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국민연금 ‘더 내고 덜 받는’ 것이 능사?
연금재정계산위원회 최근 개혁 밑그림 제시
기금 고갈 우려에 “더 내고 덜 받아야” 주장
韓 노인빈곤율 1위… 수령액 줄면 생존 위기
현 세대·미래 세대 모두 보듬을 묘책 절실
1998년 ‘017 패밀리 요금제’라는 상품이 출시됐다. 지금은 SK텔레콤에 합병된 신세기통신의 휴대폰 요금제로, 기본요금만 내면 미리 지정한 2~4명 간의 통화가 무제한 무료였다. 통화시간 당 요금을 매기던 시절 통화량이 많은 커플에겐 너무나 ‘혜자’스런 요금제였고, 순식간에 가입자 44만 명을 돌파했다. 정작 회사 입장에선 수익은 없고 통신회선 부하만 일으키는 애물단지였다는 것은 아이러니. 결국 요금제는 출시 6개월 만에 폐지됐다. 허나 기존 가입자의 혜택마저 중단할 순 없었다. 회사는 이들을 다른 요금제로 유도하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체로 허사였다. 가입자들은 길게는 10년 넘게 번호를 유지하며 공짜 혜택을 누렸다. 심지어 웃돈(100만 원을 상회했다는 소문이다)을 주고 해당 전화번호를 사고파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른바 계약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무릇 아무리 대기업이 애를 써도 쉽게 무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세상엔 그렇지 않은 계약도 있다. 국민연금이다. 최근 정부는 국민연금 개혁의 칼을 뽑았다. 개혁이라는 것이 결국 계약자와의 계약사항을 변경하는 것. 그런데 새 계약자부터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계약자도 변경 사항을 그대로 적용받는다. ‘국민’연금이라 이름 붙였지만 정작 국민들 자유의지로 맺은 계약이 아니다보니, 계약사항이 변해도 그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달 초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재정계산위원회가 연금 개혁안을 제시했다. 핵심은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15%로 올리고, 현재 63세인 연금 받는 나이를 68세까지 단계적으로 늦추자는 내용이다. 쉽게 말해 가입자에게 ‘지금보다 더 내고, 지금보다 덜 받아가라’는 뜻이다. 현행대로라면 수십 년 후 기금 잔고가 거덜나고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이 된다니, 괜한 투정을 부렸다간 나만 제 잇속만 차리는 만무방이 될 분위기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탐탁지 않다. 꼭 기자만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소득대체율 인상(쉽게 말해 덜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받자는 거다)을 요구하며 국민연금재정계산위원회를 사퇴하는 위원들까지 나왔다.
국민연금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다만 ‘곳간이 비어가니 더 내고 덜 가져가라’는 식의 단순 해법을 과연 ‘개혁’이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재정이 뭔지 모르는 이 무지렁이 기자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테다. 무엇보다 노인들에게 무조건 (연금수령액을) 덜 받아가라고 하기에 현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 2020년 기준 한국 노인빈곤율(40.4%)은 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다. 노인 10명 중 4명은 미래 세대를 걱정할 여력조차 없다.
과연 우리는 많이 받고 있는가. 한국의 노인 인구 비중은 전체 인구의 20% 수준. 그들에게 지급되는 국민연금 지출액은 고작 GDP의 1.4%에 그친다. 유럽의 경우 노인 인구 비중은 약 18%이지만, 그들을 위한 공적연금 규모는 GDP의 11%에 달한다. 물론 국민연금 외 노인 복지 예산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걸 포함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런데 허리띠를 졸라매라 하는 쪽은 오히려 한국이다. 나라마다 주머니 사정이 다른데 똑같이 비교할 수 있냐고? 누구 주머니 사정이 더 안 좋을까. 한국의 국민연금 기금 규모는 역시 GDP 대비 OECD 회원국 중 1위다. GDP의 절반에 가까운(48%) 돈을 기금으로 운용한다. 참고로 GDP 대비 10% 이상 기금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겨우 7개국 정도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도대체 다른 나라는 어떻게 국민연금을 유지하는가. 이달 초 위원회를 사퇴한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남찬섭 교수와의 통화에 그 답이 있었다. 남 교수는 "(우리나라는 국민연금에 대해) 가입자가 낸 보험료로 보험금(연금)을 지급하고도 어떻게 손실 없이 기금을 유지할 수 있을지의 손익 구조에만 집착한다"며 "반면 다른 나라들은 이를 국가의 책임으로 여기고 부족분을 지원한다"고 꼬집었다.
여러 설문조사에서 국민의 절반 이상이 "더이상 국민연금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내는 국민연금 외 민간기업의 연금 상품에 눈을 돌린다. 민간기업보다 국가를 더 믿지 못하는 이 상황을 정부는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민간기업의 경우처럼 한 번의 계약을 평생 유지해달라 억지를 부리자는 것은 아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연금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마냥 연금 가입자의 허리띠만 졸라매라는 식의 통보는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는 부디 현 세대와 미래 세대를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묘책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김종열 경제부 금융·블록체인팀장 bell10@busan.com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