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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부정 타고 인생 말린 것들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문득 힘들어한다. 가정폭력 및 파트너폭력 피해자, 친족 성폭력 피해자, 원가족으로부터 도망 나온 가출팸 청소년,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미등록 외국인, 성정체성이 아우팅되어 원가족과 절연한 성소수자, 원가족에 의해 시설에 갇힌 장애인이 그렇다. 세상의 가족에는 ‘홈 스위트 홈’과 더불어 그렇게 듣기만 해도 ‘부정 탈 것 같은’ 현장들이 존재한다. 전자만 가족인 것이 아니라 후자 또한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이기에 ‘가족’을 사유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의 착상이다.
운동과 학술은 무언가를 호명할 때 세상이 말하는 좋은 면과 더불어 춥고 어두운 면을 함께 염두에 두기를 권유해 왔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기를 생각할 때 그 시절의 여러 찬란한 것들과 더불어 고문 피해를 입은 독립 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를 거기에 나란히 놓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와 권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강력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일은 더욱 그렇다.
운동과 학술이 주로 세상의 좋은 면보다 어두운 면을 집요하게 먼저 보려는 것은,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좀 더 시급한 관심과 해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급함은 ‘인생 말린 것들’에게 내 팔자 옮기 싫다는 예감 앞에 쉽게 가로막힌다. 세상의 어둠에 털끝 하나 닿지 않고, 거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귀담아듣지 않으면 비로소 나는 안전하리라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적이고, 세상을 사는 누구라도 한 번쯤 품어보았을 욕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는 문득 어떤 사건과 인생을 알게 되고, 제 눈으로 무언가를 목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내가 이것을 가려두고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이것을 안 뒤에도 이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너의 슬픔을 안 연후에 너와 함께 다시 웃는 날은 과연 언제 올까. 사실 그 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생의 비극은 내가 온전히 원해서 겪은 것이 아니고, 눈앞의 사람은 내가 온전히 원해서 만난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팔자 사나운 것에 어느새 휘말린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그것이 내 일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내가 보고 겪은 것들에 다만 책임을 다하고 싶어한다. 내가 보고 겪은 걸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은 기운이 세다. 그 사람은 팔자를 피해 애써 발딛은 세상의 행복이 너무 비좁은 나머지, 그저 지금보다 내 행복을 넓혀 나와 내가 본 이들이 거기에 함께 머물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도 돌아갈 가족이 필요한 것이다.
2025-05-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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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세상이 놀랍지 않다면
세상의 풍파를 너무 겪은 사람은 세상의 재난에 심드렁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노인이 세월호를 보는 시선이 때로 그러하다. 저게 저렇게 십년 넘게 노란 배지를 달 일인가. 수십년 전 TV로 방영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81년작 영화 ‘레이더스’ 막바지 시퀀스에는 성궤의 저주를 받아 얼굴이 녹아내리는 특수효과가 나온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그 씬을 보고 한국전쟁기 당신이 목격한 네이팜탄의 위력에 대해 설명했다. 불붙은 고무가 한번 몸에 묻으면 살갗이 녹을 때까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식민 통치와 전쟁으로 나라가 뒤집힌 다음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생존과 번영과 근대화를 위해 무엇이라도 내줄 것처럼 살았다. 주위를 돌아보고 무슨 속도로 내닫는지 가늠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적었고, 그 사람들은 주로 처음부터 제 몫을 잃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 몫을 잃게 된 적잖은 사람들은,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은 저 수준의 삶까지 올라서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온갖 생진을 짜내며 살았다. 그렇게 힘주고 산 결과 나름의 번영이 주어졌지만, 그에 값하는 후과도 잇따랐다. 건강을 잃거나, 참아온 스트레스를 대속할 더 큰 쾌락을 좇다 가산을 탕진하거나, 오래 참은 마음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인터넷과 온라인 세상이 열린 다음 거기서 접하는 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진절머리가 나는 마음도 따지고 보면 그런 흐름 안에 있다.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의 인생을 산 듯이 급변해 온 세상이지만, 나에게 밥 한 번 사주지 않은 세상은 이제 나에게 더 많은 공감과 해량을 요구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 거기서 본 일들에 거듭 놀라고, 그것이 슬프거나 말거나 그 놀라운 상황에 대처하기에 바쁘고, 그 일이 아물기도 전 또 놀라운 일들이 나를 엄습하고, 그런 것 하나하나가 나에게 중요함에도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그걸 꺼내어 말하기를 단념한다. 단념한 마음에는 굳은살이 배긴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반쯤 내몰린 선택이다.
사람의 속마음은 누구나 곱고 수줍다. 사회가 거칠고 시절이 독해서 그렇지, 처음부터 모질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남과 세상의 일이 언제부턴가 하나도 놀랍지 않다면, 그 마음이 머문 굳은살의 역사와 그 아래의 속살을 한 번쯤 떠올려 보아도 좋다. 사람은 때로 스스로를 아이처럼 돌봐야 하는 때가 있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쏜살처럼 달려오느라 가장 먼저 내팽개친 것들 중 하나다.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돌볼 수 없다.
2025-04-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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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민주주의는 목숨이다
민주의 꿈은 높고 크다. 누구나 위정자를 투표해 선출할 수 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시위로, 전쟁으로, 피로 얻어낸 성취다. 왕의 손아귀에서 민의 권리·의무를 해방시킨 근대 시민혁명과 맞물려, 힘센 나라와 힘 약한 나라의 위계는 그 민의 권리·의무를 또 한번 가로막았다. 오늘날 국제 사회에 통용되는 인권은 탈식민 민족의 자결권 개념에 크게 빚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써있는 3.1운동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지 않은 민주공화제와 민족 자결의 원칙을 조용히 웅변한다.
제국주의로부터 놓여난 탈식민 국가가 한번 세워졌다고 민주의 꿈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전제군주정과 신분제가 그랬듯이, 어떤 그룹의 인간이 다른 그룹에 비해 열등하고 그들에게 제한된 자유와 평등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류사에 뿌리깊다. 민족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세워진 나라에서조차 그런 차별의 생각은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 그중 대표적인 차별의 근거가 바로 성별, 즉 젠더다. 젠더는 세상 많은 실질적 차별의 뿌리이면서 다른 사회적 차별의 은유로 활용된다. 과거 많은 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피식민국을 여성으로 비유했다.
구조적 차별은 차별하는 그룹과 차별받는 그룹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활용한다. 가령 남성과 여성이 전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차별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식으로 활용된다. 남성과 여성이 애초에 다르다는 말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차별에 근거를 달아주고 그 구분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밑밥으로 사용된다. 일견 모순돼 뵈는 이런 전략은 인간 사회에 의외로 흔하다. 일제 강점기 민족 차별에 시달리던 일본인과 조선인을 저 동일성과 차이의 도식에 대입해도 얼추 들어맞는 것이 그 예다.
오늘날 민주의 꿈 가운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있다. 신과 깨달음 앞에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고등 종교 경전의 수려한 문구를 제쳐두고, 사람을 차별해도 좋다는 그 속의 몇몇 구절과 전승을 종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호도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종이다. 민주의 원칙이 그 어느 때보다 위협받는 이 때,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포함된 비상행동 공동의장단의 단식이 2025년 3월 19일자로 12일을 맞이했다.
차별받는 이들에게 반차별이란 밥이자 목숨이다. 그 밥과 목숨을 향한 길이 때로 밥과 목숨을 잠시 떼어놓는 싸움을 통해야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슬픔이다. 그 슬픔을 딛고 도달할 싸움의 승리는 3.1운동을 이마에 써놓은 대한민국 헌법이 증거한다. 민주와 반차별은 우리가 걸어온 역사가 저도 모르게 아로새긴 예정된 미래다.
2025-03-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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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즐거움 너머의 윤리
대한민국은 한때 학생들을 때리면서 가르치는 나라였다. ‘시범 케이스’로 맞는 학생을 보면, 나머지 학생들은 저렇게 되지 말아야 할 방도를 찾고는 했다.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사유 없이 당장 맞기 싫어 거머쥐는 윤리 감각은 대체로 그 뿌리가 얕다. 또 한번 경험하거나 목격한 폭력은 무엇을 시행하거나 정지하는 손쉬운 도구이자 강렬한 본보기로 옮아간다.
그런 세상에서는 폭력을 쓰지 않고, 개인의 윤리 감각을 기를 공간을 마련해주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느낄 즐거움과 보람의 감각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한 교육론일 수 있다. ‘참교육’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보복과 처벌을 뜻하기 이전에는 그 말이 실제로 그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선생이 학생 때리기를 예사로 알던 시절에는 그런 접근이 선생과 학생 모두를 인간답게 만드는 유익한 방도였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은 교육 현장에서 학생을 때리지 않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학생들의 주체성을 믿고 그들의 즐거움을 지고의 가치로 대접하는 교육론도 희미한 잔영으로 남았다. 그 사이 사회의 환경도 변했다. 돈을 지불했으니 돈값을 내놓으라는 식의 소비자 정체성으로 모든 가치에 접근하는 풍토가 도처에 만연했다. 학생들에게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교사의 체벌이라는 중앙집권적 폭력이 사라진 후에는 학생들간의 학폭이 난무하고, 학생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제 나름의 즐거움을 표출한다. 학생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노알라’로, 여성을 ‘꼴페미’로, 트랜스젠더를 ‘젠신병자’로 부르는 것은, 그 행위가 그들에게 대체로 즐겁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은 체벌이 만연하던 시절 뜻있는 어른들이 은연 중에 학생들에게 권장하던 것이다. 체벌이 사라진 자리에는 훈육 대신 방임이 남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폭력을 거두고 즐거움을 장려하면 그들로부터의 윤리 감각이 바로 서리라던 것이 지난 시절의 믿음이었다. 온라인의 소위 ‘해방적’ 공간에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트랜스젠더를 무시로 ‘패는’ 세상에서, 즐기라는 말은 거꾸로 그 상황을 지속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만일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학생을 ‘패던’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전제로, 새 시대에 맞는 사회 윤리의 감각을 새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여기 오늘의 책무다.
고래로부터 인류는 살인과 강간의 즐거움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인터넷과 커뮤니티가 사방으로 열린 이 시대에, 다양한 사회 구성원을 상호 식별할 윤리를 바로세울 방도는 분명히 있다. 그 윤리의 시작은 내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모름지기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음을 훈육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그릇된 믿음과 달리, 그 훈육은 누구를 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2025-02-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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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중립은 없다
언어 게임에서 찬반 구도를 나누고 그 사이 어디를 중립으로 일컫는 일은 쉽고 재밌다. 쉽고 재밌는 많은 일이 그렇듯이 그것은 정의와 별 상관이 없다. 가령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공산군이 개입했는가 아닌가를 논쟁 구도로 놓고 그중 어느 편도 들지 않는 것을 중립이라 칭하는 일이 그러하다. 그것은 내 엄마가 살아 계시는지 죽어 계시는지를 놓고 그 판단을 미루는 것을 중립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중 어느 한쪽은 확실하게 없었던 사실이지만, 중립을 둘러싼 언어 게임은 그것이 사실인지를 묻기보다 그 게임 자체의 재미에 빠지게 만든다.
실체적 진실이 거세된 언어 게임의 문제는, 모든 극단적인 주장에 그 나름의 명분을 쉽게 쥐어준다는 데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찬반 구도 속 중립이 어느 한쪽의 주장을 어느새 의미있는 것처럼 만들기 때문이다. 가령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죽이지 않는 것 사이에 중립을 설정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마치 논쟁 가능하고 유의미한 선택지가 된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과 강간하지 않는 것 사이에 중립을 설정하면,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한번쯤 논쟁해볼 법한 선택항이 된다.
그렇게 한번 말의 권리를 얻은 주장은 점점 반대쪽 주장과 평등한 가치를 갖는 것처럼 호도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죽이지 않는 것이 등가의 가치일 수 없음에도, 언어 게임의 재미에 한번 말려들면 쉽게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마땅한 주장에 하나둘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세상엔 죽어 마땅하거나, 강간당해도 싼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한번 누군가에게 그럴싸하다고 여겨지면, 그 사람은 그 논쟁 구도가 적어도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생각에 스스로 빠져든다.
현대 사회에서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주장이 쉽사리 성원권을 얻게 되는 과정이 이러하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초·중·고등교육 현장에서는 보통 자유로이 논쟁할 주제와 가부를 분명하게 판단할 주제를 서로 구별하여 가르친다. 내 아빠가 살아 계시는지 죽어 계시는지를 논쟁하고 거기에 중립을 설정하는 것에 무슨 대단한 인문적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수업을 이끌지 않기 위함이다.
무엇이 일어난 사건이고 진실인지 자명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중립 기어는,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는 것이 아니라 기어를 뽑은 차를 어디로든 내달리게끔 만드는 일이다. 그 때 해야 할 일은 기어를 중립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핸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덜 위험한 방향으로 차를 트는 것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내닫는 차에 브레이크 밟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일에 중립은 없다.
2025-01-1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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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그날 밤 우리는 퀴어였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 윤석열 대통령의 입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이후 햇수로 45년만의 일이었다. 국회로 계엄군을 태운 헬기가 날아들었고, 국회 정문은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국회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이 신속히 본회의장으로 모였고, 12월 4일 오전 1시 3분, 재석 190명 의원들 중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계엄 포고 2시간 38분 만의 일이었다.
박안수 계엄사령관의 명의로 선포된 계엄포고령은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포고령 위반시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혹자는 진짜 간첩이 아니면 위 포고령을 굳이 두려워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으로 문을 연 한국현대사가 말해주듯, 비상계엄 치하에서 소위 ‘반국가세력’의 기준은 하염없이 위아래로 요동친다. 내가 무사통과할 허들의 높이가 어딘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최대한 낮게 몸을 웅크린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기준을 통해 사람들을 납작 엎드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원하는 일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 해제 요구안이 통과되던 그 짧은 2시간 38분 동안 많은 단위들이 성명과 논평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유독 회원 및 구성원들의 정서적 안위를 걱정한 3개의 단체를 알고 있다. 그 중 두 곳은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였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아무쪼록 동요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뉴스에 귀기울일 것과, 비상계엄으로 마음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각자 연락의 끈을 놓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회의 낙인으로 인하여 평소 구성원들의 높은 자살률과 정신건강 악화 문제에 부딪치는 운동단체의 행보였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계엄포고령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일순간 일상이 날아간 느낌과 유서 깊은 불안에 떨었다. 비상계엄 치하의 삶이란 그러하다. 혹여 계엄군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검열해보는 것, 낮게 엎드린 상태로 누군가에 의해 마음이 함부로 헤집히는 것, 알 수도 없는 남의 기준을 이미 존재하는 무기물의 돌과 거기에 쓰인 십계명인 양 기어코 내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2시간 38분의 시간 동안 구성원들의 마음을 달랜 3개 단체 중 마지막 한 곳은, 오전 0시 18분 “부디 너무 큰 불안을 가지지 말 것”을 강조한 전남대 총학생회였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계엄군이 캠퍼스 안 학생들을 끌어내 예비검속한 바로 그곳에서의 일이었다. 퀴어는 비단 성소수자뿐 아니라 자연을 참칭하는 밑도끝도 없는 기준에 스스로를 늘 검열해야 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날 밤 2시간 38분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몸으로 수상한 공포에 떨던 우리는 모두 퀴어였다.
2024-12-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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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여자대학의 여자
여자대학이라는 말에는 지난 100년에 걸친 여성 고등교육의 역사가 묻어있다.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때는 여성에게 학교를 보낸다는 인식이 그리 굳건하지 않았고, 남녀 분리 교육은 그 자체로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까지 여성대학이 아니라 여자대학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 시절 여자고등보통학교(현 여자중·고등학교)와 오늘날 여자대학의 전신인 여자전문학교에서 그 말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 여자대학의 커리큘럼은, 가정학 등 그 시절 여성이 배울 법하다 여겨진 것들로 종종 제한되기도 했다.
여자대학에 묻은 여성 공간의 뜻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오늘날 여성 고등교육에서 여자대학이 갖는 여러 의미들 중 하나는, 여성들로 하여금 누군가의 배우자를 넘어 여성 자신의 삶을 그리도록 하는 데 있다. 여성이 다양한 진로로 사회에 진출할 수 있고,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를 넘어 세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을 품게 만드는 것이 여자대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마땅히 남녀공학에서도 행해져야 할 그러한 교육의 기능이 구태여 여자대학에서 추구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사회 속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지금도 여전히 남성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는 것으로 강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여성 개인에게는 그 역할이 얼마간 행복한 일일 수 있지만, 인생의 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점쳐볼 20대에 그것이 제 삶의 전부인양 강제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성 역할을 떠나, 4년이라도 여자대학에서 인생의 주체적인 꿈을 점쳐보는 일이 여성에게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여자대학의 성별 분리를 유의미하게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 평생에 걸쳐 특정 방식으로 여성의 꿈을 다듬어온 사회다. 물론 그런 분리를 통해 어떤 의식이 성취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성 개인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은 궁극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제약들로 이루어진다. 그럴 때는 그 제약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노력들이 이따금 필요하다. 앞선 예처럼 여자대학의 성별 분리를 운명이 아닌 전략적이고 일시적인 경계로 사고하여, 그 의미와 효용을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정의내리는 일이 그렇다.
여자대학 공학 전환 반대 시위에 여자대학 출신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연대했다. 인생에서 4년만이라도 남성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팔릴’ 신세를 면해보는 것은, 그 필요의 측면에서 시스젠더 여성에 비해 트랜스젠더 여성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다 할 수 없다. 여자대학을 낳은 것은 여성을 비롯한 누군가를 특정 역할과 공간에 집요하게 몰아넣는 제도적 이성애다. 여자대학을 비롯하여 거기에 저항하기 위한 거점은 많을수록 좋고, 그곳에서 바깥으로 향한 천 개의 길이 열린다.
2024-1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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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정의는 즐겁지 않다
남 앞에서 옳은 말을 한창 떠들고 나면, 내 일상의 검박한 불행이 훅 낯설어질 때가 있다. 정의로운 말과 설명은 필요하지만, 그게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일은 드물다. 부디 지금보다 옳은 존재에게 사랑받고 싶어 감행하는 일들이지만, 그 사랑은 늦어도 너무 늦게 돌아 돌아 나에게 도달한다. 그 전까지 옳은 말들에 소요되는 마음의 힘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그걸 행복하지 않은 채로 오래 감당하는 일의 어려움을 생각한다.
입에 단 음식이 몸에도 좋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상에 그런 일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말과 행동이 즐겁기까지 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런 일은 세상에 아 드물게 존재한다. 남을 생각하고 그 남을 고려해 정의로워지는 일은 대체로 즐겁지 않고, 십중팔구 지금보다 좀더 불행해지는 일이다. 그 불행이 버겁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 뭐가 정의로운지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한다. 정의란 그 외면의 속내를 알고서 그것을 떠드는 일에 가깝고, 그래서 힘이 든다.
정의를 말하려던 사람은, 때로 내가 겪은 이 모든 걸 그저 남에게, 또는 새 시대에 방해가 되지 않게끔 적멸의 세계로 조용히 사라지게 하고픈 욕망에 휩싸인다. 정의로 인해 남과 나를 둘러싼 이 세계가 바뀌었으면 하는 기대는, 그저 이 세계가 지속되어도 좋다는 관성 앞에 종종 연약하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 때문에, 어떤 말들은 그 폐문의 욕망을 뚫고 비로소 어렵게 발화된다. 내가 겪은 일이 그저 즐겁고, 그걸 떠드는 일이 그저 즐거운 처지에서는 나오기 힘든 응축이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한 것이 갖는 긴장이 있다. 그 긴장을 뚫고 무언가를 말하는 힘은, 거기에 누가 함께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일에서 나온다. 내가 보고 겪은 걸 마음으로 따르는 일은 버겁지만, 반대로 그것을 외면하는 일은 마음에 부채가 되어 쌓인다. 마치 생전에 알던 어떤 이의 부고를 듣고 그것을 외면한 기억처럼. 그 사람이 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노고를 모르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경사는 몰라도 조사는 챙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고인의 빈소를 찾는다. 그곳에는 생전 고인과 관계를 맺은, 행복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도리를 다하고 사는 일을 생각한다. 행복하지 않은 눈으로 동료의 빈소를 들르고 모종의 이유로 빈소를 꾸리지 않은 동료의 장지를 따라가고, 행복하지 않은 손으로 추모제를 기획하고, 행복하지 않은 펜으로 그를 기리는 글을 쓴다. 기운이 나지 않는 채로 기운을 내어 눈앞의 일을 치르는 것이 세상살이의 반절이다. 행복하지 않은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함께 있다.
2024-10-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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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세상은 안전했을까
날마다 새로운 뉴스들이 세상을 덮는다. 유독 흉악한 것들이 적지 않고, 성과 관련한 범죄들은 특히 그렇다. 성범죄가, 딥페이크 포르노가 적발될 때마다 새삼 놀라고, 세상이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일이 벌어지기 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과연 무해했을까.
성 문제와 관련한 교육은 굳이 필요하지 않고, 가정에서 알아서들 가르칠 일이라는 생각들이 있다. 성을 꺼내어 말하는 일은 공연한 짓이고, 가만히 놔두면 원래 거기에 깔린 것이 잘 작동할 거라고, 특히 성 문제만큼은 그럴 것이라는 낙관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근거가 취약한 낙관이 세상 일 앞에 무너지는 일은 흔히 발생한다. 흉한 일을 마주했을 때 그 낙관의 내용이 뭐였는지를 캐묻는 일이 그래서 중요해진다.
페미니스트들이 포르노그래피를 문제삼은 이유는, 그걸 보는 모든 사람들의 분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포르노의 형식이 실제 성범죄의 형식과 지나치게 닮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교환 가능한 성적 대상으로 보는 습관이 그것이다. 무릇 사람과의 섹스는 아무나가 아니라 오직 그 사람과의 관계여야 하고, 설령 하룻밤 관계여도 눈앞의 상대가 나만큼 중한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섹스가 뉘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닌 협상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거기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의 얼굴과 몸이 자유로이 바뀌어도 상관없는 섹스를 추구하다보면, 실제 사람을 내 성욕을 위해 교환 가능한 물건으로 취급하는 일에 손쉽게 이끌린다. 딥페이크와 포르노를 관통하는 성욕의 원리가 거기에 있다. 더욱이 인간의 개별성이 거세된 성욕을 쉬이 추구하려면 상대뿐 아니라 나도 얼마간 인간이 아닌 편이 이롭고, 그것이 곧 남자다움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남을 편하게 사람 취급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거추장스런 사람임을 포기하는 일은 많은 폭력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희미한 낙관에 기대 혹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세상 사람들이 여태 성을 그럭저럭 잘 실천해온 까닭은 무엇이냐고. 이제껏 세상이 과연 성을 잘 실천해왔는가는 따져볼 문제지만, 얼마간 실제로 그러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 스스로 주어진 성 규범을 철썩같이 믿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내심 믿지 않고 살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세상이 말하는 남성성·여성성에 편승하기보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 집중하여 그 사람과의 관계를 새로 빚어나가고, 상대와 진지한 마음으로 협상에 임해온 양식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지금껏 이리 버텨올 수 있었다.
그러니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어째서 세상은 새삼 이토록 위험해졌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세상은 여태껏 누군가에게 용케 안전할 수 있었는지로. 세상은 특정한 누구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안전해야 한다.
2024-09-2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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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이성연애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한국에 처음 대두될 때,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들은 동성연애와 동성애를 서로 구분해서 썼다. 동성연애가 주로 같은 성의 사람들과 서로 쉬쉬하며 섹스하는 뜻이라면, 동성애는 그러한 성적 지향을 바탕으로 섹스를 포함한 삶의 양식을 둘이서라도 함께 터놓고 만들어나간다는 뜻이 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오랫동안 낙인찍힌 성적 지향을 추구할 때, 남에게서 온 낙인을 넘어 그들 스스로 관계와 규범을 새롭게 정의해 실천하겠다는 의지와 같고, 내 성(性)을 쉬쉬하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당당하게 통합된 형태로 대우하겠다는 다짐과 같다.
내 삶과 성을 서로 통합하는 문제는 비단 성소수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이 널리 금지되기에 자기 삶과 성의 통합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성애자는 반대로 자신의 성이 널리 장려되기에 자기 삶과 성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성이 제도화된 수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후자의 경우 내 삶에서 내 성과 성욕을 무작정 숨쉬듯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쉽다. 무언가 당연하다는 것은 곧 그 속의 무언가가 제대로 성찰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성애자에게도 삶과 성을 편히 분리해 실천하려는 유서깊은 관행들이 있다. 그러나 바람 피면 언젠가 걸린다는 속설처럼, 삶 안에서 서로 영영 섞이지 않을 부분이란 없다. 자기 삶에서 자기 성을 분리해 관리하겠다는 다짐은, 마치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을 숨긴 채 몰래 추구하겠다는 다짐과 비슷하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나의 일상 속 가장 후미진 성의 일이야말로 내 인격을 좌우한다. 그렇기에 그곳에서의 일에 대해 스스로 무언가 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 대책의 시작은 삶과 성을 따로 떼놓지 않고 묶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쟁점과 불화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의 결과는 나에게만 중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중요하다. 섹스란 기본적으로 남이 전제된 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남은 내 성욕의 전유물이 아니고, 섹스는 반드시 남과의 협상을 거쳐 치르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성적 권리의 실천은 곧 당연해보이던 내 성욕을 한번쯤 의심해보는 데서 시작한다. 성적 권리란 말은 있어도 성욕권이란 말은 없는 이유가 이러하다.
지인과 가족의 얼굴을 내 멋대로 포르노 영상에 덧입힌 사람들은, 아마도 상대를 평생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안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을 영영 남으로 대할 의사가 없는 인간만이 남을 포르노화한다. 그건 남과의 협상을 기본으로 하는 통상적인 성관계·인간관계의 문법과 전혀 다르다. 사람이 살인할 완력과 지능이 충분함에도 살인하지 않듯이, 사람은 딥페이크 포르노를 만들 충분한 역량이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이성애자는 이성연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024-08-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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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참음의 불평등
젠더·섹슈얼리티 이슈가 새롭게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또 뭐냐,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드느냐는 여론을 심심찮게 마주한다. 거기에는 내가 어디까지 너의 이야기를 참아야 되냐는 심정과, 이제 더 못 참겠으니 여기서 더 밀리면 안되고, 여기서 더 봐주면 안된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나에게 낯선 이슈를 앞으로 살면서 평생 대면해야 하고, 또한 남의 얼굴과 남의 일에 매번 마음을 여는 과업이 기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너를 더 이상은 못 참겠고 여기서 더 밀릴 수는 없다는 감각에는 그런 통상적인 일을 넘어서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 감각의 이면에는, 여태껏 썩 내키지는 않았는데 스스로 짐짓 정의로운 사람이기 위해 내가 당신의 낯선 이야기를 애써 참아왔다는, 즉 나로서는 참지 않아도 되었는데 여지껏 선심써서 참아‘주었다’는 뜻이 거기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그의 ‘참아줌’은 그에게 일종의 시혜이자 선심인 셈이고,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의 기본값은 연약한 교양에서 비롯된 참음보다 내가 금방이라도 돌아갈 수 있는 ‘참지 않음’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다. 훈련소의 조교나 아우슈비츠의 교도관처럼, 어떤 사람에게 전해질 환대를 언제라도 내 뜻대로 철회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막강한 위계에 올라앉아있다는 증거다.
참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안 참으면 그만인 것이야말로, 참는다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과 같다. 누군가가 이번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과연 참아‘줄까’ 말까를 고민할 때, 누군가는 세상을 참지 않는 선택지가 애초에 없는 채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과 남에게서 오는 부당함과 무례를 무던히도 참는다. 그러지 않고서는 삶을 살아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참는 것과 참아‘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남의 일, 남의 생각, 남의 서사, 남의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고통보다, 그걸 몸소 겪은 이들의 고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염치를 배우는 과정과 같다.
환대란 하해와 같은 선심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일지 말지 재는 것이 아니라, 그간 무던히도 참아왔던 누군가를 비로소 나와 같은 사회적 구성원으로 대접하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여지껏 누리고 있던 파이를 그들에게 쪼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초부터 마땅히 누리고 받아야 했을 몫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느끼는 참음이 다른 이들의 참음과 견주어 그것이 어떤 무게인가를 되짚는 감각이 요구된다. 남과 남의 일을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연약한 교양의 영역에 방치하지 않고, 여지껏 내가 차마 상상해보지 못한 것을 내 상상과 추체험의 영역으로 애써 끌어들이는 노력으로부터 환대는 시작된다.
2024-07-3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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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언어는 너무 비좁다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해서는 안된다는 합의에 애써 도달했다. 이는 그간 성폭력 문제에 힘써온 개인과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다. 성폭력은 한 사람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상대를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하는 대상화를 수반하고, 거기에는 어떤 여성들을 내 성욕 처리의 대상으로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남성중심적 교만이 깔려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미투 운동 이전에는 짐짓 그래도 되는 일로 치부되었던 사실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그 운동이 있기 전 사회는 그럼 어떠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전 시절의 언어란 어째서 그렇게 비좁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성폭력 가해자 관련 연구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다. 왠지 남자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혹은 이 여자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해자의 행동과 사고 패턴이 똑같다는 것이야말로,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속에 작동하는 남성성의 문제라는 증거다. 즉 성폭력 가해는 특정 사이코패스나 변태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남성성의 각본을 당연히 여기는 이를 통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성폭력을 특정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폭력이 해서는 안되는 일로 널리 알려진 후부터,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손절’이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손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오는 한편, 그것이 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손절’은 행형의 이념에도, 사회를 바꿀 변혁적 사법과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성폭력 가해에 대한 단죄와 처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선 피해자가 해원되고, 다음으로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교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양자 모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남성성 권력이 아니라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은, 지난날 페미니스트들이 누구보다 앞서 거부해온 일이다.
최근 고인이 된 성폭력 가해자를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성폭력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추모할 수 없다는 것과, 아무리 죄인이어도 그 죽음을 추모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팽팽하다. 한 사람의 궂긴 소식을 추모할 때 그 사람이 생전에 벌인 궂은 일은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히 가해 사실의 삭제로 이어지기 쉽다. 일본의 경우가 그렇듯이 있는 가해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이 문제의 해답은 피해자의 해원을 위해 고인의 가해 사실을 명백히 밝히는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사회적 경험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방식의 추모를 경험해온 일이 잘 없다. 그런 걸 보면 지금도 우리의 언어는 참으로 비좁다.
2024-07-0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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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감정의 거처
‘감정적’이라는 지적은 보통 낙인과 불명예를 의미한다. 그 때 그 사람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자기의 취약함을 드러내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협상력을 떨어뜨렸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그런 지적은 주로 사회적 약자·소수자에게 가해지고, 거기에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 더 우월한 처세이자 공적인 태도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감정이 많이 드는 일이고, 따라서 철두철미하게 감정에 관한 일이다.
누구더러 감정적이라는 말은, 자기들이 허락한 특정 경로로만 그 감정이 흐르게끔 바라는 의미를 깔고 있다. 남들의 감정이 내가 예측한 특정 방향으로만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이야말로 극도로 감정에 북받친 일이다. 누군가가 특별히 감정적이라는 것은 그걸 지적하는 내가 상대적으로 덜 감정적이라는 뜻인데, 위에서 보았듯이 감정을 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남을 지적할 정도로 충천한 그 감정이 적당한 거처를 못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체제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그렇게 느껴야만 하는 공식을 정해두고 그것을 공적인 것으로 만든 다음 나머지 것들에게 ‘감정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식이다. 그렇게 유도된 감정들이 한번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기에 이내 내 것이 된다. 체제가 인정한 공적인 감정과 ‘감정적’ 딱지가 붙은 감정 사이의 경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된다. 하지만 체제에 의해 허락되어 거기에 뭐가 있는지 스스로 성찰되지 않은 감정이야말로, 때로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 ‘감정적’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내 것으로 여겨지듯이, 그렇게 한번 안팎으로 허가된 감정은 보통 감정적인 것으로 도드라져 인식되기 어렵다. 그것을 성찰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감정적이지 않은 체하는 것들의 감정을 주의깊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가령 힘세고 공적인 조직 속 일처리가 실은 더 은밀하게 사적이고 감정적인 경우들을 주위에서 본다.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감정을 잘 제어하는 듯한 이들은, 정작 중요한 결정과 정보 전달은 조직 내 특정 사람들이 배제된 담배타임이나 회식 자리에서 덜컥 해버리고는 한다.
공적인 의사표명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적절한 거처에 잘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모든 감정이 그 자체로 정당하거나, 그것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적절한 모양과 거처를 찾기 이전에, 내가 어떤 것에 왜 이토록 반응하는지를 알려주는 첫 단초로서 감정은 중요하다. 이 감정이 왜 드는지 살피고 이것이 혹여 남과 세계를 부당하게 추상화하는 데로 나아가진 않는지 경계하면서, 그 감정이 출발한 자리에 초라하게 선 나를 돌보고 그것을 적절한 거처로 향하게 하는 것, 거기에 우리가 갈고 닦을 보물이 있다.
2024-06-05 [1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