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바루 기자의 시선] 핵무기 없는 평화는 이상인가… 기시다 총리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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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바루 나오코 서일본신문 기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인 지난 6일. 히로시마 출신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평화기념식에 참석해 “우리는 77년 전의 참화를 결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유일한 피폭국인 일본의 책무이며 피폭지 히로시마를 정치적 고향으로 둔 총리로서의 서약이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는 평소에도 핵무기 폐지를 “라이프워크(일생의 일)”라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날 연설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비핵 3원칙(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을 지키면서도, 심각한 안보 환경의 현실을 ‘핵무기가 없는 세상’이라는 ‘이상’에 연결시키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다. 중국과 미국 간의 긴장관계나 북한의 위협 속 핵무기 폐지를 이미 현실적이지 않는 이상이라는 사상이 엿보였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회의에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해 역시 이렇게 연설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가운데 핵에 의한 위협이 행해지고 핵무기의 참화가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닌지 세계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길이 한층 어려워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두 연설에서 핵무기 근절을 위한 국제조약인 핵무기금지조약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피폭국이면서도 핵무기금지조약에 찬성하지 못하는 모순을 이번에도 보여 준 셈이다. 불안정한 세계정세를 전제로 한 이 같은 ‘현실과 이상론’은 자민당이 추진하는 평화헌법 개정의 근거이기도 하며, 이 논리는 일본 국민에게도 급속히 침투하고 있다. 지난 6일 한 피폭단체는 총리와의 면담에서 “우리는 낙담하고 있다”며 곧장 항의했다. 피폭국으로서 평화를 추구하는 메시지가 유명무실해지는 상황에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원폭 비극에서 7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가며 희미해지는 기억을 계승하는 어려움도 있다. 일본에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이라도 히로시마 원폭날(8월 6일)이나 나가사키 원폭날(8월 9일)에 등교해 평화학습 시간을 갖는다. 기자도 한여름에 체육관에서 전교생들과 원폭에 관한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중학생 때는 평화학습에서 강제징용에 관한 영화를 봤는데,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알게 돼 충격을 받기도 했다. 요즘에는 이런 여름방학 평화학습 시간이 점점 줄고 있지만 수학여행은 아직까지 많은 학교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로 간다.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은 일본에서는 패전일이며 전쟁이 끝난 날이다. 일본에선 마침 추석(오봉) 날이기도 해 성묘하러 간다. 습한 더위 속에 입추를 지나 남은 여름을 살아 내려는 매미들이 힘껏 우는 소리를 들으며 묘소에서 고개를 숙인다. 77년 전 ‘동아시아 공영권’이라는 명목으로 전쟁한 일본 제국주의는 원폭으로 무너졌고 수많은 무고한 희생이 뒤따랐다. 히로시마에서는 조선의 왕족 이우도 희생됐다.

일본에게 8월은 전쟁을 뒤돌아보고 평화를 생각하는 시간이며 영혼들을 모시는 시간이다. 이 여름에도 일본은 간절히 평화를 외치면서 전쟁할 수 있는 ‘보통 나라’로 탈피하려는 양면성과 딜레마에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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