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시선으로] 세상은 안전했을까
날마다 새로운 뉴스들이 세상을 덮는다. 유독 흉악한 것들이 적지 않고, 성과 관련한 범죄들은 특히 그렇다. 성범죄가, 딥페이크 포르노가 적발될 때마다 새삼 놀라고, 세상이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일이 벌어지기 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과연 무해했을까.
성 문제와 관련한 교육은 굳이 필요하지 않고, 가정에서 알아서들 가르칠 일이라는 생각들이 있다. 성을 꺼내어 말하는 일은 공연한 짓이고, 가만히 놔두면 원래 거기에 깔린 것이 잘 작동할 거라고, 특히 성 문제만큼은 그럴 것이라는 낙관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근거가 취약한 낙관이 세상 일 앞에 무너지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흉한 일을 마주했을 때 그 낙관의 내용이 뭐였는지를 캐묻는 일이 그래서 중요해진다.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그래피를 문제삼은 이유는, 그걸 보는 모든 사람들의 분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포르노의 형식이 실제 성범죄의 형식과 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교환 가능한 성적 대상으로 보는 습관이 그것이다. 무릇 사람과의 섹스는 아무나가 아니라 오직 그 사람과의 관계여야 하고, 설령 하룻밤 관계여도 눈앞의 상대가 나만큼 중한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섹스가 뉘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닌 협상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거기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의 얼굴과 몸이 자유로이 바뀌어도 상관없는 섹스를 추구하다보면, 실제 사람을 내 성욕을 위해 교환 가능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일에 손쉽게 이끌린다. 딥페이크와 포르노를 관통하는 성욕의 원리가 거기에 있다. 더욱이 인간의 개별성이 거세된 성욕을 쉬이 추구하려면 상대뿐 아니라 나도 얼마간 인간이 아닌 편이 이롭고, 그것이 곧 남자다움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남을 편하게 사람 취급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거추장스런 사람임을 포기하는 일은 많은 폭력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희미한 낙관에 기대 혹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세상 사람들이 여태 성을 그럭저럭 잘 실천해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이제껏 세상이 과연 성을 잘 실천해왔는가는 따져볼 문제지만, 얼마간 실제로 그러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주어진 성 규범을 철썩같이 믿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내심 믿지 않고 살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이 말하는 남성성·여성성에 편승하기보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집중하여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새로 빚어나가고, 상대와 진지한 마음으로 협상에 임해온 양식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지금껏 이리 버텨올 수 있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어째서 세상은 새삼 이토록 위험해졌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세상은 여태껏 누군가에게 용케 안전할 수 있었는지로. 세상은 특정한 누구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안전해야 한다.
2024-09-25 [17:56]
-
[다른 시선으로] 이성연애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한국에 처음 대두될 때,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은 동성연애와 동성애를 서로 구분해서 썼다. 동성연애가 주로 같은 성의 사람들과 서로 쉬쉬하며 섹스하는 뜻이라면, 동성애는 그러한 성적 지향을 바탕으로 섹스를 포함한 삶의 양식을 둘이서라도 함께 터놓고 만들어나간다는 뜻이 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오랫동안 낙인찍힌 성적 지향을 추구할 때, 남에게서 온 낙인을 넘어 그들 스스로 관계와 규범을 새롭게 정의해 실천하겠다는 의지와 같고, 내 성(性)을 쉬쉬하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당당하게 통합된 형태로 대우하겠다는 다짐과 같다.
내 삶과 성을 서로 통합하는 문제는 비단 성소수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이 널리 금지되기에 자기 삶과 성의 통합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성애자는 반대로 자신의 성이 널리 장려되기에 자기 삶과 성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성이 제도화된 수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후자의 경우 내 삶에서 내 성과 성욕을 무작정 숨쉬듯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쉽다. 무언가 당연하다는 것은 곧 그 속의 무언가가 제대로 성찰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성애자에게도 삶과 성을 편히 분리해 실천하려는 유서깊은 관행들이 있다. 그러나 바람 피면 언젠가 걸린다는 속설처럼, 삶 안에서 서로 영영 섞이지 않을 부분이란 없다. 자기 삶에서 자기 성을 분리해 관리하겠다는 다짐은, 마치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을 숨긴 채 몰래 추구하겠다는 다짐과 비슷하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나의 일상 속 가장 후미진 성의 일이야말로 내 인격을 좌우한다. 그렇기에 그곳에서의 일에 대해 스스로 무언가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 대책의 시작은 삶과 성을 따로 떼놓지 않고 묶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쟁점과 불화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의 결과는 나에게만 중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중요하다. 섹스란 기본적으로 남이 전제된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남은 내 성욕의 전유물이 아니고, 섹스는 반드시 남과의 협상을 거쳐 치르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성적 권리의 실천은 곧 당연해보이던 내 성욕을 한번쯤 의심해보는 데서 시작한다. 성적 권리란 말은 있어도 성욕권이란 말은 없는 이유가 이러하다.
지인과 가족의 얼굴을 내 멋대로 포르노 영상에 덧입힌 사람들은, 아마도 상대를 평생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안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을 영영 남으로 대할 의사가 없는 인간만이 남을 포르노화한다. 그건 남과의 협상을 기본으로 하는 통상적인 성관계·인간관계의 문법과 전혀 다르다. 사람이 살인할 완력과 지능이 충분함에도 살인하지 않듯이, 사람은 딥페이크 포르노를 만들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이성애자는 이성연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4-08-28 [18:00]
-
[다른 시선으로] 참음의 불평등
젠더·섹슈얼리티 이슈가 새롭게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또 뭐냐,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드느냐는 여론을 심심찮게 마주한다. 거기에는 내가 어디까지 너의 이야기를 참아야 되냐는 심정과, 이제 더 못 참겠으니 여기서 더 밀리면 안되고, 여기서 더 봐주면 안된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나에게 낯선 이슈를 앞으로 살면서 평생 대면해야 하고, 또한 남의 얼굴과 남의 일에 매번 마음을 여는 과업이 기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너를 더 이상은 못 참겠고 여기서 더 밀릴 수는 없다는 감각에는 그런 통상적인 일을 넘어서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 감각의 이면에는, 여태껏 썩 내키지는 않았는데 스스로 짐짓 정의로운 사람이기 위해 내가 당신의 낯선 이야기를 애써 참아왔다는, 즉 나로서는 참지 않아도 되었는데 여지껏 선심써서 참아‘주었다’는 뜻이 거기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그의 ‘참아줌’은 그에게 일종의 시혜이자 선심인 셈이고,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의 기본값은 연약한 교양에서 비롯된 참음보다 내가 금방이라도 돌아갈 수 있는 ‘참지 않음’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다. 훈련소의 조교나 아우슈비츠의 교도관처럼, 어떤 사람에게 전해질 환대를 언제라도 내 뜻대로 철회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막강한 위계에 올라앉아있다는 증거다.
참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안 참으면 그만인 것이야말로, 참는다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과 같다. 누군가가 이번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과연 참아‘줄까’ 말까를 고민할 때, 누군가는 세상을 참지 않는 선택지가 애초에 없는 채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과 남에게서 오는 부당함과 무례를 무던히도 참는다. 그러지 않고서는 삶을 살아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참는 것과 참아‘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남의 일, 남의 생각, 남의 서사, 남의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고통보다, 그걸 몸소 겪은 이들의 고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염치를 배우는 과정과 같다.
환대란 하해와 같은 선심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일지 말지 재는 것이 아니라, 그간 무던히도 참아왔던 누군가를 비로소 나와 같은 사회적 구성원으로 대접하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여지껏 누리고 있던 파이를 그들에게 쪼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초부터 마땅히 누리고 받아야 했을 몫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느끼는 참음이 다른 이들의 참음과 견주어 그것이 어떤 무게인가를 되짚는 감각이 요구된다. 남과 남의 일을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연약한 교양의 영역에 방치하지 않고, 여지껏 내가 차마 상상해보지 못한 것을 내 상상과 추체험의 영역으로 애써 끌어들이는 노력으로부터 환대는 시작된다.
2024-07-31 [17:57]
-
[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언어는 너무 비좁다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해서는 안된다는 합의에 애써 도달했다. 이는 그간 성폭력 문제에 힘써온 개인과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다. 성폭력은 한 사람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상대를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하는 대상화를 수반하고, 거기에는 어떤 여성들을 내 성욕 처리의 대상으로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남성중심적 교만이 깔려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미투 운동 이전에는 짐짓 그래도 되는 일로 치부되었던 사실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그 운동이 있기 전 사회는 그럼 어떠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전 시절의 언어란 어째서 그렇게 비좁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성폭력 가해자 관련 연구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다. 왠지 남자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혹은 이 여자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해자의 행동과 사고 패턴이 똑같다는 것이야말로,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속에 작동하는 남성성의 문제라는 증거다. 즉 성폭력 가해는 특정 사이코패스나 변태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남성성의 각본을 당연히 여기는 이를 통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성폭력을 특정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폭력이 해서는 안되는 일로 널리 알려진 후부터,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손절’이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손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오는 한편, 그것이 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손절’은 행형의 이념에도, 사회를 바꿀 변혁적 사법과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성폭력 가해에 대한 단죄와 처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선 피해자가 해원되고, 다음으로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교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양자 모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남성성 권력이 아니라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은, 지난날 페미니스트들이 누구보다 앞서 거부해온 일이다.
최근 고인이 된 성폭력 가해자를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성폭력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추모할 수 없다는 것과, 아무리 죄인이어도 그 죽음을 추모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팽팽하다. 한 사람의 궂긴 소식을 추모할 때 그 사람이 생전에 벌인 궂은 일은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히 가해 사실의 삭제로 이어지기 쉽다. 일본의 경우가 그렇듯이 있는 가해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이 문제의 해답은 피해자의 해원을 위해 고인의 가해 사실을 명백히 밝히는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사회적 경험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방식의 추모를 경험해온 일이 잘 없다. 그런 걸 보면 지금도 우리의 언어는 참으로 비좁다.
2024-07-03 [17:58]
-
[다른 시선으로] 감정의 거처
‘감정적’이라는 지적은 보통 낙인과 불명예를 의미한다. 그 때 그 사람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자기의 취약함을 드러내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협상력을 떨어뜨렸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그런 지적은 주로 사회적 약자·소수자에게 가해지고, 거기에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 더 우월한 처세이자 공적인 태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감정이 많이 드는 일이고, 따라서 철두철미하게 감정에 관한 일이다.
누구더러 감정적이라는 말은, 자기들이 허락한 특정 경로로만 그 감정이 흐르게끔 바라는 의미를 깔고 있다. 남들의 감정이 내가 예측한 특정 방향으로만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이야말로 극도로 감정에 북받친 일이다. 누군가가 특별히 감정적이라는 것은 그걸 지적하는 내가 상대적으로 덜 감정적이라는 뜻인데, 위에서 보았듯이 감정을 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남을 지적할 정도로 충천한 그 감정이 적당한 거처를 못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체제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그렇게 느껴야만 하는 공식을 정해두고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만든 다음 나머지 것들에게 ‘감정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식이다. 그렇게 유도된 감정들이 한번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기에 이내 내 것이 된다. 체제가 인정한 공적인 감정과 ‘감정적’ 딱지가 붙은 감정 사이의 경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체제에 의해 허락되어 거기에 뭐가 있는지 스스로 성찰되지 않은 감정이야말로, 때로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 ‘감정적’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내 것으로 여겨지듯이, 그렇게 한번 안팎으로 허가된 감정은 보통 감정적인 것으로 도드라져 인식되기 어렵다. 그것을 성찰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감정적이지 않은 체하는 것들의 감정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가령 힘세고 공적인 조직 속 일처리가 실은 더 은밀하게 사적이고 감정적인 경우들을 주위에서 본다.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감정을 잘 제어하는 듯한 이들은, 정작 중요한 결정과 정보 전달은 조직 내 특정 사람들이 배제된 담배타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덜컥 해버리고는 한다.
공적인 의사표명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적절한 거처에 잘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모든 감정이 그 자체로 정당하거나, 그것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적절한 모양과 거처를 찾기 이전에, 내가 어떤 것에 왜 이토록 반응하는지를 알려주는 첫 단초로서 감정은 중요하다. 이 감정이 왜 드는지 살피고 이것이 혹여 남과 세계를 부당하게 추상화하는 데로 나아가진 않는지 경계하면서, 그 감정이 출발한 자리에 초라하게 선 나를 돌보고 그것을 적절한 거처로 향하게 하는 것, 거기에 우리가 갈고 닦을 보물이 있다.
2024-06-05 [17:56]
-
[다른 시선으로] 사람은 서로 조심스레 같다
나와 다른 남을 대하며 사는 일은 기쁘고 신기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렵고 힘든 일이다. 그것이 두렵고 힘들다는 것은 인류의 문화 곳곳에 묻어있는, ‘우리가 서로 같다’는 감각을 주는 의례와 장치들에서 알 수 있다. 가령 성인이 된 남녀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얼근한 취기 속에 서로 매한가지 인간임을 잠시 체감한다. 또는 어느 높은 건물에 들어가 여기 모두가 같은 신을 믿는 같은 신도임을 잠시 체감하는 때도 있다. 그처럼 너와 내가 잠시 같다는 감각은 그것이 도무지 가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위안과 안도를 준다.
사람이 태어나 거의 첫번째로 서로 다름을 구분짓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性)이다. 물론 성에 얽힌 젠더의 관념은 따지고 보면 별다른 근거 없이 거기에 의미가 따라붙는다. 생식기가 다르고, 몸의 발육이 다르고, 목소리의 높낮이가 다르고, 습관적으로 쓰는 몸짓이 다른 것은 따지고 보면 각각의 인과관계가 별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으로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재빠르게 정렬되고는 한다. 그런 정렬 방식에 근거가 적은 것만큼이나, 그것이 그렇게도 자연스러운 듯 작동된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일은 중요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고, 그 중 하나의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그만큼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내게서 당장 친숙한 어떤 틀에 집어넣기를 선호한다는 데 있다.
세계의 모든 고등 종교의 경전에는 남녀의 구별에 대한 신화적 기록이 존재한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현재의 눈으로 보면 도무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낡고 불의한 것들이 적지 않다. 그것이 과연 낡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마치 과거의 인간들과 지금의 내가 그런 불의함으로라도 잠시나마 서로 같아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서로 같다는 느낌을 주는 인류의 모든 문화적 장치가 그렇듯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그 잠깐의 같음을 누린 후에 사람들은 여지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 그 집에 누가 있든 없든 자기 몫의 외로움을 그러안은 채 잠을 청할 것이다.
사람이 어느 구럭에 기대 서로 같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일은 사실 믿을 수 없이 간단하다. 내가 느끼는 남녀의 차이보다 내가 느끼는 남자와 남자 사이의 차이가 열에 아홉은 더 크다. 젠더뿐 아니라 모든 지역, 세대, 민족, 국민, MBTI도 다 마찬가지다. 이 지점에서 그 옛날 사람들이 종교 경전을 쓰면서 느꼈을 것들을 한번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서로 꼼짝없이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두렵고 힘듦을 조금 더 잘 다루고 살 수 있다. 그 점에서야말로 사람은 서로 꼼짝없이 같기 때문이다.
2024-05-08 [18:12]
-
[다른 시선으로] 내 것이 아닌 5분
2014년, 미국 최대의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캠페인(HRC)의 행사에서 배우 엘리엇 페이지가 커밍아웃 스피치를 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만약 사람들이 어떤 낯선 사람을 보고 느끼는 감정을 5분간만 참고 그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거부의 감정을 견디고 5분을 있은 후에 남을 함부로 차별하면 안된다는 교양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 5분 안에 느끼는 인상과 감정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나아가 그것이 자신의 진실한 의견이자 선택이라고 믿는다.
5분 너머의 교양보다 5분 안의 감정이 더 진실된 것처럼 여겨지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세상에 낯선 남이 있고 그 남에게도 여러 사정이 있다는 교양은 보통 수업 시간에 남을 통해서 듣는다. 남에게서 들은 교양은 주로 누군가를 놀리고 싶은 내 욕망에도 불구하고 작동해야만 할 원칙으로 와닿는다. 그래야만 하는 원칙이 왠지 그러고 싶은 감정보다 힘이 센 경우는 별로 없다. 게다가 남 놀리지 말라는 원칙보단 남 놀리고 싶은 마음이 왠지 훨씬 내 것 같다. 한 사람에게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것인 것보다 힘이 센 경우도 보기 드물다.
하지만 그렇게 처음부터 내 것 같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5분 동안의 감정이 정말로 나에게서 온 것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주위에서 학습한다. 밥 먹는 것에서 말하는 것까지, 누군가가 그걸 수행하는 걸 흉내내며 아이들은 살면서 필요한 무언가를 배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과거 어렸을 적 그렇게 느끼는 것이 눈치껏 맞겠다고 생각한 결과의 산물일 수 있다. 아이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감정과 관계를 학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내 것 같은 감정은, 실은 그것이 내 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까먹었기에 처음부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 수도 있다.
처음 5분의 편견을 이겨내는 방법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혹시 다른 데서 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들 중 대부분이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어느 시점에 새로 만들어져 재구성되고 끝내 허물어지는 저마다의 수명을 갖는다. 거기에 개인이 느끼는 감정도 포함된다. 친숙한 내 감정이 내가 아닌 남에게서 온 것일 수 있음을 아는 것은, 내가 좀더 바라는 나의 삶과 자아를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하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남의 것으로 탄로나는 일만큼 살면서 불쾌한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2024-04-10 [19:01]
-
[다른 시선으로] 눈치는 공평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사람은 눈치를 학습한다. 무엇이 말로 드러나기 이전에 입을 닫고 주변의 공기와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는 것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학습이고 스킬이다. 그리고 그 학습과 스킬이 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눈치를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의 가치 기준을 내면화하는 일이고,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바를 내 안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그렇게 눈치를 통해 한번 수용된 남의 가치관은, 말할 필요도 없는 침묵의 장 가운데 내 것이 된다. 마침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 부드럽게 머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 사람이 눈치를 보던 입장에서 남에게 눈치를 주는 입장으로 돌변하는 것은 한 집단에 사람이 적응하는 과정의 전부다. 그 적응이란 말로 논쟁하는 범위를 넘어 온갖 비언어적 약속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 포함된다. 그렇기에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 집단의 일을 말로써 문제제기하는 것은, 말 이전에 구성된 비언어적 평형을 깨뜨리는 일이 되고, 그만큼 부적응의 의미를 감수하는 일이 된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일이란 말로 드러난 것보다 말로 드러나지 않음의 비중이 더 크다. 사람이 어느 집단에서 눈치보는 데 성공했을 때 못내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그 말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가 비로소 내 것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사람이 한 집단에 새로 적응해 자신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한 집단과 한 사회가 그러한 변화를 겪는 일 또한 의외로 잦다는 것이다.
한때 내가 안도하며 즐거이 적응해온 세상이 문득 변했을 때, 그 사람은 별안간 내 것이었던 침묵의 장을 뺏긴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무얼 뺏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그 사람은 이전에 자신이 적응한 세상이 옳다고, 지금 이 변화의 방향이 틀렸다고 강변하기 쉽다. 그 순간 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세상의 일부인양 포근히 안기던 그 때의 느낌이 그립다. 내가 보아온 눈치가 처음부터 내게서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젠더 감수성이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떠오른 후에, 거기에 미달되는 이들을 너무 쉽게 ‘캔슬’하는 것은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잦다. 그것은 애초에 젠더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캔슬은 젠더가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눈치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수천 번 작동해온 익숙한 과정이다. 그것이 새삼 그토록 낯설다면, 한때 내 것처럼 친숙하였던 사회의 침묵이 내 편이 아닐 수 있음을 그제서야 직면한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아닌 남의 것임을 한번쯤 경험해보는 일은 삶에서 중요하다. 내가 보아온 눈치와 거기에 깔린 침묵이 결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일은.
2024-03-13 [18:10]
-
[다른 시선으로] 까탈
차별을 받거나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사람은 예민해진다. 세상에 많은 차별과 부당함이 있지만, 그 중 적잖은 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집중된다. 때문에 그런 일을 겪은 것과 그 결과 예민해진 몸과 마음은, 마치 그 사람이 애초에 사회적 약자이고 소수자인 탓으로 여겨진다. 좀더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사람이었다면, 대체로 그런 나쁜 일을 겪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민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사람은 대체로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어떤 것이 힘센 대세에 가까운지를 잘 눈치챈다. 따라서 내가 겪은 피해와 그것을 알아채게 한 예민함은 나에게 취약하고 덜 유리한 본성으로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그 피해와 예민함을 숨기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던 듯이 스스로를 속인다. 그런 것들은 왠지 나에게 유리한 것 같지 않으니 그저 없는 것처럼 생각해두고 싶다.
피해와 까탈로 자신을 요약당하고 싶은 사람은 적기 때문에, 이런 반응들은 그 나름대로 스스로를 지키려는 움직임이다. 문제는 이런 습관을 자기 잇속대로 써먹는 나 아닌 다른 존재들이다. 차별과 부당함을 애초에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 차별과 부당함을 생산한 이들에게 가장 이롭다. 그들의 눈에는 애초에 그런 것은 없고, 그걸 꺼내어 말하는 쪽이 어딘가 이상한 것이다. 피해를 입을 만했으니 입었겠고, 평소에 예민한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라는 식이다.
세상의 힘센 질서와 차별을 낳는 사회구조는 어디에 외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몸에 스며들고 학습되는 과정을 통해 작동되고 재생산된다. 그렇게 구조가 몸으로 스며드는 여러 방식들 가운데 앞서의 일이 있다. 내가 입은 피해와 그로부터 얻은 까탈이 싫어 아무쪼록 그것을 숨기고 싶었던 연약한 형태의 존엄은, 남들에 의해 그것 보라며, 그건 원래 없던 일이었고, 그건 너의 까탈이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빼앗기고 이용당한다.
까탈을 부리는 건 대체로 비참한 일이고, 까탈을 부리는 게 즐거워서 부리는 사람은 아주 적다. 까탈이 비참한 이유는 그 까탈의 입장이 이 세상에서 대세일 수가 없음을 그 당사자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미워 까탈을 부릴 이유가 없는 힘세고 강한 편에 빙의해 살 필요는 없다. 까탈을 내리누른다고 내가 힘세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참한 까탈을 부리는 입장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 그 비참을 이겨내는 첫번째 관문이다. 누구나 힘세고 강하고 덜 예민하고 덜 까탈스럽기를 원한다.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잘 어루만지는 일은 중요하고, 그것은 그 입장을 나라도 편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스스로 편들지 않는 일은 추하다.
2024-02-14 [18:06]
-
[다른 시선으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공부
대학 인문학부에서 텍스트 읽기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읽기와 비평의 기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무리 훌륭한 글에서도 그 속에서 비판할 거리를 찾는 능력, 다른 하나는 아무리 못 쓴 글이라도 그 속에서 단 하나의 일리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전자에 해당할 대표적인 문제의식 중 하나가 성(性), 즉 젠더·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이다. 수천년간 존경을 받아온 인류 문명의 경전이나 여러 고전들도, 유독 성에 있어서만큼은 현재를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편견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인류에게 성 관련 지식과 실천은 최근까지 그 윤리의 기준이 빠르게 변해온 주제다. 현재 성폭력, 가정폭력, 성희롱,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로 분류되는 말과 행동들은,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별 문제가 안되거나, 남들과 히히덕거리는 용도로 주로 언급되던 것이었다. 그런 인식이 변해왔다는 것은 곧 그 사이 우리 사회가 그만한 변화를 겪어왔음을 의미한다. 옛 고전 속에서 소위 ‘빻음’(‘젠더 감수성 없음’을 의미함)을 발견하는 일은, 오늘날 비로소 가능하게 된 변화를 재확인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지성의 활동이다.
이와 더불어 필요한 것은, 역사 속 숱한 ‘빻은’ 글들 가운데의 일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다. 사실 현재의 준엄한 기준으로 완벽한 과거의 글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거에 쓰인 많은 글들은 그 시대에 고유한 편견을 편견인지도 모르고 써제낀 경우가 허다하다. 그 허다한 ‘빻은’ 글들이 그럼 오늘날 모조리 별 소용이 없어진 글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세상에는 잘 쓴 글보다 못 쓴 글들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못 쓴 글들을 전부 폐기처분한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압도적인 양의 교재를 잃는 것과 같다. 아무리 못 쓰고 문제적인 글이라도 그 글을 쓰게 된 동기와 그 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하나의 일리는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일리를 내 것으로 만든 연후에 그걸 그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펼칠 줄 알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중요한 공부법이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상대의 입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극복은 곧, 그 상대가 지닌 문제의식들 중 일리있는 것을 상대보다 더 나은 나만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을 대하며 나를 다잡는다는 측면에서 글과 사람은 그처럼 유사한 면이 있고, 그렇기에 그것을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 인문학이 최근 수십년간 진행해온 일이 바로, 인간의 성을 이전보다 말이 되는 방식으로 말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역사 속 ‘빻은’ 것들을 짚어내고, 동시에 그 중 일리있는 것들을 읽어내 오늘날 형성된 젠더·섹슈얼리티의 입장과 관점에서 그것을 다시 쓰는 일을 통해.
2024-01-17 [18:08]
-
[다른 시선으로] 쉽게 쓴 글
논문을 쓸 때 과거 학자들이 언론에 기고한 칼럼을 많이 참고했다. 학계에는 동료 평가에 의해 자기 연구의 학술성과 객관성을 가다듬는 장치가 존재하지만, 그를 통해 한번 공신력과 권위를 얻은 학자들은 자신들이 취득한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자신이 지닌 사회적 편견을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확실히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보통 크게 틀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청탁받은 지면에 글을 실을 때는 그것을 넘어 자기가 잘 모르는 적당한 주제에 대한 적당한 인상비평을 슬슬 섞게 되고, 그러다보면 십중팔구 틀린 소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틀린 소리는 학자의 권위를 업고 그것이 마치 진실이고 맞는 말인양 사회에 유포되기 쉽다.
과거 그분들이 왜 학술논문이 아닌 일간지의 칼럼에서 소위 ‘뇌절’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언론의 기고가 그들에게 좀더 쉽게 쓴 글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내 학술적 권위를 뽐내기 위해 쉽게 쓴 글은 그만큼 틀리기도 쉽다. 글이 바르게 전달되어야 할 내용보다 그 글을 쓰는 쾌락과 효능감에 도취되었을 때, 그 글이 잘못 설명하고 재현한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입을 확률도 그만큼 올라간다. 비단 학자가 아니라더도 펜촉과 키보드를 통해 글이 술술 쉽게 나오는 상황을 저마다 주의해야 할 이유다. 글이 쉽게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신호와 같다. 세상과 내면을 말하는 일이 별도의 성찰 없이 그저 즐거움으로만 도배되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쉬운 말이 넘쳐나는 시대다. 핸드폰만 쥐고 있으면 언제 어느 때 무슨 말이건 할 수 있는 시대에, 말을 할 때 어떤 윤리를 갖추어야 옳은지 생각한다. 말이 부족할 때에는 말의 검열이 문제가 되지만, 말이 넘쳐 흐를 때에는 반대로 그 넘쳐흐른 말이 열어젖힌 비극이 문제가 된다. 혐오 발언을 문제삼고 사회적 소수자를 의식해 가급적 말을 고를 것을 주문하고, 연예인 기사 아래 댓글창을 일부러 닫을 것을 촉구하는 여론이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쉽게 떠드는 말로 상처입고 있다는 증거다. 말을 할 권력이 민주화된 후에는 그 말에 따른 폭력 또한 ‘민주화’되었고, 말과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어떤 말이 쉽게 나올 때 그것이 왜 쉬운지, 그 쉬움이 과연 적절하고 정의로운 것인지 한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쉬운 말의 칼날이 어느날 나에게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성 규범의 지식·제도와 반사회성 형성, 1948-1972〉라는 제목의 한국사 전공 박사학위논문을 썼다.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위원, 가족구성권연구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2-20 [18:07]
-
[다른 시선으로] '빠순이'가 아니라 '팬덤'
요즘은 바빠서 특별히 음악을 찾아 듣거나 가수를 흠모할 여유가 없다. 그런 나에게도 한때 가수 모 씨의 팬이 되어 책받침에 사진 넣고 커다란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여놓으며 절절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인터넷이 없던 때라 팬카페 같은 것도 없어 그저 나만의 세계 속에서 음악을 즐길 뿐이었다.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서로 모르는 타자와 취향을 나누며 적극적인 취향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은 소위 ‘오빠부대’ 혹은 ‘빠순이’라 불렸던 여성 팬층의 존재를 한국 사회에 강렬하게 알렸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당시 사용되었던 ‘빠순이’는 남자 연예인에게 환호하는 소녀팬들을 지칭하는 비하적인 용어이다. 학교 공부고 뭐고 다 팽개친 채 연예인만 추종하는 ‘광적’ 소녀집단이라는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10대 소녀들의 병폐 현상으로 이들을 다루었고, 거대한 소비자 집단이 된 소녀팬들이 대중문화를 좌지우지한 탓에 대중문화가 저질이 되었다는 한탄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비난에 찬 시선은 이제는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빠순이’를 대신하여 ‘팬덤’이라는 말이 사용된 지 오래다. 스타 팬덤은 단순한 대중문화의 소비자를 넘어서 사회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만들어가는 팬덤의 영향력은 인터넷 소통 공간을 타고 국가를 넘어서 글로벌한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음악에 대한 소비를 넘어서 스타를 키워내고, 대중문화는 물론 정치·사회적 문제에까지 폭넓게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웹진 〈결〉에는 인상 깊은 글이 하나 실렸다. 그 글에서 문화연구자 이지행은 BTS 팬들의 기억정치를 다루었다. 2018년 BTS의 한 멤버가 원폭과 해방의 이미지가 동시에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이 알려지면서 BTS는 원폭을 지지하고 심지어 나치를 추종한다는 일본 넷 우익의 비난에 몰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거진 역사적 기억의 전쟁에서 전 세계 아미들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잔학행위와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피해,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등 그동안 잘 몰랐던 아픈 과거의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 소통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백서(White Paper Project)에 담았다. 이지행은 이 과정을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여 국가를 넘어서는 초국적인 연대를 이루어낸 빛나는 순간으로서 포착한다. 한때 ‘빠순이’라 비난받던 취향 공동체로서의 팬덤은 어느덧 대중문화는 물론 폭력적 과거에 대한 성찰을 나누며 초국적 역사 기억을 만들어가는 정치 주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아마 집집마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열성 팬들이 있을 거다. 이들의 미래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2023-11-22 [17:59]
-
[다른 시선으로] 히로시마를 기억하며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 폭탄을 개발한 핵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등 수많은 화제작을 만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는 흥미진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이어진 미소 냉전, 그리고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달군 매카시 열풍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긴 대사들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팽팽한 긴장감으로 관객에게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하는’ 역설 속에서 원자 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이로 인해 핵물리학자로서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전후 원폭 피해에 대한 죄의식으로 평화주의자가 되어 수소 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결국 공산주의자로 몰려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과학 연구가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정치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지 흥미롭게 보여 준다. 원폭에 대한 비판 의식이 깔려 있기는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으로 보는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은 어쩐지 찜찜하다. ‘물리학자들을 위한 헌정 영화’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들의 고투를 열정적으로 그려 내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다 결국 버려진 오펜하이머에 대한 동정적 시선 뒤에서 우리는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두 도시에서는 그해 연말까지 각각 14만 명과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폭은 피폭자 본인은 물론 후대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서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 일본의 대표적 작가이자 양심적 지식인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고통과 비참한 삶을 그의 책 〈히로시마 노트〉에 기록했다. 그는 피폭 후 십수 년이 지난 1960년대 전반에 히로시마를 방문했지만, 원폭의 상처는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피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 내려 애쓴 그들의 용기와 희생, 헌신을 전하며 겐자부로는 어느새 히로시마의 비극이 망각된 채 핵무기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인류가 이런 비극을 잊고 침묵할 자격이 있는지 물으며 그는 그러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온몸으로 원폭 후유증을 견뎌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뿐이라고 준엄하게 말한다. 히로시마는 핵무기의 위력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라 핵무기가 초래한 인간적 비참함의 극단적 증거일 따름이다. 오펜하이머를 보며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의 고투와 두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원폭의 비참한 현실로서 히로시마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3-10-25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