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섬 분홍으로 물들었다
경남 고성 솔섬 진달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라는 가곡 가사처럼 진달래는 산에서만 보는 꽃인 줄 알았다. 푸른 파도와 물장난을 치는 진달래를 바다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경남 고성군 송천리 바다에 자리를 잡은 솔섬에서 가면 눈은 커지고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는 이색 경험을 하게 된다.
유난히 소나무 많아 이름 붙은 섬
언덕 너머 오솔길 옆 진달래 천지
평화로운 송천리 바다와 잘 어울려
둘레길 어디서 찍어도 ‘인생 사진’
장여 바위 주변엔 신기한 암석들
■느린 도로 느린 마을
복잡한 도로를 피하려고 일부러 대전통영고속도로 연화산 IC에서 내려 달려가는 길을 택했다. 워낙 시골길이라서 사람은 물론 오가는 차도 드물었다. 왕복 2차로 도로에는 벚꽃이 활짝 피어 있어 하동 십리벚꽃길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그곳에 가면 벚꽃은 거의 다 지고 없겠지만, 상큼한 봄 향기를 풍기는 푸른 나뭇잎이 낯선 자동차와 나그네를 반겨줄 것이다.
시속 40㎞ 안팎으로 느긋하게 30분 정도 달리면 송천리 솔섬에 도착한다. 솔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다. 자동차 두 대가 지나가기는 어렵다. 주차장이 따로 있는 건 아니어서 적당히 공간을 찾아 차를 세워야 한다. 솔섬은 원래 섬이지만 마을과 연결하는 방파제 겸 도로를 건설한 덕분에 지금은 육지와 연결됐다. 섬 주변에는 양식장이 많이 설치됐다. 양식장에 사용하는 가리비 껍데기도 지천으로 널렸다. 어촌인 만큼 고기잡이를 하러 가는 크고 작은 배도 한두 척이 아니다.
솔섬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래서 섬 이름도 솔섬이다. 송천리라는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마을 앞에 솔섬이 있어서 ‘송’, 인근에 개울이 있어서 ‘천’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이름 그대로 솔섬에는 소나무와 진달래가 넘쳐난다. 면적은 4㏊ 정도여서 느긋하게 걸으면 한 시간 만에 섬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솔섬 밖에서는 진달래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먼길을 마다않고 달려올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첫눈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솔섬의 진가를 이해하려면 섬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바다에서 보는 진달래
솔섬 입구 인근에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옆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솔섬 둘레길 입구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가파른 느낌을 주지만 1~2분만 걸으면 거의 평지나 마찬가지인 곳이 나온다.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정도여서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안내판에는 3~4월에는 유채꽃과 진달래, 5~6월에는 이팝나무, 7~10월에는 무궁화, 9~11월에는 구절초가 핀다고 적혀 있다. 늘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통나무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나지막한 언덕 너머로 알록달록한 꽃잎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쯤 기적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언덕이 온통 진달래 천지다. 소나무 사이로 만들어놓은 오솔길을 따라 연분홍색 꽃이 온 섬을 뒤덮고 있다. 낯선 손님이 찾아온 게 부끄러운지 진달래는 봄바람에 온 몸을 살랑살랑 흔든다.
소나무 숲 사이로 왼쪽에 바다와 양식장이 보인다. 바다는 아직 봄이 온 것을 모르는지 새 계절의 분위기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해 어두운 상태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진달래가 솔섬을 돌아다니는 봄바람에 향기를 실어 바다로 날려 보낸다. 조금 더 걸어가자 이번에는 평화로운 모습의 송천리 어촌마을이 나타난다. 바다가 잠잠한 틈을 타 모두 고기잡이를 하러 나간 것인지 마을은 조용하다. 진달래는 먼 바다로 나간 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하면서 고개를 내밀어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솔섬 둘레길을 따라 진달래 군락은 계속 이어진다. 가도 가도 소나무와 진달래뿐인 세상이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골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어디에서 찍어도 ‘인생 샷’이 나오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작은 섬 같은 장여 바위
둘레길은 이번에는 나무 덱이 조성된 바닷가로 이어진다. 아래로 작은 섬이 보인다. 솔섬과는 모래사장으로 연결돼 있다. 정확하게는 섬이 아니라 바위다. 이름은 장여다. 장여에도 소나무 10여 그루가 자라는 걸로 봐서는 솔섬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로 추정된다. 신기하게도 그곳의 소나무 사이에서도 울긋불긋한 진달래가 자란다.
둘레길에서 덱을 타고 내려가 장여를 한 바퀴 둘러볼 수도 있다. 위험해 보이지만 장여 바위 위로 사람들이 올라간 흔적도 있다. 주변에서는 태고에 생성된 느낌을 주는 신기한 암석을 볼 수 있다. 자연산 굴은 물론 조개, 고동도 돌아다닌다. 경상도 말로 쪼시개, 표준어로 조시를 이용해 생굴을 캐내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온몸을 근질인다. 장여 주변의 바위를 밟으며 끝까지 걸어가면 멀리 자란도가 보인다. 섬과 섬 사이로는 멀리 남해 바다가 흘러 다닌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자니 철썩이는 파도를 따라 퍼져나가는 신선한 갯내음이 머리를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장여 바위를 둘러보고 다시 나무 덱을 타고 올라오면 솔섬 둘레길 끝부분이다. 60대로 보이는 여성 네 명이 남해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진달래 군락 사이에 자리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옆에는 맛있는 도시락이 펼쳐져 있다. 멀리서 봄꽃놀이를 나온 여고시절 친구들일까. 분홍색 진달래와 무척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다정하면서도 즐겁고 신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들은 50년 전 10대 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차분하게 인생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