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3) 보도연맹 희생자가족 송철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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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 되는그날까지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한국전쟁 동안 발생한 양민학살 중 가장 큰 피해를 낸 보도연맹(이하 보련) 사건.

서울과 경기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학살이 자행돼 그 피해자수는 최고 30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학계와 재야단체는 추산하고 있다.

특히 학살의 피해자가 명목상으론 이미 "전향한 좌익"이었고 그 대다수가 양식을 배급받기 위해 도장을 찍었던 무지한 양민들이었기에 그처럼 무참히 학살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항상 망령처럼 따라다니는 "빨갱이"이라는 수식어 하나 때문에 이 사건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땅속에 묻혀 있다.정부는 학살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기다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장본인이나 생존자 혹은 목격자도 70~80대 고령에 이르러 이른 시일내에 진실규명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영원한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당시 동래 지역에 거주하다 이 사건에 휘말려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송철순(68.부산 해운대구 재송2동)씨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이러한 의미에서 소중한 역사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악몽에 몸부림치고 있는 그의 생생한 기억은 보련사건의 잔혹성과 그 피해규모를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보련에 연루돼 학살당한 피해자 수는 당시 내가 살고 있던 동래지역에서만 340여명에 달했습니다.물론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겠죠."

1950년 7월 어느날 아침,송씨의 아버지(송경희.당시 43세)는 보련원 소집이 있다며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 자금원이었던 "일성관"을 동래에 건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것이 좌익으로 낙인 찍히는 빌미가 됐다.

당시 18세였던 송씨 자신도 며칠 뒤 "집안에 무기를 감춰둔 혐의가 있다"며 경찰에 체포돼 동래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그곳에서 그는 길 건너편 소방서 건물에 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사람 200여명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모두가 보련원이었다.

"매일 자정때가 되면 유치장앞에 "스리쿼터"(적재량이 4분의 3톤인 트럭의 일종)가 왔습니다.곡괭이,삽 등을 싣는지 금속성 소리가 들렸고 이내 주민 6~7명이 철사에 손목이 묶여 끌려나갔죠."오늘밤은 혹시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면서 20여일간을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어느날 끌려간 뒤 목숨을 잃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있던 한 경찰관이 몰래 빼내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이후 부산일보사에 입사했다.부산일보 사회부 동래지역 출입기자 시절이었던 1960년 9월 "동래지역 유족회"를 결성하고 피해조사에 들어갔다.그 결과 주민 340여명이 학살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그는 학살 당시 동래지역에 근무했던 경찰관들을 수개월간 쫓아다니며 장소만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 결과 금정구 회동수원지 입구,동래컨트리클럽,반송동 운봉산,철마면,정관면 등 암매장지 4곳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인부 4명을 데리고 발굴작업에 나선 그는 동래컨트리클럽에서 120구,회동수원지서 34구 등 모두 197구의 유골을 찾아냈다.

"매장된지 10년이나 지나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었습니다.대퇴부 뼈 2개를 한 사람으로 쳐 계산을 해야 했죠.특히 회동수원지 근처에서는 창이 꽂혀있는 두개골이 나와 얼마나 참혹하게 학살이 자행됐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도장,가죽지갑 등 유품이 발견돼 일부는 신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아버지의 마을 친구 12명의 이름도 있었다.

그는 국회에 청원,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인 200만원을 지원받아 연제구 거제4동 화지산 8푼 능선에 합동분묘를 만들고 높이 4m의 위령비도 세웠다.합법적으로 치러진 이날 위령제에는 유족 400여명이 참석했으며 모두들 "명예라도 회복된게 어디냐"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상황은 돌변하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5.16"이 터졌고 그의 행위는 오히려 특별조치법상 "반국가행위"로 변질돼 3년7개월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물론 거제동 합동분묘는 파헤쳐져 유골은 불살라졌고 위령비도 사흘동안 가루로 만들어져 거제동 철길에 뿌려졌다.

경찰은 그의 집 천장까지 뜯어내며 이잡듯 수색,유골발굴 과정을 찍어 두었던 사진 160여장과 피학살자 명단 등 관련 서류 일체를 빼앗아 갔다.

그 모두가 보련사건의 직접적인 물증들이었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언론조차 당시 사회 분위기에 밀려 외면하고 말았다.

""5.16"만 없었다면 이 사건은 지금처럼 왜곡되고 은폐되지는 않았을 겁니다.보련 피해자들은 군부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작에 의해 결국 두번 학살되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죠."

그는 "고희"를 내다보는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호주상속을 받지 않고 있다.

"정부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해 줄 때까지는 상속받을 생각이 없습니다.지금 위암수술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지만 진상이 규명되는 그날까지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그는 요즘 30대 나이만 돼도 "보도연맹"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세태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더욱 조급하다.

"불과 10년만 지나보세요.이렇게 증언해줄 사람조차 없을 겁니다.결국 역사의 그늘에 묻혀 이 사건은 영원히 잊히고 말겠죠."

그는 미약하나마 사회적 관심이 일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이 무덤의 사연을 후세에 전해주구려,".송씨는 거제동 합동묘지 위령비 뒷면에 새겨져 있던 시구절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기진기자 kkj99@p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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