠나온 도니는 쓸쓸해 보이는 여성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다. 차 한잔 마실 돈이 없어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에게 차를 사주기로 한 것. 난생처음 누군가로부터 호의를 받은 듯 눈에 별빛을 머금은 그녀는, 도니에게 자신의 이력을 죽 늘여놓는다. 영국 정부의 사건을 맡는 변호사이자 정계 유력인사와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라는 그녀. 그때 도니의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 ‘잘나가는 변호사가 차 한 잔 사 먹을 돈이 없나?’

자칭 ‘거물급 변호사’ 마사(제시카 거닝 분)는 다음날부터 술집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 각종 업무와 회의에 파묻혀 산다는 마사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루 종일 술집에 앉아 도니의 일하는 모습만 쳐다본다. 그의 메일함(주소는 마사가 검색을 통해 알아냈다)에는 마사가 쓴 메일이 하루에도 수백 통씩 날아든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는 차 한잔의 호의가 스토킹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 7부작 블랙코미디 드라마다. 이미 스토킹으로 형사 처벌을 받은 바 있는 ‘경력직 스토커’ 마사와 그녀에게 호의를 베푼 죄(?)로 새로운 먹잇감이 된 도니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여성 스토커에게 스토킹 피해를 보는 남성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와 주연 배우이자 작가인 리처드 개드의 실제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를 더한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단순히 스토킹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도니가 마사를 불쌍하게 여긴 이유, 오랜 기간 이어진 그녀의 집착에도 그녀를 매몰차게 끊어내지 못한 도니의 심경을 깊게 파고들어 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스토킹 서사보다 도니와 마사의 심리 묘사가 드라마의 더 큰 매력 포인트다. 드라마 중반부터는 그동안 감춰졌던 도니의 비밀이 밝혀져 그의 마음에 조금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기혐오’다. 유명한 코미디언이 되겠다며 몇 년째 무대에 서는 도니는, 관객으로부터 재미없다는 소리를 듣고 매번 무대에서 쫓겨난다. 그런 그의 앞에 자신을 응원해 주고 자신의 숨소리에도 웃어주는 마사가 나타난다. 그의 결핍과 그가 겪어 온 고통을 다 보듬어 줄 것만 같은 마사의 등장에 마음의 문이 흔들린 것. 평생 무시당하고 살던 마사 역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남자에게 푹 빠지고 만다. 서로에게 필요한 점을 한눈에 알아본 셈이다. 드라마는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스토킹 범죄를 옹호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의 ‘폭력적인 애착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려냈다. 그 속에서 스토킹 범죄를 대하는 공적 시스템의 허점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자기혐오는 오늘날 우리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SNS상에서의 ‘쇼윈도’에 비친 타인의 모습을 주로 대하는 우리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태어날 때부터 악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주변 인물이 도니나 마사의 입장에 놓이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도니가 마사를 극복해 가는 과정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은 연민과 슬픔, 희망이 담겼다.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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