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武台와 板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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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간방에도 보람만 가난에도 가풍지키는 현모양처 이웃선 언제나 칭찬받고

대통령의 영애! 확실히 행복을 상징하는 화려한 명사일는지 모른다. 만인이 부러워할 대명사이건만 여기 가난한 이나라 대통령 윤보선씨의 맏딸은 그렇지를 못하다. 온갖 고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굴하지않고 참다운 삶의 보람을 얻으려는 초라하면서도 거룩한 인간상! 어쩌면 이것이 더 큰 행복일는지 모른다. 부산시 서구 신평동 295번지 막막한 대해를 굽어보는 산허리-10평 남짓한 판잣집 단간방에서 진실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묵묵히 지키고있는 윤대통령의 맏딸 윤완희(42) 여사가 있다.

기자가 찾은 것은 6일하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의 빛을 감추지못했다.

수줍은 몸가짐, 초라한 모습, 이마의 잔주름은 윤여사의 파란많던 과거를 짐작할수있었다. 부군 신준호(44)씨를 모시고 장녀 ○수(남성여고 17)양, 장남 중수(대동중학=15)군, 2남 흥수(사하국민교=13)군, 2녀 문수(사하국민교=12)양 4남매를 슬하에 둔 윤여사가 말하는 인생역정…

◇15세때 어머님을 여읜 윤여사는 미술전문학교를 21세때 졸업하고 25세 되는 해 봄에 명치대학 상학과를 졸업한 부군과 서울 안국동 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99간 대궐같은 친정집에서 아무런 부러운것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방이 되고 6·25동란이 일어나자 윤여사에게도 어쩔 수 없는 고난이 다가왔다.

동란이 일어나던 그해 10월경 남편 신씨는 이정권치하에 있어 억울하게도 부역이란 이름아래 형무소로 끌려갔다. 남편을 빼앗긴 윤여사는 1·4후퇴때 짐을 꾸려 천안을 거쳐 4월경 부산으로 와서 자리잡은곳이 곧 신평동…남의 집 셋방에서 현재의 판잣집을 지어나오기는 지금부터 5년전이었다. 남달리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모르게 자란 윤씨에겐 가시밭같은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더우기 어린 자식을 거느리고 남편없이 살아 나간다는것은…아무런 삶의 터전마저 갖지못했던 윤여사는 다달이 친정에서 보태어주는 약간의 돈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야했다.

◇재작년 5월경 그리던 부군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부군과 함께 지나게된 것은 작년 7월…

◇이웃에 사는 정모노인은『확실히 양반집자손은 다르다』고 감탄하면서 그런 분을 이웃으로 가진 것이 한없이 기쁘다고 말하였다. 자녀들을 가르치는 품위와 이웃간에 잘지내려고 노력하는 태도등 온갖것을 본받지 않을수없었다고…구차스런 생활에도 웃음을 잊지않는 윤씨는 그래도 때론 멍하니 서쪽하늘을 쳐다보면서 6·25동란때의 쓰라린 과거의 상처를 회상하는 눈치…

◇부군이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면회한번 하지않았다는 굳센 윤여사도 정말 가난만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면서 가끔 부군께선 그때의 무정(?)을 탓한다고 얼굴을 붉혔다.

중개방송을 통해서 알게된 아버지의 대통령당선「뉴스」에 얼마나 기뻤던지 마구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아직도 기쁨을 감추지못하는 기색이었다. 자유당의 정치는 너무나 지나친 점이 많았다고 말하고 중대한 시기에 책임이 중한 자리를 맡게된 아버지께서 국민의 참뜻대로 일할수있을는지 염려스럽다고 말하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억울한 경우를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할것이라고 강조했다.

필시 뼈속에 사모친 원한의 경험이 주는 참된 교훈이리라. 친정에서 보내주는 보조가 생활의 기반이 되어있는 윤여사의 온가족은 진실한 삶을 위해 권력보다 노력의 귀중성을 체험 희망에 찬 제2공화국의 앞날과 더불어 묵묵하게 인생투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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