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가야 유일’ 고대국가의 위용 [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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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12. 대가야

대가야는 가야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했던 후기 가야 맹주였다. 고대국가에 진입했다고도 한다. 사진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대가야는 가야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했던 후기 가야 맹주였다. 고대국가에 진입했다고도 한다. 사진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대가야는 가야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했던 후기 가야 맹주였다. 고대국가에 진입했다고도 한다. 사진은 경북 고령읍과 지산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대가야는 가야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했던 후기 가야 맹주였다. 고대국가에 진입했다고도 한다. 사진은 경북 고령읍과 지산동고분군.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200기 넘는 봉토분 물결 이뤄

5세기 후반~6세기 초 ‘전성기’

백제 맞먹을 정도로 넓은 권역


신라의 배반, 주변 세력 이탈로

맹주 위상 꺾이고 562년 멸망



대가야는 400년 금관가야의 타격 이후에 역사 전면에 부상해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160여 년 또렷한 역사를 이었다.

그중 대가야의 전성기는 5세기 후반~6세기 초 60여 년이었다. 이때 대가야는 전·후기 가야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했다. 고령을 거점으로 황강 수계, 남강 중·상류, 금강 상류, 섬진강 수계, 남해안 일대로 뻗어나간 넓은 권역은 당시 백제 영역에 맞먹을 정도였다.

대가야는 많은 점에서 독보적이었다. 전기 금관가야를 잇는 후기 가야의 맹주였으며, 가야 정치체 중 유일하게 고대국가에 진입했다고 본다. 왕도(王都)의 지산동고분군은 가야 최대 고분군이다. 200기를 넘는 봉토분이 능선을 따라 파도치듯이 군집의 물결을 이루며 초월적 권력의 역사적 경관을 과시한다. 주산성(主山城)-지산동고분군-왕궁-왕도가 체계적이고 계열적으로 배치돼 있다. 가야 정치체 중 대가야의 하지왕이 유일하게 중국(남제)에 사신을 파견해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이란 관작을 제수받았다.

5세기 초반 대가야의 출범을 알리는 것은 지산동고분군의 새로운 조성과, 위세를 자랑하는 고총의 출현이었다. 대가야의 부상에 400년 고구려 남정이 큰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대가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직접 휘말리지 않아 세력을 온전하게 보전한 덕에 부상했으며, 무엇보다 금관가야 유민들이 한 단계 높은 문물을 전해 그 성장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이다. 아예 금관가야 대성동 계통을 계승한 세력이 ‘신생국 대가야’를 세웠다는 ‘강한 주장’이 있다.

하지만 외부 요인보다 재지적 발전을 더 강조하는 입장이 점차 우세해지는 양상이다. 요컨대 대가야 발전에는 청동기 지석묘 사회에서 출발해 변진 반로국(반파국) 단계를 거친 성장 과정, 그리고 비옥한 고령 일대의 농업 생산력과 인근 합천 야로의 질 좋은 철 생산이 든든한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당시 고령읍 일대의 안림천 대가천 회천, 3개 수계의 세력들이 결집해 대가야를 출범시켰다는 것이다.

그렇게 출범한 이후 5세기 후반~6세기 초 60여 년에 걸쳐 대가야는 쭉쭉 뻗어나가며 전성기를 맞게 된다. 먼저 서쪽으로 안림천을 통해 합천(묘산면-봉산면)-거창-함양-남원(동부 운봉고원)-장수(금강 상류) 등 경남 서부를 거쳐 호남 동부에까지 거침없이 뻗어간다. 수계와 수계를 잇고, 수계가 끊길 적에는 낮은 고개를 찾아 넘었다. 당시 대가야가 도약의 날개를 펼친 것은 백제와 신라가 혼란하거나 조정 국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470년대 대가야 권역에 느슨한 복속 관계로 편입된 합천 다라국의 옥전고분군 모습.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470년대 대가야 권역에 느슨한 복속 관계로 편입된 합천 다라국의 옥전고분군 모습.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470년대 대가야 권역에 느슨한 복속 관계로 편입된 합천 다라국의 옥전고분군 모습.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470년대 대가야 권역에 느슨한 복속 관계로 편입된 합천 다라국의 옥전고분군 모습.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 제공

470년대 대가야는 전성기 중에서도 비약적 발전을 구가한다. 이즈음 지산동에서 16㎞ 이남의 옥전고분군을 조성한, 후기 가야 주요 강성 소국인 합천 다라국까지 권역에 편입시킨다. 다라국은 대가야 권역의 유력한 일원으로 자율성을 갖고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합천 쌍책과 초계지역을 포괄하면서 왕성과 고분, 왕도의 짜인 구조를 갖추고 150년 역사를 누린 가야의 강국 다라국을 권역에 편입시킨 것은 대가야가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472년 하지왕(荷知王)이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낸 것은 대가야가 동아시아 세계에 정식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때 대가야는 섬진강 수계(임실 남원 곡성 하동 광양)와 남해안(여수 순천)까지 진출해 최대 판도의 절정기를 구가했다. 5세기 말 최고의 압도적인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 지산동 44호분이다. 순장자가 가야고분 중 최다인 무려 35명 이상이며, 일본 오키나와 위쪽 아마미오 섬과 백제의 물품까지 출토됐다. 이 무덤은 하지왕릉으로 추정된다.

특히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는 남해안에 진출하면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제해권을 장악했다. 과연 5세기 후반 대가야 문화는 일본열도 전역에 속속들이 퍼졌다. 말[馬]과 그 사육방법, 문자 사용이라는 선진 문물을 전해 일본 고대문화를 자극했다. 5세기 후반 대가야의 독자적인 찬란한 금공품 문화는 국제적으로 유통되면서 대가야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가야 전역과 일본열도에서 확인된 대가야산 금공품은 금관 2점, 금동관 5점, 금동제 용봉문환두대도 49점, 금제 수식부이식(금귀걸이) 229점에 달할 정도로 눈부시다. 백제와 신라에 필적하는 독자 문화로 대가야 위세는 극점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점을 바로 지난 시점에서 대가야의 하강 국면이 서서히 펼쳐질 것이었다. 극점이 쇠퇴의 전조였다는 것이다. 6세기 고구려의 남진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면서 백제와 신라는 가야 진출에 적극 나선다. 첫째 백제가 밀고 들어왔다. 512~522년 10년에 걸쳐 백제 무령왕이 여수 순천 광양, 그다음 남원, 그리고 섬진강 하구 하동을 순차적으로 장악한다. 대가야 전성기를 상징하던 주요 영역 거의 전부를 백제에 빼앗겼다. 일본열도와 이어지는 남해안 해상 제해권과 교역항을 백제에 상실한 것이었다. 일본열도 야마토 정권도 이미 가야보다 백제에 더 기울어 있었다.

둘째 신라의 작전이 교묘했다. 중대한 역사적 국면에 맞닥뜨린 대가야는 522~529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대가야는 이때 교역항 확보를 위해 신라의 낙동강 하구 경로, 소가야의 사천만과 마산만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신라가 결혼동맹에서 대가야를 배반했다. 주변 세력들이 이탈하면서 대가야의 맹주 위상이 꺾이고, 이후 30여 년 가야 전체는 역사적 향방을 설정하지 못했다. 그런 분열과 혼돈 속에서 대가야는 결국 562년 신라에 멸망당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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