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해’ 통해 일본열도까지 활발한 교류 펼쳤다 [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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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10. 비화가야

5세기~6세기 전반 가야 정치체
창녕 일대 낙동강이 ‘내해’ 역할

전반기 계성고분군 집단 시대
철 중계 ‘국제마을’로 교류 열어
후반기 창녕 북부 새 세력 부상
‘신라화’ 진행, 555년 하주 설치

비화가야 북부 중심 세력의 교동·송현동고분군. 사진 아래쪽은 완형의 금동관이 출토된 교동 63호분 발굴 모습. 문화재청 제공 비화가야 북부 중심 세력의 교동·송현동고분군. 사진 아래쪽은 완형의 금동관이 출토된 교동 63호분 발굴 모습. 문화재청 제공

비화가야는 5세기~6세기 전반 경남 창녕을 근거지로 부상한 역동적인 후기 가야 정치체였다. 400년 금관가야의 타격 이후 창녕 일대 세력들이 결집해 한 단계 격상한 것이었다. ‘비화(非火)’는 ‘빛 벌(판)’, 사방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벌판이라는 뜻이다. ‘비화가야’보다 ‘비사벌’이 더 적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비화가야는 지리적으로 ‘낙동강 서쪽의 가야’(부산도 그랬다)였다. 신라와 접경이었고, 고대 영남 내륙의 교류 중심이었다. 신라와는 동쪽 경계를 따라 험준한 비슬산맥(비슬산-화왕산-영취산)이 병풍처럼 쳐져 있었고, 다른 가야와는 낙동강을 마주 보고 활짝 열려 있었다. 비화가야는 낙동강의 모든 본류·지류가 합쳐지는 결절점으로 ‘낙동강 정치체’라는 가야의 성격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비화가야에게 낙동강은 낙동해(海)였다. 강이 아니라 바다였다. 창녕에 아예 ‘바다를 마주한 나루’라는 뜻의 지명 ‘임해진(臨海津)’이 아직 남아 있고, 창녕 비봉리 패총에선 바다 조개까지 출토됐을 정도다. 창녕 일대의 옛 낙동강은 오늘날과 달리 퇴적되기 전 크고 작은 만(灣)을 이루면서 낙동강 하류를 통해 일본열도의 무역선까지 오르내리는 일종의 ‘내해(內海)’였다. 그 내해의 크고 작은 만, 그것과 이어진 천(川)은 비화가야의 양대 중심 세력과 연결된다.

5세기~6세기 전반 비화가야에는 전성기를 달리하는 남·북부 양대 중심 세력이 있었다. 5세기 초·중엽 남부의 중심 집단은 계성고분군, 5세기 후엽~6세기 전반 북부의 중심 집단은 교동·송현동고분군을 각각 조성했다. 전자는 261기(고총고분 150여 기), 후자는 304기(고총고분 100여 기)의 밀집 고분군이다. 두 고분군의 거리는 8㎞다.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각종 금은제 장식품. 문화재청 제공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각종 금은제 장식품. 문화재청 제공

먼저 5세기 초·중엽을 전성기로 하는 남부 계성고분군 집단의 시대가 열렸다. 이곳은 특히 4세기 후반부터 부상하기 시작했다. 계성고분군의 건너편 계성천변 계성리 유적은 비화가야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항시(港市, 항구도시)’였다. 퇴적되기 전 이곳은 지금과 달리 배가 드나들 정도였다. 계성리 유적은 마한인과 왜인이 집단 거주한 철 중계의 국제교역거점이자 국제마을이었다. 앞선 시기의 아라가야권 거제 아주동 유적, 금관가야권 김해 구산동 유적에 비견되는 국제마을이다.

계성고분군 집단은 교류 시대를 활짝 열었다. 당시 성립한 창녕양식 토기는 가야권역에 넓게 확산해 비화가야의 활동상을 증명한다. 낙동강을 통해 하류의 금관가야권 부산 김해와 긴밀히 연결됐고 상류의 합천 다라국, 고령 대가야와 연결됐다. 이중 비화가야와 다라국은 당대 낙동강 중류 동·서안에서 쌍으로 부상한 신생 세력이었다.

전체 가야 판도를 보면 후기 가야 초반에 남해안에서는 소가야, 낙동강 중류에서는 비화가야가 부상했다. 두 가야는 만날 수밖에 없었다. 비화가야는 낙동강 하류까지 우회하지 않고 창원시 북면의 ‘육로 회랑’을 통해 소가야권의 마산만 ‘현동항’과 직결해 남해안 일대에 창녕양식 토기를 전파했다.

5세기 후엽 새롭게 부상한 비화가야 중심 세력이 창녕 북부 교동·송현동고분군 집단이다. 계성고분군과 함께 국가 사적인 이 고분군은 여러모로 주목받았다. 1500년 전의 순장 소녀 ‘송현이’ 유골, 여러 점의 신라 양식 금동관, 7자 명문이 새겨진 환두대도, 그리고 일본열도 산(産) 녹나무제 배 모양 목관이 출토됐다. 일본열도의 녹나무 목관은, 계성고분군 세력에 이어 이 시기에도 비화가야가 낙동강을 통해 일본열도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화가야 북부 세력의 부상은 가야 정치체의 역동적 상황, 비화가야의 향후 향방과 맞물려 있었다. 소가야가 고성 중심으로 위축되고, 합천 다라국이 대가야권에 포함되면서 계성고분군 집단도 약해졌다는 것이다. 대신 대가야의 전면 부상, 신라의 영향력 확대와 맞물려 비화가야 북부 세력이 부상했다는 것이다.

특이한 주장의 하나는 비화가야 남북 두 세력이 별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확대해 아예 창녕에 2개 소국(小國)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북부가 비화가야였고, 남부는 탁기탄국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두 고분군이 부산의 복천동-연산동 고분군처럼 순차적으로 조성된 게 아니라 무덤 양식을 달리해 상당 기간 공존하면서 조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화가야 남북 두 고분군은 한 세기에 걸쳐 토기 철제품 금공품에서 동일 양식을 유지하면서 조성됐기 때문에 2개 소국으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두 고분군은 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남부 계성고분군 집단이 단독 가계의 수장묘를 조성했다면 북부 교동·송현동고분군 집단은 복수 가계의 수장묘를 조성했다. 이는 비화가야-신라의 관계가 반영된 것이라 한다. 5세기 초·중엽 남부의 지배집단은 신라에 독자적이었다면, 5세기 후반 이후 북부의 지배집단은 신라 영향력을 직접 받았다는 것이다. 북부의 복수 가계 수장묘는 신라가 비화가야의 권력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복수 수장을 옹립한 결과라는 것이다.

6세기 전반 창녕양식 토기는 점차 줄어들면서 결국 사라진다. 비화가야의 운명과 같았다. 창녕 비화가야에 555년 신라 행정구역 하주(下州)가 설치됐다. 6세기 전반부터 진행된 신라화의 최종 결과였다. 561년 가야 점령의 교두보로 창녕에 진흥왕 척경비가 세워졌다. 비석에 신라군 총사령관들이 창녕에 총출동했다는 것을 기록해놨다. 562년 가야 멸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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