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50년 화려한 역사 남긴 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비화가야 부상하다 [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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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7. 5세기

후기가야 낙동강 곳곳 13국 기록
고구려 패권과 나제동맹 속 암약
일본 고대사와 더욱 밀착한 시기


5세기는 후기 가야가 전개되는 시기로 크고 작은 ‘지역연맹체’로 가야국들이 부상한 뒤 100~150년 정도 화려한 가야사의 불꽃을 태웠다. 사진은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5세기는 후기 가야가 전개되는 시기로 크고 작은 ‘지역연맹체’로 가야국들이 부상한 뒤 100~150년 정도 화려한 가야사의 불꽃을 태웠다. 사진은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5세기는 고대사가 급물살을 탔던 시기다. 400년 고구려 남정에 의한 금관가야의 타격 이후 5세기는 가야사의 조정을 거쳐 후기 가야가 전개되는 또 다른 격동의 시대였다. 전기 가야가 금관가야와 아라가야, 양대 세력으로 구축됐다면 후기 가야는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약화한 금관가야 등으로 더욱 다양한 세력들이 갖춰졌다. 대체로 5세기 전반에 아라가야, 소가야, 비화가야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5세기 중엽 이후에 대가야가 크게 부상한 것으로 요약된다. 이들 가야는 크고 작은 ‘지역연맹체’로 부상한 뒤 대개 100~150년 정도 화려한 가야사의 불꽃을 태웠다. 하지만 비단 그것에 그치지 않는 것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를 아우른 5세기의 역사였다.

이들 가야가 부상한 5세기 가야사의 안팎은 어떠했을까.

첫째, 이들 가야는 하늘에서 떨어지듯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가야가 낙동강 역사체’라는 말처럼 낙동강 본·지류를 따라 곳곳에서 세력을 키워온 중이었다. 이들 세력은 금관가야가 타격을 입지 않아도 부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400년 이후 금관가야의 구심력이 약해지는 것과 함께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드러나 있다. 그 점이 희한하다. 그래서 400년을 가야사의 획기적 계기로 보는 것이다. 나아가 당시 금관가야의 엘리트층과 유민들이 이들 지역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강력한’ 주장도, 나름의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다.

둘째 곳곳에 세력을 구축한 후기 가야 소국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후기 가야에 탁기탄국, 탁순국, 다라국 등도 주요하게 꼽힌다. 후기 가야 각 세력들은 주변을 규합해 두각을 드러낼 때 ‘국(國)’으로 어엿이 기록되는 것이었다. 그 기록의 반열에 오른 이름이 총 13국이다. 이 13국이 과연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금관가야라는 이름으로, 나아가 더 큰 세력으로 묶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고대국가로의 향방이었다.

이중 대가야가 아주 크게 세력을 규합하면서 479년 바다를 통해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낸 것을 두고 고대국가 위상을 갖췄다고 말해진다. 많은 가야 세력 중 유일하게 대가야만이 고대국가에 진입했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쨌든 가야 역사체는 400년의 큰 타격 이후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데 80년, 거의 1세기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5세기 한반도 전체 상황에서 볼 때 가야는 걸출하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5세기 한반도 패권은 단연 고구려의 것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391~412)과 장수왕(413~491), 2대에 걸쳐 100년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한반도의 5세기를 호령했다. 그 기세에 눌려 꼼짝 못 하던 백제와 신라는 433년 나제동맹을 맺기에 이른다. 큰 판도에서 볼 때 ‘고구려-신라’ 축이 균열하고, ‘백제-가야-왜’ 축도 느슨해지면서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고구려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그 대표적 사건인 475년 고구려의 한성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전사한 것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일본서기>는 백제가 멸망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개로왕이 전사하고 백제는 웅진으로 퇴각 천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암약한 것이 5세기 가야의 처지였다. 가야 역사체는 낙동강과 해상을 아우를 때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전기의 금관가야가 그랬고, 그다음으로 후기의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가 그 가능성을 넘봤다. 실제로 어느 정도 실현했다. 하지만 후기 가야는 신라의 서진과 백제 동진의 벽을 완전히 깨지 못했다. 찬란한 해상제국의 면모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야는 뛰어난 왕을 배출하지 못했다. 4세기의 근초고왕 내물왕, 5세기의 광개토왕 장수왕, 6세기의 법흥왕 진흥왕 같은 국운을 활짝 열어갈 왕을 만나지 못했다. 그것이 가야의 운명이었다.

넷째 차라리 가야는 일본열도의 고대사를 촉진했다. 그와 관련한 강력한 주장이 가야의 핵심 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새 왕조를 열었다는 것이다. 5세기 왜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받은 왜5왕 시대였다. 중국 사서에 찬(贊), 진(珍), 제(濟), 흥(興), 무(武)라는 이름을 남긴 그들은 가야와 어떤 관계였을까.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모즈·후루이치 고분군’은 일본 고분시대(3세기 중반~7세기 말)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5세기 중심의 유적이다. 오사카부에 위치하는 이 고분군은 일본열도의 국가 형성을 강력하게 추진한 야마토왕권의 대왕묘로 일컬어진다. 가야의 선진 문물 자극이 일본 고대국가 형성과 야마토왕권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박종화 UNIST 생명공학과 교수는 “한·일의 유전자를 분석할 때 가야시대와 일본 고분시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근접한 똑같은 사람들”이라며 “당시는 국가의 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마치 오늘날 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에 가듯이, 혹은 제주도에 가는 것처럼 가야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매우 활발하게 본격적으로 뒤섞여 활동한 시대였다”고 했다. 5세기 가야사와 일본 고대사는 동반해서 진행 중이었다.

소가야의 고성 송학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소가야의 고성 송학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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