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빨간 산호가 많은 바다였지”… 청사포 해녀 김형숙 이야기 #7-1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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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 김형숙(70) 해녀 이야기>


빨간 산호초가 가득했다. ‘물건(해산물)’도 널려 있었다. 해초가 줄어들어 예전 같진 않지만, 청사포는 아름답고 깨끗한 바다였다.

청사포에서 태어났다. 자연스레 멱감다 물질을 배웠다. 한동안 회사에 다니며 시집도 갔지만, 눈앞에 바다가 아른거렸다. 그래서 친정 바다로 돌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간 우뭇가사리 뜯고 전복 따며 살았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뾰족한 닻에 찔린 가슴팍엔 흉터가 남았다. 그래도 물건을 내어주는 바다가 늘 고마웠다. 큰 전복을 보면 “용왕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살기 위해 시작한 물질,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하고 싶다. 바다에 가면 자식들에게 손 벌릴 필요도 없다. 어린 시절 배워놓은 물질인데 계속 바다에 가려 한다.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김형숙 해녀(가운데)가 테왁을 챙겨 청사포 바다로 이동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부산 해운대구 청사어촌계 김형숙 해녀(가운데)가 테왁을 챙겨 청사포 바다로 이동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물안경 없이 뛰어든 바다

청사포 앞바다는 놀이터였다. 어린 시절 앞바다에 방파제도 없었다. 심심하면 멱감으며 놀았다. 그런데 어른들은 바닷가 가장자리에서 무언가를 뜯고 있었다. ‘천초’라고 불리는 우뭇가사리였다. 우리도 함께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게 첫 물질이었다.

그때는 물안경도 없이 바다에 들어갔다. 물속에서 눈을 뜨고 해산물을 잡아 왔다. 해삼이나 소라 같은 게 엄청 많았다. 어머니가 해녀였지만, 물질을 배운 건 없다. 당신은 두통이 심해 물질을 오래 못하셨다.

성인이 돼서는 물질을 몇 년 하다 접었다. 회사에 다니다 시집을 갔다. 그런데 돈벌이가 생각보다 시원찮았다. 친정 바다가 아른거리더라. 나도 물질하며 생계에 보탤 생각으로 청사포로 돌아왔다. 30대가 돼서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물질 초반엔 우뭇가사리와 점착제를 만드는 재료인 ‘도박’ 등을 갖고 나왔다. 어느 날 제주도 해녀 두 분이 청사포까지 출향 물질을 온 적 있었다. 그들을 따라다녔다. 점점 넓은 바다로 갈 수 있게 됐다.

김형숙 해녀가 청사포 바다에서 물질하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김형숙 해녀가 청사포 바다에서 물질하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욕심내지 않는 ‘부산 해녀’

여기는 제주 출신 해녀가 없다. 부산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 청사포에서 태어나 자랐거나 시집간 뒤 다시 돌아왔다. 중매로 인근 어촌에서 시집온 경우도 있다.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다들 친할 수밖에 없다.

청사포는 예전부터 부산 해녀가 지킨 곳이었다. 내가 한 10살 때쯤이었나. 제주 해녀 몇 명이 배를 타고 물질하러 오긴 했다. 그래도 정착하지 않고 돌아갔던 게 기억에 남는다.

우린 예전부터 큰 욕심을 안 부린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모두 모이긴 한다. 물질 준비는 안 하고 아침 드라마 등 온갖 이야기를 2~3시간 정도 나눈다. 그러다 물 빠지는 시간에 맞춰 다 같이 바다로 간다.

기장군 연화리 등은 새벽부터 물질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한참 쉬었다가 오전 11시 넘어 천천히 나간다. 다들 수월하게 물질한다고 말하긴 한다.

오리발을 안 차는 것도 비슷한 이유인 듯하다. 제주도 견학도 다녀왔는데 오리발 장점을 당연히 안다. 그래도 그냥 우리 식대로 하자고 의견이 모였다. 지금껏 아무도 오리발 안 신고 실내화를 신는다. 큰 욕심 안 부리는 게 우리 마음가짐이다.

김형숙 해녀와 청사포 해녀들이 테왁을 들고 바다로 나가는 모습.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김형숙 해녀와 청사포 해녀들이 테왁을 들고 바다로 나가는 모습.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닻에 찔려도 계속한 물질

오리발 없이도 물질은 곧잘 한다. 청사포에서는 줄을 연결한 닻을 바닷속에 넣어둔다. 수면부터 줄을 잡고 내려가면 바닥까지 수월하게 닿는다. 바닥에 고정된 닻 근방 해산물은 그렇게 가져온다.

큰 도움을 주는 닻이 때론 위협이 된 적도 있다. 바닷속에서 떠돌다 멀리 떨어진 전복을 발견했던 순간이었다. 빨리 가려고 몸을 급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앞쪽에는 선박에서 내려둔 뾰족한 닻이 있었다. 전복에 눈이 팔린 나머지 결국 닻에 가슴팍이 세게 부딪혔다.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너무 아팠는데 병원도 가지 않고 그냥 물질했다. 팔에 쥐가 내릴 정도였지만, 그렇게 살던 시절이었다.

강한 바람에 당황했던 순간도 있었다. 물질을 하다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다. 해무도 많이 낀 걸로 기억한다. 해녀들은 뭉쳐서 다니는데 강한 비바람에 모두 제대로 헤엄칠 수 없었다. 옆에 낚싯배도 있었던지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해녀들은 테왁을 띄워놔도 배가 옆으로 지나가는 아찔한 순간을 종종 맞이한다.

김형숙 해녀가 청사포 바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김형숙 해녀가 청사포 바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전망대부터 등대까지

우리 해녀들은 다릿돌 전망대에서 하얀 등대가 있는 바다까지 물질한다. 방파제 주변뿐만 아니라 먼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날씨 좋을 때는 배 타고 나간다.

청사포는 특히 다릿돌 인근 바다가 물살이 세다. 그래서 오리발 대신 닻을 바닥에 고정해둔 게 큰 도움이 된다. 물질은 보통 5월 말부터 10월까지만 한다. 물질을 안 하는 기간에는 미역 양식을 돕는다. 12월에는 잠시나마 말똥성게(앙장구)를 잡기도 한다.

물살이 세면 그만큼 좋은 미역이 난다. 예전부터 청사포는 품질 좋은 돌미역이 유명했다. 인기가 좋은 데다 생산량도 많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마을에서 생산할 수 있는 구역을 정했다. 각자 정해진 바다에서 자연산 돌미역을 캤다.

자연산 돌미역은 예전만큼 그렇게 많이 나오진 않는다. 환경 변화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래도 청사포는 조류가 센 만큼 미역 양식장이 많이 생긴 상태다. 직접 미역 양식을 하는 해녀도 있다. 난 동생이 하는 미역 양식장에서 품삯을 받고 캐기만 한다.

김형숙 해녀가 바다로 물질을 떠나기 전 물안경을 점검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김형숙 해녀가 바다로 물질을 떠나기 전 물안경을 점검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산호가 가득했던 청사포

청사포 바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내가 30대일 때만 해도 청사포에 산호가 많았다. 방파제도 없던 시절 산호를 뜯어와 평상에 놔두면 사람들이 사 가기도 했다.

산호는 내가 40대쯤 서서히 없어졌다. 전복이나 해삼 등 물건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바닷속 바닥이 하얗게 변하는 백화현상 탓인 듯하다. 방파제를 새롭게 설치한 이후에도 영향을 받았다. 태풍 피해를 크게 겪은 후에 설치했기에 어쩔 수 없지만, 바다가 변하는 건 아쉽다.

그래서 요즘 바다에 가면 이런 생각을 한다. 나쁜 물이 안 들어오게 해달라고. 백화현상은 청사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들었다. 우리 바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라고 하더라.

바닷속을 떠돌다 큰 전복 한 마리만 봐도 감사하다. 물속에서 “용왕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그동안 살기 위해 물질을 해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물질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손 안 벌려도 되진 않은가. 헤엄칠 수 있으면 계속 바다에 가고 싶다.


※김형숙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이지민 에디터 mingmi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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