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레트로보다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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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레트로가 또 히트를 쳤다. 1998년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인기를 끌고, 각종 복고 패션과 소품들이 각광을 받으며, 16년 만에 재출시된 포켓몬 빵은 편의점 오픈런 사태를 빚은 데다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몇 배의 가격으로 거래되기까지 한다. 2020년 초반에는 어딜 가나 ‘마스크 품절’이었고, 불과 몇 달 전에는 ‘자가진단키트 품절’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면, 요즘은 ‘포켓몬 빵 품절’이라는 안내문을 편의점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유행은 언제나 돌고 돈다지만, 과거에 유행했던 빵 하나를 사기 위해 편의점 물류 차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줄을 서고, 빵 안에 들어 있는 ‘띠부띠부씰’이라는 스티커를 빵 가격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을 주고서라도 구하려는 지금의 상황은 단순한 재미 찾기라기에는 좀 과해 보인다. 좋게 말하면 열풍이고, 세게 말하자면 광기랄까. 포켓몬 빵 사냥에 나서는 이들에게 빵이나 스티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빵이 소환해주는 16년 전의 추억, 그리고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순진하게 스티커나 모아도 괜찮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자신의 다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퇴행이라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과거로 퇴행하지도 않는 벚꽃의 강건함이 내 발길을 붙든다.

우리는 왜 그토록 추억에 빠져드는가. 기본적으로 현실이 고통스럽고 힘들수록 과거는 미화된다. 과거라고 좋았던 일들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기억은 편집이 가능하다. 필터 처리된 추억은 비눗방울처럼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현재의 애인과 크게 다툰 후 잠 못 드는 새벽에, 옛 애인에게 연락하는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자니?” 혹은 “잘 지내지?” 하지만 아침이 밝아오고 지난밤의 추억 필터가 사라지고 나면, 찬물 세례처럼 쏟아지는 민망함과 후회는 오롯이 자신이 견뎌야 할 몫이다.

정신분석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방어 기제라는 것이 있다. 불안과 우울, 수치심과 죄책감 같은 불쾌한 감정을 경험할 때 우리 스스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일컫는 말이다. 방어 기제 중에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전략으로는 우선 현실 부정이 있다. 예컨대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휴대폰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또 자신에게 불쾌한 감정을 주는 대상에게 직접 화를 내지 못하고 엉뚱한 데 화풀이를 하는 전략이나, 자신의 감정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 전략, 자신의 실패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결과를 정당화하는 신포도 전략도 있다. 그리고 이전의 발달 단계로 후퇴하는 퇴행 전략이 있는데, 동생을 갖게 된 아이가 이미 뗀 젖을 다시 먹으려는 등 어리광을 부리는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자신의 다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퇴행이라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회를 박탈당하고 노력에 배신당하고 자괴감과 절망감을 가득 안은 채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겨우 빵과 스티커 같은 것으로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하면서 추억에 취해보려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서글프다.

얼마 전 코로나 확진으로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그럭저럭 잘 피해 다녔었지만 결국은 나도 바이러스에 뒷덜미를 잡혀버린 것이다. 좁은 방 안에서 일주일을 갇혀 지내다 격리 해제가 되어 밖으로 나와 보니 그 일주일 사이에 연분홍빛 벚꽃이 흐드러졌다. 봄마다 보는데도 매번 눈부시다. 추위가 얼마나 혹독하든 뒷걸음질 치지 않고 맨몸으로 그 겨울을 살아내다가 봄이 오면 어김없이 움을 틔우고 새 꽃을 피우는 나무들.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과거로 퇴행하지도 않는 그의 강건함이 내 발길을 붙든다. 역시 레트로보다는 벚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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