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우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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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영화 ‘굿바이 평양’ 스틸 컷. 영화의전당 제공 영화 ‘굿바이 평양’ 스틸 컷. 영화의전당 제공

손이 귀한 외가. 증조할아버지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내 외할아버지이고, 둘째는 일본할아버지셨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말이 서툰 그를 일본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증조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 막내아들이 제 뿌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며 방학 때마다 안동으로 불러들였고,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 일본할아버지는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는 엄마와 산으로 들로 사진을 찍으며 다녔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본할아버지는 제 아버지의 고향으로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나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외할아버지와 똑 닮은 일본할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는지, 일본엔 어떻게 가셨는지 그 내력을 잘 모른다.

증조할아버지의 역사와 일본할아버지에게 국가는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어쩐지 이제껏 한 번도 여쭤보지 못했다. 다만 한국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만으로 일본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동에서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간 할머니에게 건너 들었다. 나는 내 가족의 역사를 알지 못했고 지금도 모른다. 나는 양영희 감독의 영화를 보며 우리들에게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역사 하나쯤은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보았다.

양영희 감독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최근 개봉 ‘수프와 이데올로기’ 등

재일코리안 가족 자전적 비극 다뤄

개인 넘어 민족의 참담한 역사와 연결

물론 양영희 감독의 영화를 단순한 가족사나 비극으로 정의할 수 없다. 감독의 아버지는 제주도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으며, 해방 이후에는 북한 국적을 선택하며 조총련 간부로 활동했다. 당시 많은 재일코리안이 북한 국적을 선택했는데 북한은 1957년부터 조선인학교에 원조금 등을 보내며 재일교포 사회에 관심을 보냈고, 일본에서 차별당하던 그들은 ‘지상낙원’이라고 알려진 북한으로 자식을 보내거나 가족들 모두가 이주하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고 한다. 이 사업이 바로 1959년부터 시작된 귀국사업(북송사업)이다. 감독의 부모도 아들 셋을 북한으로 보냈다. 재일코리안이 북송사업 때 북한을 가족을 보낸 숫자가 무려 9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재일코리안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도 끊어내지도 못한 채 이어가고 있는 상처임을 알린다.

일본에 살았던 부모, 북한 국적을 가진 오빠들, 남한 국적을 가진 감독. 한 가족 안에 세 개의 국가가 공존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양영희 감독은 평양 연작이라고 불리는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 극영화인 ‘가족의 나라’와 최근 개봉한 ‘수프와 이데올로기’까지 장장 17년의 세월 동안 담고 있다. 그런데 감독의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가족의 비극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참담한 역사와 연결된다.

특히 북한을 조국으로 여겨 세 아들을 평양으로 향하는 귀국선에 떠나보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딸의 방황과 소통을 다룬 ‘디어 평양’에 이어, 평양에 사는 둘째 오빠의 딸 조카 ‘선화’를 통해 감독이 겪었던 정체성의 고민을 조카도 겪고 있음을 ‘굿바이 평양’에서 밝힌다. 양영희 감독은 처음 만났을 때의 밝고 활기찬 선화가 시간이 지날수록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모습, 메뉴 하나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해 망설이고 불안해하는 선화를 통해 대물림되는 비극에 안쓰러워한다. 그리고 감독은 북한에 있는 아들과 손주들을 위해 돈과 생활용품을 보낸다고 박스를 꼼꼼히 포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어머니의 헌신이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인지, 자식을 볼모로 삼았기 때문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아마도 이는 분단, 재일교포, 북송사업, 제주 4·3 등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가족의 내력을 단순히 한 가족사로 볼 수 없음을 증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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