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세상 읽기] 13. 실존주의 문학의 금자탑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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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가득한 운명의 해법… 오직 ‘반항’뿐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서 프랑스의 인종 차별과 제국주의적 오만을 고발한다. 부산일보DB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서 프랑스의 인종 차별과 제국주의적 오만을 고발한다. 부산일보DB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 모른다”는 첫 문장은 ‘폭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파탄 난 가족관계를 단 한 줄로 집약했기 때문이다. ‘태양 때문에’ 아랍인에 권총을 쐈다는 주인공 뫼르소의 최후진술은 거센 비판을 양산했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 양측 모두에 알레르기를 일으켰으니 소설 〈이방인〉의 운명은 제목을 따랐나 보다.

노벨상 수상… 제국주의적 시각 비판 많아

아랍인 살인, 재판 부조리·인종차별 부각

총 쏜 것은 오이디푸스적 친부 살해 욕망

중용적 인식 탁월한 행동하는 지식인상 보여

작가인 알베르 카뮈도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1957년 44세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났고 고등사범학교(ENS)의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그는 파리의 나그네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작품이 나온 1946년에 주인공 뫼르소가 던진 충격파는 격심했다. 어떤 일에도 무심하고 무감각한 캐릭터는 사이코패스라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모친을 묻은 다음 날 바닷가에서 만난 여인과 정사를 치르고 따가운 햇볕 탓에 사람을 죽이는 행적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인생과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해하는 대상이 왜 아랍인인지 인종차별의 눈총까지 보내게 된다.

그런데 〈이방인〉의 진가는 후반부에 있다. 뫼르소의 재판 과정에서 폭로되는 부조리가 겹겹이다. 검사는 사건과 무관한 사람을 증인으로 신청한다. 아랍인을 죽인 것은 사소한 사건이기에 무난하게 종결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장례식 전후로 보여준 행실과 무신론적 태도가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든다. 눈물도 안 흘리고 모친의 나이도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변호사가 살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로 기소가 된 것이냐고 항변하지만 별무신통이다. 카뮈는 문명사회가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고안한 재판 제도조차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준다. 재판 결과는 사실(fact)에 법규(rule)를 적용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제기하는 자극(stimulus)과 판관의 인성(personality)이 좌우한다는 지적도 음미할 만하다.

뫼르소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

프랑스 루르마랭 공동묘지에 있는 카뮈의 무덤. 프랑스 루르마랭 공동묘지에 있는 카뮈의 무덤.

왜 뫼르소는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을까. 피고인인 그는 재판 내내 관객으로 일관하면서 변호를 포기한다. 프랑스는 단두대 사형을 1977년까지 집행한 나라다. 광장에서 목이 잘릴 것을 감수할 만큼 생(生)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죽음을 선고받았지만 잊은 채 살아가는 사형수다. 반면 뫼르소는 어차피 죽을 바에야 언제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죽음의 부조리를 깨닫지 못하는 구경꾼이 더 많이 와서 자신의 사형을 더 부조리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등장 인물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면 뫼르소는 오이디푸스가 된다. 뫼르소를 프랑스어로 풀면 바다(Mer)+태양(Soleil)이다. 칼날처럼 이마를 쑤시는 햇빛은 아버지다. 바다는 어머니(Mere)와 발음이 같다. 그가 바닷가에 간 것은 어머니의 품으로 회귀하려는 무의식적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총을 쏜 것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땀과 태양을 떨쳐버리려’, 즉 친부 살해 욕망의 변형이다. 따라서 뫼르소가 순순히 사형을 수용한 것도 부친 살해와 모친 사랑에 대한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논란을 부른 아랍인 살해 사건도 알제리에서 자란 카뮈가 프랑스의 인종 차별을 고발하는 장치로서 배치한 듯하다. 명백한 살인자지만 본국인이기에 용서만 빌었다면 사건은 유야무야됐을 것이다. 인종주의적 편견과 제국주의적 오만이 체질화된 프랑스 법률 엘리트의 ‘사법 농단’에 보내는 야유가 가득하다.

운명은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

아무튼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죽이게 된 결과는 부조리 그 자체다. 카뮈에게 모든 길은 부조리로 와서 부조리로부터 나아간다. 세상은 모순 투성이고 모든 것이 우연으로 이루어질 뿐이지만 인간은 합리적 의미와 질서를 추구한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면서 뒤섞이는 부조리는 숙명적이다.

과연 피할 길은 없을까. 그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답변을 내놓았다. 비합리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이 선택할 삶의 길은 세 가지다. 우선 자살이다. 부조리한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단념하고 부정하는 길이기에 해답이 못 된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종교는 피안을 바라보며 살게 해준다. 그러니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는 단절된다. 그렇다면? 반항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인간과 세계 사이에 놓인 부조리를 응시하면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인식으로 소멸되고 멸시로써 극복되지 않는 운명’은 없기 때문에 그 순간 삶의 의미와 목적은 스스로 창조된다. 희망 없는 일상을 판결받은 인간도 자신의 의지로 감연히 살아갈 때 다시는 자살을 꿈꾸지 않게 된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운명은 단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카뮈의 반항인은 어른이다. 신이나 사회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모든 것을 떠안고 패거리를 거부한다. 실제 레지스탕스로 활약한 그는 대독 협력자들에 대한 집단 보복을 반대하고 알제리 민족해방투쟁을 옹호하지 않아서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반공 노선을 거부했지만, 사회주의도 비판했다. ‘어떤 현실도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고 어떤 합리도 전적으로 현실적이지 않다’는 그의 중용적 인식은 적폐 청산과 국정 농단을 놓고 극단적 대립이 펼쳐지는 한국 사회에 참으로 유효한 가르침이다. 정의와 절제, 단죄와 관용을 조화시키면서 고독하나 의연했던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지식인의 전범이다. 카뮈는 불과 47세에 교통사고로 숨졌다. 평소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부조리한 죽음은 없다고 말했던 그다운 최후였다.


정승민


교양 팟캐스트 ‘일당백’ 운영자


※이번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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