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맛집’ 무려 4km… 경남 밀양 초동 연가길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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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와 억새 만발한 밀양시 초동면 연가길
산책로 꽃밭 곳곳에 사슴 조형물·그네 등 볼거리
큰 나무 아래 ‘멍타정’에서 멍하니 앉아 쉴 수도

사슴 조형물이 초동연가길의 코스모스 꽃밭에 서 있다. 사슴 조형물이 초동연가길의 코스모스 꽃밭에 서 있다.

경남 밀양은 고향이라서 나름대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세상에 이런 놀라운 곳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깨 서 말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고소한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그야말로 ‘슬로우 여행’을 즐겼다. 정말 모르고 있었던 고향의 비밀 장소에서.



■벼 익는 들판과 코스모스

들판의 벼는 조금씩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차에서 내려 잠시 벼 이삭을 만져본다. 알갱이는 완전히 익지 않아 약간 말랑하다. 이삭이 완전히 여물기 전에 비가 자주 오면 썩어 흉년이 든다는데 이제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벼가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논 길 사이로 이리저리 이동하는 사이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비밀의 공간으로 안내하는 것처럼 이색적인 길을 일러준다. 지시를 따라 들어가자 다시 들판이 이어지고 들판 너머로 둑이 보인다.

들판이 끝날 무렵 ‘초동연가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정식 지명은 경남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 연가길이지만 그냥 줄여서 초동연가길이라고 부른다. 초동연가길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다. 2015년에 ‘밀양시 작은 성장 동력사업’으로 조성됐다. 짧은 기간이지만 봄에는 꽃양귀비,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억새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자동차 서너 대가 입구 쪽 둑 위에 서 있다. 둑을 따라 안으로 쭉 들어가면 너른 주차장도 있다. 하지만 주차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한다. 둑을 따라 걸으면서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와 백일홍 뒤로 바라보이는 들판 풍경이 기막힐 정도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주홍색, 하얀색, 분홍색 꽃 뒤로 약간 서서히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들판이 보이고 그 뒤로는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이어진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코스모스와 들판을 바라본다. 아주 약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움직이는 것은 하늘거리는 꽃과 풍경을 구경하러 온 사람뿐이다. 몸은 시원해지고 마음은 편안해지고 가슴은 안온해진다.


■끝없이 이어진 꽃길

주차장을 지나자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 나타난다. 학교 동창으로 보이는 60대 여성 10여 명이 자리를 깔고 앉아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아들 결혼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벌써 아이를 낳은 딸 이야기까지 대화는 끊어질 줄 모른다.

여성들이 신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 뒤로 코스모스 꽃밭이 보인다. 꽃밭에는 소풍 나온 유치원 어린이들이 들어가 신나게 놀고 있다. 며칠 전에 초동연가길 코스모스 축제가 열렸을 때 많은 사람이 꽃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바람에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예쁘장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꽃밭 한쪽 구석에 사슴 두 마리가 서 있다. 초동면의 한지공예, 매듭공예, 닥종이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만든 사슴이다. 사진 동호회 회원으로 보이는 사람 여러 명이 사슴은 물론 꽃밭 곳곳에 설치된 시설물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꽃길을 걸어 다니는 관람객은 저도 모르게 작가들의 작품 등장인물이 된다.

초동연가길의 특징은 코스모스가 한곳에 집중적으로 모인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곳은 느긋하게 꽤 오랫동안 가을 햇살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다. 총 길이가 무려 4km에 이른다. 입구부터 반환점까지 가서 돌아오려면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관람객들은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한쪽 구석에 그네 세 개가 설치돼 있다. 걷는 데 지친 사람은 그곳에 앉아 쉬면서 그네를 탈 수도 있다. 그네에 앉아 사진을 찍으면 제법 좋은 그림을 만들지도 모른다.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계속 걷는 한 어르신의 휴대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김상희 씨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이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초동연가길의 코스모스 꽃길은 김상희 씨의 노래 가사를 들으면 연상할 수 있는 풍경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다녀올 때면 가을마다 길가에 피어난 코스모스 꽃을 보면서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던 생각이 나는 풍경이다. 물론 지금은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서 코스모스를 볼 수 없다. 이곳처럼 도시 바깥으로 나와야 겨우 눈에 담을 수 있다.


멍타정의 나무 아래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 멍타정의 나무 아래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

■멍타정에서 멍 때리기

초동연가길은 청도천 가동보, 학포 초화원까지 연결돼 있다. 그곳에 있는 반환점을 돌면 습지데크가 나타나고 반월습지를 따라 다시 입구로 돌아올 수 있다. 많이 걷기가 힘들다면 개말쉼터를 지나 멍타정에서 돌아와도 된다. 그곳까지는 20~30분 정도 거리여서 그렇게 힘들지 않다.

돌아올 때에는 멍타정에서 잠시 쉬는 게 좋다. 멍타정은 이름 그대로 ‘멍을 때리는’ 곳이다. 반월습지를 바라볼 수 있는 너른 잔디밭 위에 가지가 넓게 펼쳐져 너른 그늘을 펼친 큰 나무가 서 있다. 나무 아래에 깔끔한 벤치 세 개가 놓여 있다. 이곳에 앉아서 태곳적에 만들어져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반월습지를 보면서 멍을 때리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이미 한 부부가 강아지 두 마리를 안고 멍을 때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고 그냥 한 마리씩 안은 강아지 머리만 쓰다듬는다. 이런 곳이라면 10분이 아니라 한 시간, 한 나절이라도 멍을 때리면서 앉아 있을 수 있다. 물과 음식만 있다면.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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