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발 불길속에 핀 꽃 이야기] <4> 막사발이 찻잔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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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박하면서도 당당한 풍취, 日 무사들 반하다

오다 노부나가가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실증품 시바다이도. 4단의 강한 손자국이 특징인 이 찻잔은 비파색을 기본 색조로 흰빛, 붉은 기운에 푸른 기운이 감돈다. 높이 7.1 , 지름 14.3 , 무게 280g 크기. 근진(根津)미술관 소장의 중요문화재이다.

 ‘막사발’의 ‘막’은 ‘마구’의 준말이다.‘앞뒤 헤아리지 않고 닥치는대로,되는대로,아무렇게나,함부로’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막가다,막걸리,막깎기,막일,막말,막되다,막벌이꾼,막살이,막잡이 등이 그런 뜻으로 쓰이는 말들이다.막사발도 이 말들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그릇이라고 자리매김 된 것 같다.

 막사발이란 말은 도자기를 종류별로 분류하여 붙인 고유한 명칭이 아니라 그릇을 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명칭으로 보인다.청자,백자,분청사기처럼 고유한 명칭과 용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면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그릇들에 붙인 말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새것일 때는 밥이나 국을 담는 그릇이다가 오래되어 때가 묻고 금이 가면 막걸리잔으로 쓰이고,더 험해지면 개밥그릇이 되었다가 깨어져 흙에 파묻히는 서민들의 생활 잡기들을 통칭할 때 막사발,막그릇,막잡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청자,백자,분청사기가 그 시대 지배계층의 문화였다면 막사발은 하층민들의 저급문화를 상징하는 그릇이었다.


하층민 저급문화 상징

 일본의 이도차완 연구자들은 막사발이 16세기 이전 조선 하층민들의 밥그릇이었다고 단정한다.한국 연구자들도 전적으로 일본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막사발의 용도가 과연 그러했는지 여부는 다른 기회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여기서는 먼저 일본과 한국의 통설에 따라 막사발이 어떤 연유로 일본 무사들의 찻잔이 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막사발이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다른 여러 종류의 사발들과 함께 고려차완(高麗茶碗)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면서 일본 무사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15세기부터였다.

 일본 무사들에게 15세기는 권력과 조직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번영의 세기였다.새로운 힘의 원천은 차문화(茶文化)에서 비롯되었다.시대적 조류로서 일본 사회 전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던 차문화를 바라보던 무사들은 차문화가 지닌 새롭고 놀라운 많은 가능성들을 신속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도 막사발은 다인들 사이에서 매우 진귀하고 비싼 값으로 거래되고 있었지만 아직 이도차완(井戶茶碗)이란 명칭은 생겨나지 않은채 여전히 고려차완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일본에 차 마시는 풍습이 전해진 것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초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서였다.1191년 중국으로부터 차나무 묘목이 들어와 각지에서 차가 재배되기 시작한 뒤로 차는 사원(寺院)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무사들은 차문화를 정치 책략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책략의 효과를 가장 높여준 것은 고려차완 중에서도 조선막사발이었다.

 이같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된 최초의 실증품은 시바다이도(柴田井戶)였다.은은한 푸른 빛깔이 느껴지는 아오이도(靑井戶)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찻잔이다.

 이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정략적 차원에서 가장 막강한 적대세력이었던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1522∼1583)를 회유할 목적으로 선물했던 막사발이다.노부나가의 이 책략은 성공했다.노부나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시바다의 군대를 복속시켰다.


전략적 흥정물로 이용

 이 사건은 이도차완의 유행을 촉발시키면서 견인차 역할을 한 유명한 역사를 남겼다.시바타 가쓰이에는 일약 유명해졌으며 오다 노부나가 역시 무사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책략가이자 세도가라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이후로 오다 노부나가는 당나라 찻잔과 고려차완을 전략적 포상이나 흥정물로 곧잘 이용했다.그의 이같은 책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전수되어 고려차완과 이도차완의 가치는 높아지기만 했다.

 이도차완을 특별하게 애호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서 포상이나 다른 명분으로 찻잔 하나를 하사받은 다이묘는 그 찻잔이 지닌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다이묘가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게되면 문제의 찻잔을 적 앞에다 내보였다.히데요시와의 동맹국임을 표시하는 증표로 삼아 상대를 위협했고,상대는 공격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자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도차완에 광적인 집착

 이때부터 모든 다이묘들은 위정자와 친교를 트기 위하여 차문화에 몰입해갔다.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급격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이도차완이다.이도차완이란 이름도 이 무렵부터 생겨나 그때까지 통칭된 고려차완과 구별되었다.

 무사들이 중국 찻잔이나 고려의 찻잔,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사발들을 제쳐놓고 이도차완에 광적인 집착을 하게된 데는 몇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이유는 농차(濃茶)의 유행과 관련된 것이다.

 농차는 한잔의 차로 여러 명의 초대된 손님이 돌려가며 마시는 차법(茶法)을 말한다.예를 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차회(茶會)를 열어 수십명의 무사들을 초대해 놓고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차를 끓여낸다.찻잔에다 차를 부어 히데요시가 먼저 한 모금을 마신 뒤 옆에 있는 무사에게 넘긴다.초대된 무사들은 차례로 한 모금씩 차를 마신다.

 히데요시가 먼저 차를 마시는 것은 그 차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신뢰의 표시이다.차문화가 보급되던 초기에는 차회를 이용하여 상대를 독살하는 일이 빈번했고 따라서 차회에 초대받는 일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한 잔의 차로 여러 명의 무사들이 돌려 마시는 음다법은 신뢰를 바탕으로 무사들의 결속을 다지는 결과를 만들어갔다.무사들은 자주 차회를 열어 서로 연대감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차회 때마다 새로운 찻잔이 선을 보이고,찻잔을 감상하는 안목은 높아갔다.이와 같은 농차 음다법에는 찻잔의 형태나 크기에 있어 기존의 중국 천목(天目)차완이나 고려차완보다는 이도차완이 훨씬 잘 어울렸다.

 이도차완과 농차가 무사계급의 차문화를 이끄는 두 개의 축으로 자리잡게 만든 것은 센노 리큐에 의해 집대성된 와비차의 영향이었다.

 와비차는 외면의 겉치레와 탐욕적인 광채,권위적인 넓고 큰 공간보다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내면화와 고요한 정신적 세계를 중시했다.화려한 것을 억제하고 물질적·향락적으로 변질되려는 일본다도를 혁신시켰다.


돌려가며 차마시기 안성맞춤

 부족함과 진중함,청순함과 질박함을 존중하는 차도였다.쇼안(草庵)이라고 하는 차실은 서원 형식의 넓고,크고,높은 집에서 유행해온 기존 다도 형식을 압축시킨 것으로서,다다미 4조 반 크기의 차실을 3조,2조 반으로 줄이고 다시 1조 반으로까지 응축시켜서 와비다도의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기와를 얹던 지붕에는 볏짚의 이엉을 덮었고,벽면은 부드러운 흙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으며,작은 창문과 툇마루,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의 담백한 처리는 흡사 조선시대 청빈한 선비의 사랑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차실에서는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의 극치를 이룬 당나라 천목차완이나 고려 청자차완보다는 무기교 무작위의 자연미를 은은하게 풍기는 이도차완이 제격일 수밖에 없었다.무사들은 질박하면서도 당당한 풍취를 지닌 이도차완에 몰입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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