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의 월드 클래스] 가장 값싼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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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팀장

오랫동안 종군기자로 활동한 크리스티나 램은 최근 발간한 저서 <관통당한 몸>에서 “전시 강간(Wartime Rape)은 인류가 아는 가장 값싼 무기”라고 꿰뚫었다. 가족을 무너뜨리고, 어린 소녀를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든다고 했다. 공동체에서는 ‘나쁜 피’로 거부당하고 어머니들에게는 그들이 겪은 고통을 매일 떠올리게 하는 아이들을 태어나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정복자에게는 적을 쉽게 굴복시키는 방법이면서, 무보수로 끌어온 병사를 보상하는 방법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저열한 전쟁범죄는 늘 역사책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결의한 ‘로마규정’은 전시 성폭력을 전쟁범죄로 처음 규정했지만, 지금껏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경우는 1건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항소로 뒤집혔다. 전시 성폭력은 지금껏 가장 방치돼 온 전쟁범죄다. 그래서 여성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정복자에게 ‘값싼’ 전장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여성과 어린이를 겨냥한 러시아군의 만행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다. 지하 대피소를 덮쳐 10대 소녀 수십명을 집단 성폭행하는가 하면 남편을 총살한 후 자녀 앞에서, 소녀의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성폭행을 했다. 모두를 향해 ‘느린 살인’을 했다. 1살짜리 아이부터 80대 노인까지, 모든 약한 존재는 먹잇감이 됐다.

1990년대 구 유고연방에서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자행된 대규모 성폭행은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든 계기가 됐지만 한참이 지난 2016년에도 미얀마군은 로힝야족 소탕을 위해 로힝야족 여성의 52%를 성폭행했다. 마주하기 힘들고 불편하다고 외면하면, 그 때부턴 ‘묵인’이 된다.

일본이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배를 불렸던 ‘지옥섬’ 군함도도 모자라 최근 사도광산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군함도에 끌려갔던 생존자 증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18년 90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최장섭 옹은 생전에 “다시는 우리 후대 자손들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눈물로써 우리 후손들에게 바라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잡아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고 말했다.

혹독하게 몰아부치는 책 <관통당한 몸>을 힘겹게 읽고, 하루 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잔학한 전쟁 이야기를 읽고, 기억하고, 알리는 이 일의 의미를 최장섭 옹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절대로, 다시는, 우리 아들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불편하게 만들고, 기억하게 만들고, 역사책에도 기록되게 해야 한다.

최근 <부산일보>에 편지를 보낸, 우크라이나의 시인 페트로 팔리보다 씨는 전쟁 직전까지도 “그런 일이 21세기에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만 잔악무도한 세계 질서에 휘말리지 말란 법은 없다.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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