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대 같은 명소 옆에 미술관…한 해 200만 명 찾았다 [지방소멸시대, 일본의 해법]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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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멸시대, 일본의 해법’ (상)가나자와
도쿄에서 고속철로 2~3시간 거리 중소도시
에도 시대 가나자와성 옆 현대미술관 ‘조화’
문화 도시 상징 장소로 국내외 방문객 끌어

올해 9월 29일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전경. 통유리로 된 원형 건물(왼쪽)에 전시관 등이 있고, 잔디밭에선 설치 작품 등을 즐길 수 있는 공원 같은 공간이다. 이우영 기자 올해 9월 29일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전경. 통유리로 된 원형 건물(왼쪽)에 전시관 등이 있고, 잔디밭에선 설치 작품 등을 즐길 수 있는 공원 같은 공간이다. 이우영 기자

※일본은 지방소멸위기가 한국보다 먼저 닥친 국가다. 여러 지역이 로컬 특색을 살리며 도시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상징적인 문화 공간으로 방문객 체류를 늘려왔고, 자연과 전통을 활용한 지역 산업이 두각을 드러낸다. 부산 역시 지역 문화와 산업 도약이 필수적인 상태다. 일본 지방 도시에서 부산이 참고할 부분을 들어보려 한다.


사방으로 문이 뚫린 동그란 비행물체 같았다. 잔디밭이 둘러싼 원형 미술관은 누구나 쉽게 오가는 놀이터였다.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16세기 에도 시대에 세운 ‘가나자와성’과 일본 3대 정원 ‘겐로쿠엔’ 옆에 이질감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찻집 거리 등 전통을 간직한 가나자와 도심엔 높은 건물이 없다. 반면 고속철도 신칸센이 오가는 기차역엔 거대한 유리 돔이 웅장함을 뽐냈다. 도시는 전통을 지키며 새로운 현대 공간과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는 인구가 45만여 명인 중소도시다. 이시카와현은 지난해 가나자와 국내외 관광객을 1057만 명으로 집계했다. 부산~서울처럼 수도 도쿄에서 고속철도로 2~3시간이면 오갈 수 있지만, 그만한 매력이 있기에 가능한 수치다. 금박공예나 옻칠 등 다양한 전통을 지켜온 도시는 ‘21세기 미술관’이란 현대 공간이 더해져 색다른 로컬 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원형으로 된 21세기 미술관 둘레를 걷다 보면 가나자와 시청 건물(왼쪽)로도 길이 이어진다. 이우영 기자 원형으로 된 21세기 미술관 둘레를 걷다 보면 가나자와 시청 건물(왼쪽)로도 길이 이어진다. 이우영 기자

■ 도시 상징이 된 ‘21세기 미술관’

지난 9월 29일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앞마당에는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잔디밭 곳곳에 설치된 나팔 모양 작품 앞에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귀를 기울였다. 방문객들은 놀이기구 같은 조형물과 3색 유리로 된 설치 작품 안팎을 분주히 오가기도 했다.

공원 같은 미술관은 시청과 관광지를 포함해 주변 어디서든 편하게 걸어오기 수월했다. 연면적 2만 7920㎡에 지름이 113m인 원형 미술관은 사방에 출입구를 뒀고, 외벽을 통유리로 만들어 접근성과 개방성을 높였다.

미술관은 일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 니시지와 류에가 세운 ‘사나’(SANAA)’가 설계했다. 특히 세지마 가즈요는 지난해 10월 부산시청을 찾아 ‘이기대 예술공원’ 조성 방향을 논의한 인물이다. 당시 강연을 한 그는 “사진으로 본 이기대는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라며 “다양한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고, 많은 가능성을 가진 장소”라 평가했다. 계속 ‘공원 같은 건축’을 하고 싶다던 그는 부산에 너무 큰 건물을 짓는 걸 경계하기도 했다.

21세기 미술관 관람객들이 전시 공간 내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우영 기자 21세기 미술관 관람객들이 전시 공간 내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우영 기자

미술관은 쇠퇴하는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2004년 문을 열었다. 사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폐교 부지에 미술관을 열기 전부터 곳곳에 배치될 설치 작품을 미리 염두에 뒀다. 21세기 미술관 요시모토 토모히로 홍보전문원은 “2000년대 들어 상설적으로 즐길 작품을 두는 게 전 세계 미술관 트렌드였다”며 “잔디밭에 올라퍼 엘리아슨 작가 작품을 제외하면 건물 내외부에 어떤 설치 작품을 둘지 미리 철저하게 계획했다”고 밝혔다. 그는 “관람객들이 작가 이름은 몰라도 재밌게 느낄 작품을 배치한 게 성공 비결 중 하나”라고 했다.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도시에 자리한 이 현대미술관은 지난해 관람객이 약 200만 명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에도 100만 명 가까운 관람객이 찾아 세계 미술관 중 10번째로 많았다는 통계도 있다.

요시모토 홍보전문원은 “(일본 3대 정원인) 겐로쿠엔 방문객이 연간 25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미술관도 함께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며 “코로나19 전에는 연간 관람객이 250만 명까지 늘어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관람객은 20% 정도인데 중국, 대만, 한국과 서양 국가들 순으로 많다”고 설명했다.

21세기 미술관 중심부에 설치된 레안드로 에를리치 작품 ‘수영장’. 이우영 기자 21세기 미술관 중심부에 설치된 레안드로 에를리치 작품 ‘수영장’. 이우영 기자

■ 일본과 세계가 어우러진 작품들

미술관에 들어서니 레안드로 에를리치 작품 ‘수영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장 위쪽에는 찰랑거리는 물 아래쪽을 바라보는 인파로 붐볐다. 물이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지하 공간엔 관람객이 오갈 수 있는 구조라 위아래로 서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미술관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 ‘수영장’은 아래쪽 공간 입장을 하루 800명으로 제한하는데, 주말인 방문 당일 오전에 이미 예약이 마감된 상태였다.

미술관 보유 작품은 2004년 200점에서 약 4200점까지 늘었다. 이번 전시에는 앤디 워홀, 데미언 허스트,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미국·유럽 거장뿐 아니라 무라카미 다카시 등 일본 작가들 소장품도 선보였다.

‘선(Lines)’ 특별전 일환으로 덴마크 ‘수퍼플렉스(SUPERFLEX)’ 작가 작품들이 유료 전시장 밖 공공 공간에 전시되고 있다. 이우영 기자 ‘선(Lines)’ 특별전 일환으로 덴마크 ‘수퍼플렉스(SUPERFLEX)’ 작가 작품들이 유료 전시장 밖 공공 공간에 전시되고 있다. 이우영 기자

동시에 ‘선(Lines)’ 특별전도 열렸다. 관람객들은 일본 젊은 작가뿐 아니라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가져온 작품을 즐겼다. 특별전 일환으로 유료 전시장 밖 공공 공간에선 덴마크 작가 ‘수퍼플렉스(SUPERFLEX)’ 등 신진 작가 작품도 무료로 전시됐다.

요시모토 홍보전문원은 “21세기 미술관은 가나자와 일대 지역 작가 작품도 적극적으로 전시하거나 구입한다”며 “신진 작가들에게 자기 작품을 알릴 기회를 주기 위해 그들을 위한 전시 공간도 따로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공공 미술관이더라도 사회를 비판하거나 문제의식을 지닌 게 예술인 만큼 권력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은 전시에도 열려있다”고 덧붙였다.

2004년 21세기 미술관 중심부에 설치된 패트릭 블랑 ‘초록 다리(Green Bridge)’ 작품. 이우영 기자 2004년 21세기 미술관 중심부에 설치된 패트릭 블랑 ‘초록 다리(Green Bridge)’ 작품. 이우영 기자

미술관 중심부에는 패트릭 블랑이 2004년 만든 ‘초록 다리(Green Bridge)’도 눈에 띄었다. 작가가 2018년 부산현대미술관 외벽에 만든 ‘수직정원’과 유사한 작품이다.

요시모토 홍보전문원은 “한쪽은 가나자와 산에서 가져온 다양한 잡초, 다른 면은 도시 기후에 적합한 식물들이 있다”며 “흙이 아니라 펠트 천을 활용해 묘목을 심었고, 비료가 들어간 물이 흘러내리도록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식물이 100종류 정도인데 천적인 해충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배치했고, 정원사가 정기적으로 식물을 솎아내는 작업도 한다”며 “기후와 날씨 영향도 받겠지만 바로 옆 겐로쿠엔 정원을 관리하던 장인들 기술과 노하우도 여기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21세기 미술관에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예술 도서관. 이우영 기자 21세기 미술관에서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예술 도서관. 이우영 기자

■ 지역을 위한, 지역에 의한 공간

미술관은 작품만 담은 공간이 아니었다. 외부 잔디밭이 보이는 창가에 예술 도서관과 탁아실 등 다양한 공간을 배치했다. 어디서든 지역 주민 등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자연스레 미술관 유료 전시를 관람하게 유도하려는 목적도 있다. 카페, 식당, 수유실뿐 아니라 시민 갤러리, 강당, 사무실 등이 미술관 창가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가나자와시에서 운영하는 예술 도서관은 무료다. 21세기 미술관에서 전시를 연 문경원·전준호 작가 책을 포함해 다양한 프로젝트와 작품 등을 담은 서적이 있었다. 요시모토 홍보전문원은 “여름에 겐로쿠엔을 들렀다가 도서관에 오면 의자에 앉아 시원하게 에어컨을 쐬며 쉴 수도 있다”고 했다.

통유리로 바깥이 보이는 탁아실도 있었다. 아이들이 미술관을 친숙하게 느끼게 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지역에 사는 부모들이 인근 시청 등에서 편히 일도 볼 수 있게 배려하는 공간이다. 요시모토 홍보전문원은 “유료이긴 해도 30분 단위로 누구나 아이를 맡길 수 있다” 밝혔다.

21세기 미술관에서 버섯차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 종이를 버섯차에 담가 말린 뒤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관람객 등에게 나눠줄 예정이다. 이우영 기자 21세기 미술관에서 버섯차를 활용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 종이를 버섯차에 담가 말린 뒤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관람객 등에게 나눠줄 예정이다. 이우영 기자

미술관은 지역 아이들에게 무료 관람 표를 나눠주기도 한다. 지역에 환원하는 동시에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셈이다. 요시모토 홍보전문원은 “평소 예술에 관심이 없던 부모들도 아이들 무료 관람 표를 쓰기 위해 미술관을 찾곤 한다”며 “그렇게 관람객이 늘기도 하고 미술관에 친숙해지는 효과도 있다”고 밝혔다.

2004년 개관 당시 작품 선정을 맡은 큐레이터가 관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지역에서 미술관 개관을 함께한 하세가와 유코가 관장을 맡아 연속성 있게 미술관을 이끌어가는 셈이다.

■공존하는 전통과 현대

가나자와는 전통문화와 오랜 역사를 지키면서 21세기 미술관 같은 현대 공간과 균형을 지키려 한다. 특히 역사 유산이 지닌 옛 모습과 문화적 경관 등을 중시해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우선 가나자와는 1968년 전통환경보존 조례로 히가시 찻집 거리 일대 등 4개 구역이 전통적 건조물 보존 지구로 지정됐다. 여기에 가나자와시는 1994년 코마치나미 보존 조례를 독자적으로 시행했다. 작고 오래된 거리가 지닌 모습을 지키기 위해 9개 구역을 대상으로 삼았다.

가나자와시 역사도시추진과 공무원 카와무라 유타 씨는 “전통적 건조물 보존 지구에선 1950년 이전 지은 건축물을 대상으로 외관을 유지하거나 수리하는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며 “코마치나미 조례는 무사와 상인 등이 살았던 동네 등 가나자와시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9월 30일 옛 건축물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가나자와 히가시 찻집 거리. 이우영 기자 올해 9월 30일 옛 건축물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가나자와 히가시 찻집 거리. 이우영 기자

특히 가나자와는 역사적인 삶의 터전과 풍광 등이 지닌 문화적 경관을 보전하려고 노력한다. 가나자와시 역사도시추진과 마쓰무라 마사미치 주사는 “건축물이 들어설 때 높이가 들쭉날쭉하거나 불쑥 튀어나오지 않게끔 조화를 이뤄야 한다”며 “문화적 경관 보전 지역에선 장기적으로 나무보다 높은 건물은 점차 없애려 한다”고 했다.

가나자와는 2015년 경관을 재정비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했다. 기존에 31m로 고도를 제한한 지역을 공간에 따라 25m나 12m 이하로 기준을 낮췄다. 가나자와성과 가까운 곳에선 12m를 넘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 마쓰무라 주사는 “개발을 한창 진행한 시절에는 강력한 규제가 없었는데 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보이는 경관이 중요하단 인식이 생겼다”며 “미술관이나 도서관 등 새로운 건물을 만들 때 건축사, 변호사 등이 모이는 위원회에서 면밀히 조정하고 협의해 공사를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올해 9월 30일 가나자와역 거대 목재 문과 유리 돔 밤 전경. 이우영 기자 올해 9월 30일 가나자와역 거대 목재 문과 유리 돔 밤 전경. 이우영 기자

가나자와가 모든 지역에서 옛 모습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도시 관문에도 전통과 현대가 지닌 모습이 공존한다. 여러 도시에서 고속철도가 오가는 가나자와역은 2005년 리모델링으로 변신을 꾀했다. 1898년 세워진 기차역에선 일본 신사에 토리 일주문이 떠오르는 거대한 목재 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산 모습을 한 유리 돔인 ‘모테나시돔’은 방문객을 환영하는 의미를 담은 주요 볼거리가 됐다.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도시는 미술관과 기차역 등 새로운 현대 공간과 어우러지고 있다. 가나자와(일본)/글·사진=이우영 기자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2024년 ‘KPF 디플로마-로컬저널리즘’ 교육 과정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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