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도시 부산, ‘빅(Big)’과 ‘품격’ 사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시 ‘빅 디자인 프로젝트’ 본격 추진
화려한 수사 뒤 공허함… 보는 관점 논란
일상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디자인 필요
“예술성 있는 공공시설물 설치했다고
도시 품격 갑자기 높아지는 건 아냐”
시민 참여하는 공공서비스디자인 중요
최근 국내 주요 도시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는 부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배경에는 좋은 도시디자인이 곧 그 도시의 경쟁력이자 얼굴이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디자인 자체가 도시 간 경쟁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시는 최근 ‘부산을 바꾸는 빅 디자인(Big Design)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6년까지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총 610억 원을 투입한다. 행복한 시민, 매력적인 도시를 목표로 도시 비우기 사업,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조성, 글로벌 야간 관광 명소화,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시민 관점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는 도시 조성, 공공디자인 시민 참여 확대 등 총 8개 분야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빅’, ‘품격’을 바라보는 관점의 논란과 더불어 화려한 수사(修辭) 뒤에 따르는 공허함이 있다.
■과연 ‘빅’이라 할 만한가?
부산시는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등 8개 분야 중점 과제를 통해 부산을 디자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빅 디자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아쉽게도 깊게 와닿지 않는다. 중점 과제를 살펴보면 종전 부산시가 추진했던 디자인 개념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 배려 디자인 등은 이전에도 강조돼 왔던 개념이다. 이는 도시디자인에 있어 기본이다. 그런데도 빅 디자인이라는 게 다소 낯 뜨겁다. 빅 디자인 허브센터 등 부산시는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만들고 디자인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산 시민에게 더 필요한 것은 풀과 나무, 길, 공원, 벤치가 있는 도시 환경이다.
빅 디자인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확행적 접근’이 오히려 중요하다. 도시 비우기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확행적 디자인에 오히려 더 가깝다. 도시디자인이나 공공디자인의 역할은 간결하고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 자연과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 방해 요소를 보행 공간에서 분리하는 도시 비우기는 부산을 ‘걷고 싶은 도시’, ‘걷게 하는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길이 좁아서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광장이 있고 걷고 즐길 수 있는 자연과 문화가 있다면, 그 도시는 살고 싶은 도시, 사랑받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도시디자인이 시행된다면, 애써 ‘빅’을 강조하지 않아도 시민들에게 디자인 프로젝트가 ‘더 크게’ 다가올지 모른다.
■도시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부산시는 291억 원을 들여 국제공모 우수디자인으로 선정된 가로등, 벤치 등 공공시설물을 부산의 관문 지역과 관광지 등에 설치해 품격 있는 거리 디자인 조성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품격 있는 거리라는 표현은 주관적이고 모호하며,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품격 있는 거리의 기준은 무엇이고, 또 누가 판단할 것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를 의미한다. 이는 매우 상대적이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판가름할 기준은 개개인의 시선에 있다.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삶을 결정하는 척도는 화려함이 아니다. 거리의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성, 그리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 흔히 내로라하는 세계적 문화도시인 빈, 런던, 뉴욕, 파리의 공통점은 ‘걷기 좋은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걷기 좋은 도시, 서울’, ‘쉼이 있는 도시공간’을 모토로 산책로와 공원, 벤치를 확대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 도시나 사회가 건강하려면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야 한다.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카페가 아니라, 공원과 벤치와 같은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많을수록 살기 좋은 도시다. 휴게 공간이 많은 도시가 곧 걷기 좋은 도시이자 살기 좋은 도시인 것이다. 흔히 도시 전문가들이 벤치의 디자인이나 그 속에 깃든 배려를 통해 그 도시가 지향하는 정신이나 철학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제공모 우수디자인 작품을 거리에 설치했다고 해서 그 거리가 품격 있는 거리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벤치는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여기서부터 스토리가 담기고, 사람 중심의 도시디자인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도시는 살기 좋은 도시, 품격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품격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 가듯이, 품격 있는 도시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술성 높은 공공시설물 하나 더했다고 품격이 딸려오는 건 아니다. 도시의 품격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을 떠나 논할 수 없다. 외국 디자이너의 예술성 높은 공공구조물 하나에 부산이란 도시의 품격이 좌우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용자 중심의 도시디자인 돼야
디자인은 단순히 간판을 정비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산에 필요한 디자인은 공공분야 혁신의 한 방법으로서, 부산 시민의 생각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스위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서비스디자인이다. 8개 중점 과제 중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공디자인은 경제적 가치보다 시민의 안녕과 행복 같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공간의 질적 수준을 높여주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수요자와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 디자인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수렴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도시디자인에 있어서 건강한 시민의식에 기초한 참여는 필수적이다. 부산시의 공공서비스디자인 시민참여 프로그램 운영은 이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시민들의 참여로 도시가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은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부여하고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다. 시민들이 필요에 의해 디자인 개선안을 만들고, 그 의견을 따라 시행된다면 실용성과 활용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도시디자인은 단순히 2차원적 공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3차원, 4차원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기본계획과 함께 가야 하며, 문화, 복지, 안전,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디자인 도시 부산이 성공할 수 있다. 도시디자인은 우리의 삶과 문화가 담긴 도시의 영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단순히 멋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공간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도시 전문가들은 흔히 “사람이 느끼는 편안함의 정도가 바로 도시디자인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부산시가 만들어가야 할 품격 있는 도시는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부산시가 추구해야 할 디자인 도시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철학이 있는 도시디자인, 사람을 향하는 도시디자인을 통해 도시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살아 있는 도시, 살맛 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