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발]<17>막사발이라 부르는 이유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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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차완은 '막쓰는 그릇'이 아니었다

균형 잡힌 형태,정연한 색조,굽 주변에 꿈틀거리는 매화피의 모습으로 한 여름날 무르익는 자연 경관을 떠올리게 하는 도코나쓰이도.이 명품을 감히 막사발이라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높이 8.7 ,구경 14.9 .개인 소장.

일본 차인들로부터 천하명품으로

칭송받는 이도차완을 두고

한국 사람들은 '막사발'이라 부른다.

이 호칭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무릇 미물이든 하찮은 물건이든

이름 없는 것을 하늘은

내지 않았다는 점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겨 보면 새삼 부끄럽다.

왜냐하면 옛 사람이

만들어 남긴 그릇의 이름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도차완을 두고

막걸리잔이니 개밥그릇이었느니

품격을 깎아내리고,

한국 도처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던 것을

일본인들이 가져다가

숭배하고 있다느니 하는 데까지 이르면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그런 태도는문화적 우월감이나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선 민족주의 감정도 아닌 역사의 무지와 이성적으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우매함일 뿐이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도차완이 지난날 당대 지배층들의 무덤에서 출토된다고 여기는 점이다.과연 그럴까?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죽은자의 무덤 속에 부장품을 넣는 장례 습속은 6세기 신라 지증왕의 순장금지령(殉葬禁止令) 이후부터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는 박장(薄葬)으로 변했다고 한다.

인지의 발달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을 변화시켰고,무엇보다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는 현실성 중시로 장례 문화가 바뀌었다고 한다.

웬만한 지배층의 무덤이라면 청동 숟가락과 젓가락,술병 하나,술잔과 밥그릇 한 개 정도가 부장품의 전부라고 한다.이도차완의 제작 시기로 추정하는 14~16세기는 성리학이 지배층의 철학으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따라서 사후 세계와 관련하여 부장품을 넣는 낡은 습속을 따르는 사대부는 없었다.이같은 역사를 무시한 채 이도차완이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느니,출토되고 있다느니 하는 말은 전혀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막사발'과 '이도차완'은 역사적으로나 제작 사용된 시기에 있어서 전혀 다른 물건이다.

이 막사발은 조선백자의 변천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조선백자의 변천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에 해당되는 1392~1600년 무렵은 조선백자가 완성되는 시기였다.조선상감백자가 극치를 이루다가 소멸되면서 초기 청화백자가 나타나는 시기다.

중기는 1600~1751년으로 회백자,철화백자가 나타나고 청화백자가 번창했던 시기다.

후기는 1752~1883년으로 흔히 분원리(分院里) 시대라 부른다.백자가 대중화하고 진사백자가 나타나는 시기다.청화백자의 후기에 해당되어 질이 떨어지는 청화백자가 대량 생산된다.

말기는 1884~1945년을 일컫는다.분원(分院)이 민영화해 근대적인 공장 생산 체제로 변했다.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국내로 대거 유입되면서 현대도자기로 변화되었다.

'막사발'이라 부르는 저질 잡기가 대량생산된 것은 조선백자의 후기와 말기였다.이같은 변화가 나타난 것은 1600년께부터 시작된 중기부터다.7년 동안 계속된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의 사회 경제적 토대가 크게 훼손되고 문란해진데다 고급 도자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납치되었기 때문에 전쟁 후 조선 도자기 기술은 극단적인 정체에 빠졌다.

16세기 조선 도자기 제작 기술은 세계 첨단이었다.고려 때부터 축적되어온 고급 기술을 전수한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납치되고나자 조선의 도자기는 급격하게 품질이 떨어졌다.

17세기 들어 또다시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게되자 조선의 도자 기술은 거의 정체되어 낙후하기 시작했다.

도자기 생산을 주도하는 국가 제도는 문란했다.거친 재료,즉 태토와 유약에 대한 식견의 부족,서툰 물레질로 인한 기물의 불완전성,무엇보다 불을 다스리는 경험 부족 등이 총체적으로 누적되어 저질 백자 제품들이 생산되었다.

그런데다 국가 경제 토대의 취약함을 들어 고급 도자기 제작과 유통을 금지시킨 정책은 고급 기술의 발전을 막아버렸다.

그러자 부호들은 중국과 일본의 고급 도자기를 사들여 사치욕을 채우기 시작했고,외국 고급 도자기의 유행은 국내 도자기 기술을 퇴조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17, 18세기에도 계속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자 도자 기술의 낙후성은 조선후기 백자의 퇴조로 이어졌다.

19세기에 들어와 백자의 형태,무늬,기법의 다양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릇의 전체적인 격조는 형편없이 떨어졌다.이같은 변질은 조선 말기 유일한 관영수공업체였던 분원의 변질에서 비롯되었다.분원들은 차츰 민영화되었다.재력있는 상인들이 사기장들에게 자본을 제공하여 가마의 운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상인들은 서서히 가마와 사기장을 사유화해 나갔다.

사기장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자본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자본가는 큰 힘 들이지 않고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가마와 도자 기술자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자본가들은 서로 우수한 사기장을 꾀어 가고 좋은 백토를 골라 가서 오로지 이익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가마는 더 이상 명품 도자기를 빚지 않았다.다만 이익이 많이 남는 저질 생활 잡기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저질 생활 잡기들을 사용한 것은 민중들이었다.

민중들이 도자기를 생활 그릇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7~18세기 조선 사회제도의 변화와 함께 진행된 신분질서의 붕괴가 가져온 문화였다.

일본과의 7년 전쟁에 뒤이은 청국의 두 번에 걸친 침략 전쟁으로 조선의 사회제도는 회복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었다.오랜 전란으로 초토화한 조선을 실제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왕이나 사대부,부호들이 아니라 농민 등 하층민들이었다.

특히 노비들과 천민들,자기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이나 경작 규모가 작은 농민들,재력과 인맥을 구축한 중인(中人)들과 조선의 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지식인 계층들은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신분 질서의 혁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도도한 신분 질서의 변동 기류 속에서 이제껏 제대로 만들어진 밥그릇 하나 가질 수 없었던 농민과 천민들은 상당한 값을 주고서라도 밥그릇을 사게 되었다.

그런 변화가 있기 전에는 박으로 만든 박바가지나 질그릇이 고작이었다.

흥부전의 흥부와 제비,제비가 몰고온 박씨와 주렁주렁 매달리는 박덩어리,박을 톱질하는 흥부 얘기는 곧 신분질서의 붕괴가 있기 이전 조선 농민들이 애용해온 생활 그릇의 역사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바가지에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 숟가락,그것이 곧 17세기 이전 조선 민중들의 생활 그릇 전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19세기 이후 조잡하게 대량 생산된 생활 잡기들이 다름 아닌 막백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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