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201. 문화 통제를 벗어난 베트남 미술, 쩐반깐 ‘꽃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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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적거리는 둣한 필압과 자유롭고 생생한 붓질의 흔적은 꽃의 생동감을 그대로 전하는 것 같다. 터치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빨리 그린 티도 나지만 어딘가 비어있다는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 한 마디로 잘 그린 꽃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미술사적 의미가 마냥 꽃 그림에 머물지는 않는다.

‘꽃Ⅰ’은 쩐반깐(Tran Van Can, 1910~1994)이라는 베트남 출신 화가가 그렸다. 베트남 전통 옷칠공예를 현대미술의 표현도구로 격상시켰으며, 베트남 사회주의 미술과 민족미술의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한 작가이다. 작가는 공로를 인정받아 호치민 문학예술상 등 베트남 정부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다. 쩐반깐은 베트남에서 ‘가장 정치참여적인 예술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945년 베트남의 8월 혁명 후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 호치민은 문화협회가 주최한 전시를 둘러본 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많은 누드와 꽃을 그렸지요. 이 작품들은 정말이지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름다움은 상류계급을 위한 것이지요. 왜 당신들은 우리 주변의 민중을 그리지 않는가요?”

쩐반깐은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이란 정치 선전물을 만들었다. 호치민 이후 오랫동안 베트남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이 득세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시절 베트남에 인도차이나미술학교가 있었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의 과정을 이식해 1925년에 열린 이 학교는 1945년 일본군에 의해 폐쇄되기 전까지 20년 동안 당시 프랑스의 가장 앞선 미술과 교육과정을 베트남에 전파하려고 했다. 베트남의 많은 예술학도는 이국 미술의 새로운 자극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쩐반깐이 바로 이 미술학교 출신이다.

1986년 베트남에서는 비로소 개방 정책이 추진됨으로써 문화적 통제가 완화되었다. 이제 작가들은 자유롭게 전시하고, 작품의 소재나 표현 방식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꽃 I’은 1988년에 그려졌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쩐반깐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한 번 미루어 상상해보는 것도 좋겠다.

안대웅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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