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95. 검게 그은 피부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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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팀장

평균적인 한국말 사용자라면 자신이 말을 엉터리로 쓴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국어만 몇 년 배웠는데…’ 하는 생각도 자신감을 거들었을 터.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정확하지 않은 말을 쓰는 일이 드물지 않다.

〈[국감] 방통위 통신사 보조금 실태조사 요식행위 그쳐〉

〈“진료심사평가위 교육, 요식행위 그쳐”〉

〈與 ‘원팀’ 퍼포먼스, 요식행위 그치나〉

‘요식행위’로 검색하면 뜨는 기사 제목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쓰인 요식행위는 모두 잘못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요식행위(要式行爲): 『법률』일정한 방식을 필요로 하는 법률 행위. 어음의 발행이나 정관 작성, 증여, 혼인, 입양, 유언 따위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언이나 입양처럼 ‘일정한 방식에 따라 해야만 효력이 인정되는 법률행위’가 바로 요식행위인 것. 반드시 해야만 하는 행위라는 얘기다. 그러니, 저 제목들에 나온 ‘요식행위 그쳐’는 ‘형식에 그쳐’쯤으로 고쳐야 옳다.

‘참가자들은 위령비 앞에서 묵념하며 원혼들의 넋을 기리는 시간을 보냈다.’

이 문장에 나온 ‘기리는’도 잘못. 표준사전을 보자.

*기리다: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칭찬하고 기억하다.(선열의 뜻을 기리다./스승의 은덕을 기리다./그들은 고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기린다는 건 칭찬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하지만 원혼들의 넋은 기릴 게 아니라 ‘달래고, 풀어 주고, 어루만져야’ 할 터.

“16명의 환자를 모두 대피시키고 마지막으로 탈출한 간병보호사는 온 몸이 검게 그을은 상태였습니다.”

이 기사에 나온 ‘그을은’도 자칫 잘못인 줄 모르고 쓰기 쉬운 말이다. ‘그을다’에 ‘-은’이 연결되면 ‘ㄹ’이 탈락되어 ‘그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온몸이 검게 그은 상태였습니다’라야 했던 것. ‘아니, ‘그을은 상태’가 아니라 ‘그은 상태’로 써야 한다고?’ 싶다면, 다른 보기를 보자.

‘시들은 장미/크게 썰은 떡/땀에 찌들은 옷.’

여기 나온 ‘시들은/썰은/찌들은’이 모두 어미 ‘-은’이 연결되면서 어간 받침 ‘ㄹ’이 탈락시켜야 하는데 잘못 쓴 예. 아시다시피, ‘시든/썬/찌든’이라야 했다.

그러니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 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라고 외치는 나훈아의 절창 ‘녹슬은 기찻길’도 ‘녹슨 기찻길’의 잘못이었던 것.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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