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오기 전에 불 번질라” 불구덩이 뛰어든 ‘입석마을 원팀’
기장 철마면 입석마을 주택 화재
이장 비롯 평균 70세 어르신들
한몸처럼 움직여 18분 만에 진화
100여 세대 번질 뻔한 불 막아
소방서 멀고 소방차 진입 어려워
마을 자체 비상소화장치 설치
평소 작동법 익힌 덕에 위기 모면
“불이야!” 지난 15일 오전 7시 10분. 평소 고요하던 부산 기장군 철마면 입석마을 아침을 깨우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안방에 있던 송문기(68) 이장은 “불이 났다”는 주민 전화를 받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맨발로 장화를 구겨 신고 뛰쳐나가 보니 희뿌연 안갯속 연기가 빠르게 치솟고 있었다.
마을 방송을 켜고 주민들에게 화재 사실을 알릴 시간도 없었다. 송 이장은 마을회관으로 내달렸다. 도착 즉시, 회관에 설치된 비상소화장치 호스를 꺼냈다. “목적지까지 후딱 달려라!” 이장은 나와 있던 주민에게 호스를 건넸다. 물을 틀기 시작하면 호스가 무거워져 들 수 없다고 소방서에 배운 요령을 기억해 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송 이장과 주민은 한몸처럼 움직였다. 훈련된 소방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호스를 쥐어든 주민이 불이 난 주택에 닿은 것을 보자마자 이장이 물을 틀었고 뒤이어 화재 현장으로 달렸다. 호스를 건네받은 이장은 문이 잠긴 것을 보고 서슴없이 창문을 깨 시뻘건 불구덩이로 들어갔다. 집안 어디서 불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아볼 수도 없이 연기가 자욱했다.
한차례 물대포를 쏘며 들어갔지만 곧 연기에 가로막혔다. “숨이 막혀 내가 죽을 판이었다”고 이장은 당시 상황을 전했다. 캑캑대는 이장을 보고 곁에 있던 마을 주민이 재빠르게 큰 수건 2개를 물에 적셔 가져다 댔다. 연기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는 집안을 보고 또 다른 주민이 발 빠르게 플래시를 찾아와 앞을 비췄다. 든든한 지원군에 힘입어 이장은 젖은 수건을 가면처럼 둘러메고 플래시를 눈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방 안에서 화재 진원지를 찾아 정신없이 물대포를 쏘고 있으니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진압에 걸린 시간은 18분. 호스를 뽑아 들고 물수건을 건네고 플래시를 건넨 ‘입석마을 원팀’ 평균 나이는 70세였다.
이날 보여준 입석마을 노장들의 활약은 소방훈련을 성실히 받은 덕분이다. 지난 7월 입석마을에는 비상소화장치함이 생겼다. 고지대나 전통시장, 소방차 진입곤란지역 등에서 시민들이 임시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도록 한 장비다. 송 이장 요청으로 설치됐다. 설치 이후엔 분기마다 소방 훈련을 받았다. 이것도 모자라 송 이장 주도로 주민들은 길에서 오가다가, 경로당에서, 집안에서 소화장치 작동 방법을 익혔다.
지난해 대밭에서 난 불을 계기로 송 이장은 소화장치 설치를 결심했다. 지난해 인적 없던 대밭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처음 발견했던 것은 송 이장이었다. 모두 일을 나가 주변에 사람은 없고, 발만 동동 구르던 송 이장은 임시방편으로 마침 대밭 위 갈아놓은 밭에서 흙을 삽으로 퍼 불길 위에 덮었다. 소방차를 불렀지만 가장 가까운 소방서는 무려 8km 떨어져 있었다. 빨리 와도 15분 거리. 심지어 골목이 좁은 입석마을 안으로 소방차 진입도 쉽지 않았다. 우연히 큰불을 막았지만 다음 행운은 기약할 수 없었다. 송 이장은 직접 소방에 연락해 비상소화장치 설치를 요구했다.
부산소방재난본부는 큰불을 막은 입석마을 주민 노고를 표창장으로 치하하기로 했다. 부산 기장소방서 박용남 방호계장은 “초기 화재를 빨리 발견해 100여 세대로 번질 뻔한 큰불을 막은 주민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계장은 이번 기회로 비상소화장치 중요성도 다시금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비상소화장치는 1개에 1400여만 원이 소요되는 고가 장비로 기장군의 경우 예산 한계 때문에 1년에 최대 1개를 설치하고 있다. 그는 “입석마을 같이 소방차가 빠르게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 많지만 예산이 제한적이라 필요한 모든 곳에 설치를 못 하고 있다”며 “입석마을 사례를 계기로 필요한 더 많은 곳에 장비가 설치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