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수의 지금 여기] 한·미·일 안보, ‘과거사’ 제물 삼나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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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정부, 강제동원 해법 서둘러 발표
피해자 비롯한 민심의 반발 거세
한·미·일 안보 협력 체제 추진
미국의 큰 그림 속 희생양 아닌지
한반도 정세 갈수록 위중한 상황
다극 체제 속 외교적 균형 찾아야

일제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들이 7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을 규탄하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강제동원 피해 할머니들이 7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을 규탄하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의 역사를 새로 썼다. 한·일 관계의 정상화라는 취지와 미래 지향성을 강조하다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내용은 뺀 것이다. 국민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수 성향의 사람들도 놀란 것 같다. “3·1절에 할 소리는 아니다.” “안보 믿음 있어서 뽑았는데 국가관이 이러면 어쩌나.” 메시지를 내놓은 시기·방법 모두 부적절하다는 비판이었다.

윤 정부는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해 볼 틈도 없이 또 다른 보도가 잇따랐다. “매우 지지한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에 대한 미국의 환영 메시지다. 이례적일 정도로 즉각적이다. 그동안 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미·일 3국의 안보 협력을 강조했다. 올해 초에는 일본의 군사 대국화 움직임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짐작되는 바가 없지 않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하고 한·일 간 화해를 종용해 왔다. 최종 목표는 ‘한·미·일 군사동맹’이다. 그 전제가 한·일 두 나라의 관계 개선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려면 발목을 잡아 온 과거사 문제가 먼저 해소돼야 한다. 넓게 보면 이 모두가 미국의 큰 그림 안에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는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해법을 급히 발표했다.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국내 재단이 대신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게 골자다. 예상했던 대로 일본 피고 기업들의 배상 기금 참여와 사과 방안은 거기에 없었다. 당연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양국이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서 논의한 결과물인지, 아니면 국가 위신과 자존심을 저버린 우리 정부의 일방적 굴욕인지. 한·미·일 안보 협력 체제 구축을 위해 과거사 문제를 희생시킨 건 아닌지. 물론 일본과의 협력이 한반도 평화에 중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우리로서는 최종적으로 한·미·일 군사동맹에 올라타는 일이 과연 국익을 위한 최선인지, 한반도 정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우선 지금의 국제정세는 예년과 사뭇 다르다. 일단 세계 패권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이 이전 같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경제·군사·외교 통제권 밖에 있고, 동맹국들과 친미 국가들도 이탈 조짐이 뚜렷하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아우성이 커지고 있는데, 특히 독일이 지난해 11월 총리의 중국 방문을 기점으로 양국 간 경제협력에 시동을 거는 모양새다. 전통적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러시아와 손잡은 것도 이변이다.

미국이 그나마 기대는 곳이 한국·일본·대만 같은 동북아 동맹국들이다.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붕괴만은 막아야 하는 처지다. 미국이 한미연합훈련과 전략무기 투입의 중단 같은 북한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금의 한반도 정세는 ‘전쟁 불사론’까지 횡행할 정도로 위중하다. 지난해 북한은 70여 차례의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다. 올해는 7차 핵실험까지 감행할지 모른다. 남북·미 정부의 거친 발언, 최고조에 달한 군사 행동과 강경 조치들,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진 대화와 협상 등 악조건이 이미 겹겹이 누적된 상황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그 위기가 정점에 닿을지 모를 올해를 매우 중대한 시기로 전망한다.

이럴 때일수록 국제정세를 올바르게 읽는 판단력과 한쪽에 휩쓸리지 않는 객관적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행보는 아쉽다. 대통령 당선 뒤 국군보다 주한미군 기지를 먼저 찾은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나라의 핵심 이익에 대한 면밀한 손익계산이 있다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다극 체제로 가는 국제관계의 현실 앞에서 특정 방향으로 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 장기적 국익을 고려할 때 무역의존도가 높은 중국과의 관계 설정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가장 큰 문제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 등 대외 정책에 국민이 믿고 따를 만한 원칙과 구체적 지향이 없다는 데 있다. 대체로 ‘힘에 의한 국가 안보’만 강조되고 한반도 평화 전략은 잘 안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정부의 이번 과거사 해법이 한반도 위기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지 걱정되는 이유다. 결국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평화와 공존의 대원칙’이다. 상대를 적으로 보지 않고 상호 존중과 상생의 대상으로 삼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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