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치비화 60년] ⑧ 권력 중심부서 정치 역정 신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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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외압에 민한당 창당한 후 '고뇌의 나날'

지난 2000년 4월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한 신상우 국회의원 후보가 지역을 돌며 득표활동을 벌이고 있다. 부산일보 DB

'7선 국회의원, 민한당 부총재,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 국회 부의장,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정점은 아니었다. 어쩌면 늘 비주류였는지도 모른다. 40년 가까운 정치활동 기간 대통령은 6번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늘 권력의 중심부에 그만의 영역을 구축해 놓았다.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여야의 경계도 넘나들었다.

그의 이 같은 정치역정에 대해 "지나치게 권력지향적"이라는 비판과 "시대상황이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옹호가 엇갈린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인은 그를 누구보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많았던 정치권의 대표적 신사였다고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YS 후광 업고 승승장구·盧 만나 실세로 부활
"야당 선명성 약했지만 합리적인 정치인" 평가

△YS, 끊을 수 없는 인연= 신상우는 부산일보 기자로 국회 출입을 하던 1971년 신민당 공천을 받아 양산에서 공화당 출신 국회 법사위원장인 노재필을 누르고 당선됐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이후 김영삼(YS) 당시 당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는 등 YS의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

YS와의 인연은 신상우가 대학(고려대 정치학과) 다닐 때 YS 집에서 1년 가까이 기숙을 할 정도로 그 연원이 깊다.

그러던 두 사람은 신상우가 1980년 격변의 시기에 YS를 떠나 민주한국당(민한당) 창당 등 독자활동을 모색하면서 관계가 크게 틀어지게 된다.

5년 뒤 신민당 돌풍이 불어 민한당 내 YS계 인사들이 대거 신민당으로 넘어갈 때도 신상우는 끝내 합류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 한 측근은 "민한당 창당의 주역으로서 책임감도 있었지만, 신민당으로 넘어가면 삼촌인 신달수 전 경남버스 회장의 사업을 못하게 하겠다는 정권의 협박도 민한당을 떠나지 못한 한 이유로 안다"고 뒷얘기를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87년 YS의 통일민주당으로 복귀하고, 3당 합당에 이은 문민정부 탄생의 공신이 됐지만 최형우 서석재 박관용 등 YS계 핵심들에 밀려 별다른 역할을 맡진 못했다.

민주계의 핵심인사는 "민한당 문제로 YS가 섭섭한 마음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며 "그런 점 때문에 오랜 인연임에도 별다른 롤을 주지 않았고, 막판에 해양수산부 장관을 챙겨준 것은 그런 미안함이 작용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독배가 된 민한당 창당= YS의 민주계나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나, 야당 중진들에게 민한당 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80년 전두환 신군부는 여당인 민정당이 패권을 장악하되, 몇 개의 위성 정당들을 배치해 외형적으로는 정당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만들려 했다. 그런 필요에서 민한당이 탄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인 신상우가 가장 주목받은 시점은 이 민한당 시절이었다.

이와 관련, 신군부가 민한당 창당의 산파 역할을 신상우에게 맡긴 것은 아직도 정치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조차 "그건 신군부 핵심에서 결정한 일로, 아직 그 내막을 모른다"고 말했다.

신상우 본인의 답은 무엇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이다.

신군부의 정치규제에 묶여 소일하던 81년 11월 남산(중앙정보부)의 간부로부터 창당 주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는 것이 그가 밝힌 내막의 전부다.

'민정당 2중대'라는 과거 야당 동료들과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 그리고 창당 주역으로 일약 당의 실세가 된 그에 대한 당 안팎의 견제는 그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들었다.

당시 그가 쓴 책에는 이에 대한 그의 깊은 고뇌가 절절이 담겨 있다. 그는 "민중봉기를 하려는 생각이 아닌 이상, 내키지 않더라도 민주화의 길을 트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든지 그 시대의 상황을 뚫고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노무현을 만나 다시 정권 실세로= 90년대 후반 국회부의장을 지내며 중진으로 위상을 구가하던 신상우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내에서 구시대 인물로 분류돼 낙천되는 수모를 겪었다.

재기를 위해 창당한 민국당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그의 정치역정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는 듯했다.

그러던 그는 2001년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의 후견인이 되면서 다시금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하게 된다.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이전부터 교분이 있었지만, 대선캠프 참여는 우연적이었다.

2001년 가을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노 후보의 출판기념회에 축사나 해 달라는 요청에 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때 언론에서 그를 노무현의 부산지역 후원회장으로 소개했고, 광주 경선이 끝난 뒤부터 본격적인 지원에 나서게 됐다는 후문이다.

이후 노 후보가 YS시계사건과 지방선거 패배 등으로 내리막길을 걸을 때도 신상우는 변함없이 그의 뒤를 지켰고, 노무현은 두고두고 이를 고마워했다.

그러나 정치적 신념과 스타일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뚜렷했다. 신상우가 참여정부 초기 국정원장에 거론되다 취소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윤재는 "신 전 부의장은 관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강했고, 노 전 대통령은 그걸 낡은 정치로 봤다"며 "그래서 '기용'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노 전 대통령은 그 점을 늘 미안해했다"고 전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합리주의자"= 신상우는 70년대 이후 우리 근현대 정치사의 모든 페이지에 얕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고뇌가 많았던 그는 항상 어느 한 쪽에 발을 푹 담그기보다는 한 발 뒤에 서서 상황을 관망했고, 충돌보다는 타협을 택했다.

이 같은 정치역정은 이념보다는 사람을 지향했던 그의 낭만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오랜 시간 그의 보좌관으로 활동한 최원일 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 상무는 "그는 학생운동으로 두 번이나 감옥에 갔던 아들의 신념을 자랑스러워했고, 수배 중인 아들 친구까지 집에 숨겨줄 정도로 인간적이었다"며 "야당 정치인으로서 선명성은 부족했는지 모르지만, 부끄러움을 알았고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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