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시선으로] 내 것이 아닌 5분
2014년, 미국 최대의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캠페인(HRC)의 행사에서 배우 엘리엇 페이지가 커밍아웃 스피치를 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만약 사람들이 어떤 낯선 사람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5분간만 참고 그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거부의 감정을 견디고 5분을 있은 후에 남을 함부로 차별하면 안된다는 교양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 5분 안에 느끼는 인상과 감정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나아가 그것이 자신의 진실한 의견이자 선택이라고 믿는다.
5분 너머의 교양보다 5분 안의 감정이 더 진실된 것처럼 여겨지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세상에 낯선 남이 있고 그 남에게도 여러 사정이 있다는 교양은 보통 수업 시간에 남을 통해서 듣는다. 남에게서 들은 교양은 주로 누군가를 놀리고 싶은 내 욕망에도 불구하고 작동해야만 할 원칙으로 와닿는다. 그래야만 하는 원칙이 왠지 그러고 싶은 감정보다 힘이 센 경우는 별로 없다. 게다가 남 놀리지 말라는 원칙보단 남 놀리고 싶은 마음이 왠지 훨씬 내 것 같다. 한 사람에게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것인 것보다 힘이 센 경우도 보기 드물다.
하지만 그렇게 처음부터 내 것 같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5분 동안의 감정이 정말로 나에게서 온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주위에서 학습한다. 밥 먹는 것에서 말하는 것까지, 누군가가 그걸 수행하는 걸 흉내내며 아이들은 살면서 필요한 무언가를 배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과거 어렸을 적 그렇게 느끼는 것이 눈치껏 맞겠다고 생각한 결과의 산물일 수 있다. 아이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감정과 관계를 학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내 것 같은 감정은, 실은 그것이 내 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까먹었기에 처음부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수도 있다.
처음 5분의 편견을 이겨내는 방법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혹시 다른 데서 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들 중 대부분이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어느 시점에 새로 만들어져 재구성되고 끝내 허물어지는 저마다의 수명을 갖는다. 거기에 개인이 느끼는 감정도 포함된다. 친숙한 내 감정이 내가 아닌 남에게서 온 것일 수 있음을 아는 것은, 내가 좀더 바라는 나의 삶과 자아를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하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남의 것으로 탄로나는 일만큼 살면서 불쾌한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2024-04-10 [19:01]
-
[다른 시선으로] 눈치는 공평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사람은 눈치를 학습한다. 무엇이 말로 드러나기 이전에 입을 닫고 주변의 공기와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는 것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학습이고 스킬이다. 그리고 그 학습과 스킬이 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눈치를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의 가치 기준을 내면화하는 일이고,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바를 내 안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그렇게 눈치를 통해 한번 수용된 남의 가치관은, 말할 필요도 없는 침묵의 장 가운데 내 것이 된다. 마침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 부드럽게 머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 사람이 눈치를 보던 입장에서 남에게 눈치를 주는 입장으로 돌변하는 것은 한 집단에 사람이 적응하는 과정의 전부다. 그 적응이란 말로 논쟁하는 범위를 넘어 온갖 비언어적 약속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 포함된다. 그렇기에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집단의 일을 말로써 문제제기하는 것은, 말 이전에 구성된 비언어적 평형을 깨뜨리는 일이 되고, 그만큼 부적응의 의미를 감수하는 일이 된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일이란 말로 드러난 것보다 말로 드러나지 않음의 비중이 더 크다. 사람이 어느 집단에서 눈치보는 데 성공했을 때 못내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그 말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가 비로소 내 것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사람이 한 집단에 새로 적응해 자신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한 집단과 한 사회가 그러한 변화를 겪는 일 또한 의외로 잦다는 것이다.
한때 내가 안도하며 즐거이 적응해온 세상이 문득 변했을 때, 그 사람은 별안간 내 것이었던 침묵의 장을 뺏긴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무얼 뺏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 사람은 이전에 자신이 적응한 세상이 옳다고, 지금 이 변화의 방향이 틀렸다고 강변하기 쉽다. 그 순간 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세상의 일부인양 포근히 안기던 그 때의 느낌이 그립다. 내가 보아온 눈치가 처음부터 내게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젠더 감수성이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후에, 거기에 미달되는 이들을 너무 쉽게 ‘캔슬’하는 것은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잦다. 그것은 애초에 젠더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캔슬은 젠더가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눈치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수천 번 작동해온 익숙한 과정이다. 그것이 새삼 그토록 낯설다면, 한때 내 것처럼 친숙하였던 사회의 침묵이 내 편이 아닐 수 있음을 그제서야 직면한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의 것임을 한번쯤 경험해보는 일은 삶에서 중요하다. 내가 보아온 눈치와 거기에 깔린 침묵이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일은.
2024-03-13 [18:10]
-
[다른 시선으로] 까탈
차별을 받거나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예민해진다. 세상에 많은 차별과 부당함이 있지만, 그 중 적잖은 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집중된다. 때문에 그런 일을 겪은 것과 그 결과 예민해진 몸과 마음은, 마치 그 사람이 애초에 사회적 약자이고 소수자인 탓으로 여겨진다. 좀더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사람이었다면, 대체로 그런 나쁜 일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민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사람은 대체로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어떤 것이 힘센 대세에 가까운지를 잘 눈치챈다. 따라서 내가 겪은 피해와 그것을 알아채게 한 예민함은 나에게 취약하고 덜 유리한 본성으로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그 피해와 예민함을 숨기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던 듯이 스스로를 속인다. 그런 것들은 왠지 나에게 유리한 것 같지 않으니 그저 없는 것처럼 생각해두고 싶다.
피해와 까탈로 자신을 요약당하고 싶은 사람은 적기 때문에, 이런 반응들은 그 나름대로 스스로를 지키려는 움직임이다. 문제는 이런 습관을 자기 잇속대로 써먹는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이다. 차별과 부당함을 애초에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 차별과 부당함을 생산한 이들에게 가장 이롭다. 그들의 눈에는 애초에 그런 것은 없고, 그걸 꺼내어 말하는 쪽이 어딘가 이상한 것이다. 피해를 입을 만했으니 입었겠고, 평소에 예민한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라는 식이다.
세상의 힘센 질서와 차별을 낳는 사회구조는 어디에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몸에 스며들고 학습되는 과정을 통해 작동되고 재생산된다. 그렇게 구조가 몸으로 스며드는 여러 방식들 가운데 앞서의 일이 있다. 내가 입은 피해와 그로부터 얻은 까탈이 싫어 아무쪼록 그것을 숨기고 싶었던 연약한 형태의 존엄은, 남들에 의해 그것 보라며, 그건 원래 없던 일이었고, 그건 너의 까탈이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빼앗기고 이용당한다.
까탈을 부리는 건 대체로 비참한 일이고, 까탈을 부리는 게 즐거워서 부리는 사람은 아주 적다. 까탈이 비참한 이유는 그 까탈의 입장이 이 세상에서 대세일 수가 없음을 그 당사자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미워 까탈을 부릴 이유가 없는 힘세고 강한 편에 빙의해 살 필요는 없다. 까탈을 내리누른다고 내가 힘세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참한 까탈을 부리는 입장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 그 비참을 이겨내는 첫번째 관문이다. 누구나 힘세고 강하고 덜 예민하고 덜 까탈스럽기를 원한다.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잘 어루만지는 일은 중요하고, 그것은 그 입장을 나라도 편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스스로 편들지 않는 일은 추하다.
2024-02-14 [18:06]
-
[다른 시선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공부
대학 인문학부에서 텍스트 읽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읽기와 비평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무리 훌륭한 글에서도 그 속에서 비판할 거리를 찾는 능력, 다른 하나는 아무리 못 쓴 글이라도 그 속에서 단 하나의 일리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전자에 해당할 대표적인 문제의식 중 하나가 성(性), 즉 젠더·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이다. 수천년간 존경을 받아온 인류 문명의 경전이나 여러 고전들도, 유독 성에 있어서만큼은 현재를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편견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인류에게 성 관련 지식과 실천은 최근까지 그 윤리의 기준이 빠르게 변해온 주제다. 현재 성폭력, 가정폭력, 성희롱,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로 분류되는 말과 행동들은,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별 문제가 안되거나, 남들과 히히덕거리는 용도로 주로 언급되던 것이었다. 그런 인식이 변해왔다는 것은 곧 그 사이 우리 사회가 그만한 변화를 겪어왔음을 의미한다. 옛 고전 속에서 소위 ‘빻음’(‘젠더 감수성 없음’을 의미함)을 발견하는 일은, 오늘날 비로소 가능하게 된 변화를 재확인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지성의 활동이다.
이와 더불어 필요한 것은, 역사 속 숱한 ‘빻은’ 글들 가운데의 일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사실 현재의 준엄한 기준으로 완벽한 과거의 글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거에 쓰인 많은 글들은 그 시대에 고유한 편견을 편견인지도 모르고 써제낀 경우가 허다하다. 그 허다한 ‘빻은’ 글들이 그럼 오늘날 모조리 별 소용이 없어진 글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세상에는 잘 쓴 글보다 못 쓴 글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못 쓴 글들을 전부 폐기처분한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압도적인 양의 교재를 잃는 것과 같다. 아무리 못 쓰고 문제적인 글이라도 그 글을 쓰게 된 동기와 그 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하나의 일리는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일리를 내 것으로 만든 연후에 그걸 그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펼칠 줄 알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중요한 공부법이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상대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극복은 곧, 그 상대가 지닌 문제의식들 중 일리있는 것을 상대보다 더 나은 나만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대하며 나를 다잡는다는 측면에서 글과 사람은 그처럼 유사한 면이 있고, 그렇기에 그것을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 인문학이 최근 수십년간 진행해온 일이 바로, 인간의 성을 이전보다 말이 되는 방식으로 말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역사 속 ‘빻은’ 것들을 짚어내고, 동시에 그 중 일리있는 것들을 읽어내 오늘날 형성된 젠더·섹슈얼리티의 입장과 관점에서 그것을 다시 쓰는 일을 통해.
2024-01-17 [18:08]
-
[다른 시선으로] 쉽게 쓴 글
논문을 쓸 때 과거 학자들이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많이 참고했다. 학계에는 동료 평가에 의해 자기 연구의 학술성과 객관성을 가다듬는 장치가 존재하지만, 그를 통해 한번 공신력과 권위를 얻은 학자들은 자신들이 취득한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자신이 지닌 사회적 편견을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확실히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보통 크게 틀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청탁받은 지면에 글을 실을 때는 그것을 넘어 자기가 잘 모르는 적당한 주제에 대한 적당한 인상비평을 슬슬 섞게 되고, 그러다보면 십중팔구 틀린 소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틀린 소리는 학자의 권위를 업고 그것이 마치 진실이고 맞는 말인양 사회에 유포되기 쉽다.
과거 그분들이 왜 학술논문이 아닌 일간지의 칼럼에서 소위 ‘뇌절’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언론의 기고가 그들에게 좀더 쉽게 쓴 글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내 학술적 권위를 뽐내기 위해 쉽게 쓴 글은 그만큼 틀리기도 쉽다. 글이 바르게 전달되어야 할 내용보다 그 글을 쓰는 쾌락과 효능감에 도취되었을 때, 그 글이 잘못 설명하고 재현한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입을 확률도 그만큼 올라간다. 비단 학자가 아니라더도 펜촉과 키보드를 통해 글이 술술 쉽게 나오는 상황을 저마다 주의해야 할 이유다. 글이 쉽게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신호와 같다. 세상과 내면을 말하는 일이 별도의 성찰 없이 그저 즐거움으로만 도배되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쉬운 말이 넘쳐나는 시대다. 핸드폰만 쥐고 있으면 언제 어느 때 무슨 말이건 할 수 있는 시대에, 말을 할 때 어떤 윤리를 갖추어야 옳은지 생각한다. 말이 부족할 때에는 말의 검열이 문제가 되지만, 말이 넘쳐 흐를 때에는 반대로 그 넘쳐흐른 말이 열어젖힌 비극이 문제가 된다. 혐오 발언을 문제삼고 사회적 소수자를 의식해 가급적 말을 고를 것을 주문하고, 연예인 기사 아래 댓글창을 일부러 닫을 것을 촉구하는 여론이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쉽게 떠드는 말로 상처입고 있다는 증거다. 말을 할 권력이 민주화된 후에는 그 말에 따른 폭력 또한 ‘민주화’되었고, 말과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어떤 말이 쉽게 나올 때 그것이 왜 쉬운지, 그 쉬움이 과연 적절하고 정의로운 것인지 한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쉬운 말의 칼날이 어느날 나에게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성 규범의 지식·제도와 반사회성 형성, 1948-1972〉라는 제목의 한국사 전공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위원, 가족구성권연구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2-20 [18:07]
-
[다른 시선으로] '빠순이'가 아니라 '팬덤'
요즘은 바빠서 특별히 음악을 찾아 듣거나 가수를 흠모할 여유가 없다. 그런 나에게도 한때 가수 모 씨의 팬이 되어 책받침에 사진 넣고 커다란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여놓으며 절절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인터넷이 없던 때라 팬카페 같은 것도 없어 그저 나만의 세계 속에서 음악을 즐길 뿐이었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서로 모르는 타자와 취향을 나누며 적극적인 취향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은 소위 ‘오빠부대’ 혹은 ‘빠순이’라 불렸던 여성 팬층의 존재를 한국 사회에 강렬하게 알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당시 사용되었던 ‘빠순이’는 남자 연예인에게 환호하는 소녀팬들을 지칭하는 비하적인 용어이다. 학교 공부고 뭐고 다 팽개친 채 연예인만 추종하는 ‘광적’ 소녀집단이라는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10대 소녀들의 병폐 현상으로 이들을 다루었고, 거대한 소비자 집단이 된 소녀팬들이 대중문화를 좌지우지한 탓에 대중문화가 저질이 되었다는 한탄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비난에 찬 시선은 이제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빠순이’를 대신하여 ‘팬덤’이라는 말이 사용된 지 오래다. 스타 팬덤은 단순한 대중문화의 소비자를 넘어서 사회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만들어가는 팬덤의 영향력은 인터넷 소통 공간을 타고 국가를 넘어서 글로벌한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소비를 넘어서 스타를 키워내고, 대중문화는 물론 정치·사회적 문제에까지 폭넓게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웹진 〈결〉에는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실렸다. 그 글에서 문화연구자 이지행은 BTS 팬들의 기억정치를 다루었다. 2018년 BTS의 한 멤버가 원폭과 해방의 이미지가 동시에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알려지면서 BTS는 원폭을 지지하고 심지어 나치를 추종한다는 일본 넷 우익의 비난에 몰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거진 역사적 기억의 전쟁에서 전 세계 아미들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등 그동안 잘 몰랐던 아픈 과거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 소통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백서(White Paper Project)에 담았다. 이지행은 이 과정을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여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낸 빛나는 순간으로서 포착한다. 한때 ‘빠순이’라 비난받던 취향 공동체로서의 팬덤은 어느덧 대중문화는 물론 폭력적 과거에 대한 성찰을 나누며 초국적 역사 기억을 만들어가는 정치 주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아마 집집마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열성 팬들이 있을 거다. 이들의 미래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2023-11-22 [17:59]
-
[다른 시선으로] 히로시마를 기억하며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 폭탄을 개발한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등 수많은 화제작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는 흥미진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이어진 미소 냉전, 그리고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달군 매카시 열풍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긴 대사들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팽팽한 긴장감으로 관객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하는’ 역설 속에서 원자 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이로 인해 핵물리학자로서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전후 원폭 피해에 대한 죄의식으로 평화주의자가 되어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결국 공산주의자로 몰려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과학 연구가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정치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지 흥미롭게 보여 준다. 원폭에 대한 비판 의식이 깔려 있기는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보는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은 어쩐지 찜찜하다. ‘물리학자들을 위한 헌정 영화’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들의 고투를 열정적으로 그려 내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다 결국 버려진 오펜하이머에 대한 동정적 시선 뒤에서 우리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두 도시에서는 그해 연말까지 각각 14만 명과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폭은 피폭자 본인은 물론 후대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서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일본의 대표적 작가이자 양심적 지식인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고통과 비참한 삶을 그의 책 〈히로시마 노트〉에 기록했다. 그는 피폭 후 십수 년이 지난 1960년대 전반에 히로시마를 방문했지만, 원폭의 상처는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피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 내려 애쓴 그들의 용기와 희생, 헌신을 전하며 겐자부로는 어느새 히로시마의 비극이 망각된 채 핵무기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인류가 이런 비극을 잊고 침묵할 자격이 있는지 물으며 그는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온몸으로 원폭 후유증을 견뎌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뿐이라고 준엄하게 말한다. 히로시마는 핵무기의 위력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라 핵무기가 초래한 인간적 비참함의 극단적 증거일 따름이다. 오펜하이머를 보며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의 고투와 두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원폭의 비참한 현실로서 히로시마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3-10-25 [18:16]
-
[다른 시선으로] 철거할 흉상조차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
여성사를 전공한 나는 자료를 통해 많은 여성을 만난다. 기존 역사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이들이지만, 역경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현명함, 자신을 위한 삶에 안주하지 않는 헌신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곤 한다.
어느 날 일제강점기 가족 내 폭력을 다룬 신문 자료를 뒤지던 중 기막힌 사연 하나를 발견했다. 1906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이 여성은 가난한 집 딸로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됐다. 노름으로 빚을 잔뜩 진 아버지는 겨우 여섯 살 딸을 팔아 빚을 갚으려 했던 파렴치한 인간이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딸은 홀로 경성으로 가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 여성은 자유연애 끝에 결혼한 남편과 중국 광둥대학에서 수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여성은 어머니 사후 홀로 지내는 아버지를 외면하지 못해 자신의 집으로 모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동안 변한 게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위가 검거되자 딸에게 이혼을 강요하며 ‘돈 많은 사람 첩으로 들어가든지 매춘부 생활을 해서라도 자신을 잘 공양’하라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칼부림까지 서슴지 않던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딸은 결국 갓난아기를 둘러업고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기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잘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사의 주인공이 박호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박호진이 누구인가. 1920년대 중국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근우회 집행위원장을 지내고 신간회에서 활동하며 지하조직인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도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 근대 초 신여성이라면 그저 집안이 좋아 유학까지 다녀와 승승장구한 엘리트라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이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삶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과 여성 해방을 위해 싸운 박호진의 생애는 그야말로 소외된 자의 자기해방 몸부림이 어떻게 개인을 넘어 사회구조적 해방을 위한 헌신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 준다.
홍범도 동상 철거를 두고 시끄럽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조금만 알아도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로 동상을 육사에 둘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사회주의는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수용할 수 있는 하나의 사상이었고, 소련은 약소국의 독립을 지원한 반제국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오늘날의 냉전적 시각으로 단죄하는 것은 난센스에 불과하다. 이런 비역사적인 발상이 횡행하는 현실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기억해 둘 것이 있다. 여전히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흉상은커녕 서훈조차 받지 못한 채 잊혀 있다는 것을. 그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자 의무라는 점 말이다.
2023-09-27 [16:44]
-
[다른 시선으로] 진정한 한일 연대를 꿈꾸며
“일본사람은 다 귀신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왜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야?” ‘관부재판’ 당시 원고로 참여했던 ‘위안부’ 피해자 박두리 할머니가 자신을 환대한 일본 시민들에게 했던 말이다. 1992년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소송을 제기했을 때, 일본 시민들은 원고들을 초청해 직접 만든 음식으로 대접하며 환영회를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감격한 박두리 할머니는 이 같은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일본 시민들은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결성하고 재판이 지속된 수년간 회비와 후원금을 걷어 원고들의 교통비와 체류비, 〈관부재판뉴스〉 발행 비용을 제공했다.
역사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일본 시민들의 연대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18년 개봉한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마저도 이에 무관심했다. 아니 오히려 영화는 원고들을 향해 일본인들이 돌을 던지고, 법원에 우익들이 몰려와 야유를 퍼붓고, 머물던 여관에서 차별받으며 쫓겨나는 장면을 넣어 일본 사회를 혐한으로 가득 찬 분위기로 그려 냈다.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을 이끈 하나후사 도시오는 재판 당시 영화에 묘사된 그런 일들은 없었기에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재판이 열리던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시민들은 피해자에 대한 전후 보상에 호의적이었고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분위기였다고 회고한다. 현실과는 사뭇 다른 영화 장면은 아마도 감독 자신의 편견 때문이라기보다는 한일 간의 문제를 ‘반일’과 민족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손쉽게 소비해 온 한국사회의 분위기 탓일 테다. 언제나 갈등보다 연대가 어렵지 않은가.
요즘 오염수 방류로 시끄럽다. 장을 보지만 더는 수산물로 눈길이 가지 않는다. 한일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지향해 온 정부는 오염수 방류에 대한 비판을 괴담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친일파 정부’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는 일본의 오염수 방류정책에 동조함으로써 새로운 한일 관계를 만들어가려는 모양이다. 그러나 바다 오염을 방조하기 위한 수사로 사용되는 한일 연대가 과연 진정한 연대일까. 정의와 평화와 안전이 부재한 한일 정부 간의 연대는 양국 국민은 물론 전 지구의 생명을 위험으로 밀어 넣고 있다. 연대의 목표가 민주주의와 평화, 안전이 아닐 때 그것은 다만 정치적 야합일 뿐이다. 양국 정부가 이런 야합으로 일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환경 문제는 일국적 차원에서 해결하거나 대응할 수 없다. 인류 역사 어느 시대보다도 국경을 넘어선 진정한 시민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바다의 오염이라는 재앙에 맞서 한일 시민의 연대가 다시 한번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2023-08-30 [18:21]
-
[다른 시선으로] 모든 아이가 안전한 사회
‘나이를 먹었구나’ 느낄 때가 있다. 길에서 아기를 보면 어느새 웃으며 말을 걸고 있는 낯선 나를 발견할 때 그렇다. 아기 동영상은 또 어떤가. 언젠가부터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열어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다지 아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고, 내 자식 키울 때는 하루하루 허덕이느라 이쁜지 어떤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나였는데,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기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이게 바로 생명의 힘인가 보다. 이토록 예쁜 아이들이건만 영아살해니 아동학대니 요즘 뉴스에 나오는 온갖 험악한 이야기들에 숨이 막힌다. 아이들을 잘 돌보고 안전하게 키울 수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미래를 꿈꾸겠는가. 단지 그 부모를 비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이 땅에 태어나는 아이들이 건강하고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매일 불안에 떨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바로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다. 2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 이 아이들은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권리 바깥에 놓여 있다. “저는 한국에서 유령으로 지내 온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라는 어느 미등록 이주아동의 말은 이들이 놓여 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잘 보여 준다. 그나마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거해 학습권이 주어져 고등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다.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지 못해 핸드폰을 만들 수 없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병원에 가기도 힘들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다. 더욱이 성인이 되면 언제든 강제퇴거명령이 내려질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실질적인 한국인이지만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이도 없는 부모의 국적국으로 갑자기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저출산이다 인구절벽이다 걱정을 늘어놓은 지 오래다. 정부는 매년 저출산 대책으로 대규모 예산을 배정하고 있지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이 이런데, 언제까지 버젓이 존재하는 이주 아동들의 고통에 눈을 감을 것인가. 영국에서는 부모가 모두 외국인이어도 아동이 만 10세 이상 만 18세 이하이고, 태어난 후 10년간 영국에서 거주하면 부모의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국적 취득 기회를 준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영국처럼 장기체류 이주 아동에게 체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생각해 봐야 할 때는 아닐까. 나아가 보편적 출생등록제의 도입도 고려해 봐야 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누구든 차별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나라, 이제 그런 나라를 꿈꿔 보면 어떨까.
2023-08-02 [18:17]
-
[다른 시선으로] 혐오보다 사랑이 필요해
꽤 오래전 일이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아들이 어느 날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엄마, 나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랑 결혼할 거야.” 좋아하던 여자친구랑 헤어진다고 유치원을 졸업하던 날 밤 베갯잇을 적시며 눈물을 찔끔거리던 어린 꼬마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새 애정 상대가 남자친구로 바뀌었네! “그렇구나. 그렇게 ○○가 좋니? 근데 남자끼리는 결혼 못 하는데 어쩌지?” 너무 진지한 아들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애써 참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아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당당히 대답했다. “응, 걱정 마. 미국 가서 하면 돼. 미국에서는 남자끼리도 결혼할 수 있대.” 꼬맹이가 참 모르는 게 없네 싶어 한참 웃었다.
내겐 그냥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성소수자 당사자거나 혹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유롭게 결혼할 권리는커녕, 존재조차 부정당하기 일쑤다. 엊그제 열린 퀴어 축제에도 어김없이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이들의 혐오 표현이 나부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싫어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지독한 말이 또 있을까.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한다니. 아무리 숭고한 종교적 교리를 갖다 붙인들 이런 말은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이 지독한 폭력인 것은 그것이 당사자를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나를 부정하는 폭력의 시선은 단지 외부에만 있지 않고 어느새 스스로의 목소리가 되어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진다. 내가 나를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성소수자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은둔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도록 강요당한다.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용기를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뇌의 시간을 보냈을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우리 주변의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들은 다들 그런 죽음의 시간을 버텨 낸 생존자들이다. 이 생존자들과 지지자들이 벌이는 축하 잔치가 바로 퀴어 축제다. 반동성애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굳이 저렇게 떠들썩하게 해야 하나 싶어 퀴어 축제가 못마땅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둔 생활이 낳은 고립감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동료들과 소통할 기회를 갖는다는 점에서 퀴어 축제의 의미는 적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혐오와 폭력의 언어에 대응해 퀴어 축제 참가자들이 내건 슬로건이다. 나를 혐오하는 타자까지 사랑하는 하나님. 이들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다. 혐오와 폭력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돌보는 사랑임을 이들은 알고 있다.
2023-07-05 [18:25]
-
[다른 시선으로] 다양한 가족을 꿈꿉니다
날은 덥고 모처럼 찾아온 연휴에 하던 일을 접고 영화를 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란 일본 영화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영화는 제목처럼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영화 속 가족은 통상 우리가 지칭하는 가족과 사뭇 다르다. 가짜 독거노인,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죽인 아내와 그의 내연남, 부모의 학대로 집을 떠나온 아이, 거리의 소년 등. 생면부지의 남남들이 가족을 이루고 산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떤 가족보다 더 진한 가족애를 나눈다. ‘금쪽 상담소’에서 우리가 익히 본 그 징글징글한 가족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주인공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건 비밀인데 우린 가족이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이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가족을 이루는 데 혈연이나 혼인 따위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냐는 메시지를 던지며 이 영화는 그 소박한 제목과 달리 21세기 들어 급변하고 있는 가족의 현실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혼인율의 하락과 저출산, 이혼율의 증가, 노령화, 싱글화…. 비단 영화가 아니더라도 가족의 변화와 그로 인한 사회문제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단순히 개인적 선택의 결과라 치부하면 오산이다. 〈가족난민〉의 저자 야마다 마사히로는 현재 가족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신자유주의적 경제 및 사회구조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결혼이나 출산을 원해도 쉽게 이를 실행할 수 없는 구조로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시대 말이다. 그 결과 가족에 기댈 수 없는 이들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외로움과 고독사는 큰 사회문제가 되어 간다. 오죽하면 영국과 일본에서 외로움과 고독 문제를 다루는 외로움부 장관, 고독·고립 장관을 임명했겠나.
결혼이나 혈연에 기댈 수 없다면 결국 대안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족을 이룰 수밖에. 그런데, 이게 또 쉽지 않다. 법이라는 암초에 걸리고 만다. 이성애 부부와 자녀라는 소위 ‘정상가족’ 모델에 기초한 법과 사회보장제도는 혈연과 결혼에 기초하지 않은 가족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한다. 건강보험, 대출, 주택마련 등 실생활에서 차별은 다양하고 촘촘하다. 이 때문에 혈연이나 결혼이 아니더라도 생계를 공유하고 주거를 함께 하고 있으면 차별하지 말고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4월 말 국회에서 발의된 생활동반자법은 그 일환이다. 고독사가 늘어나 사회문제가 되는 마당에 혈연과 혼인으로 엮이지 않았어도 사랑하는 이들끼리 가족을 이루어 외로움을 덜어 내겠다고 하는데, 법이 이를 제약해서야 될까. 우리 사회는 외로움 장관을 만들기 전에 법부터 현실에 맞게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3-06-07 [18:14]
-
[다른 시선으로] 내 안의 우생학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저 애가 누굴 닮아 저러나?” 싶어 한숨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좋은 점만 닮고 나쁜 점은 안 닮았으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인데, 어째서인지 대개 나쁜 점을 쏙 빼닮는다. 그것도 내가 아닌 배우자의 못마땅한 점일 땐 괜스레 짜증이 배우자를 향한다. 유전이란 게 대단하구나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좋은 유전자만 물려받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최근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바람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좋은 형질의 유전자만 골라서 아기를 만드는 ‘슈퍼 베이비’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막혀있지만,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기술이 현실화하면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질까? 글쎄.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SF영화 가타카가 보여 주듯이 유전자가 조작된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낙원이 아니다. 자손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은 어느새 인간을 우수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으로 나누는 우생학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불행으로 다가왔는지는 20세기 독일 나치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열등한 인간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나치는 유전성 질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알코올에 중독된 자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실시하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안락사시켰다. 그리고 우수한 나치인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명샘이라는 시설을 만들어 나치 친위대원으로 하여금 정부가 선발한 ‘우수한’ 여성들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도록 명령하였다. 기본적인 인권을 짓밟은 이런 일들이 어찌 가능할까 싶지만, 강제 단종이 단지 나치 독일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미국 등 소위 선진국들은 물론, 가까운 일본에서도 강제불임수술이 광범하게 실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는 특정 유전성 질환이 있는 경우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보건사회부 장관이 그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명령할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1999년 이 조항이 폐지될 때까지 사회복지시설에서 지적장애인, 발달장애인 등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일본에서는 전후 우생보호법 아래에서 장애나 질병을 이유로 불임수술을 강요받은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다행히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아직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불행한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생학으로 점철된 과거에 대해 제대로 된 성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2023-05-10 [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