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대심도, 안전 대한민국의 허상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부산 지하 공사장 연약 지반 붕괴
도시철도 평상 속도로 운행 방치
늑장 보고, 시민 은폐로 비난 자초

공사 구간 사전 조사 제대로 안 돼
사고 현장 위엔 초등학교·아파트 밀집
부산시 최우선 사명 ‘시민 안전 보장’

1993년 3월 28일 일요일 오후 5시30분께였다. 낙동강 구포역 인근에는 봄꽃이 만발했지만, 꽃샘추위로 쌀쌀했다. 출입처인 경찰서에서 회사로 복귀하던 〈부산일보〉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에게 데스크로부터 삐삐(무선호출기)가 연속으로 울렸다. “경부선 구포역으로 당장 달려가라”는 지시였다. 부리나케 현장에 도착하니, 비명과 통곡, 널브러진 시신과 부상자로 아비규환이었다. 휴지처럼 찌그러진 객차 안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 수십 구가 뒤엉켜 있었고, 부상자들은 객차 틈새에 깔려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하늘도 슬펐는지 비까지 뿌리면서, 철로 주변은 빗물과 핏물 범벅이었다. 78명이 사망하고 198명이 다친 ‘구포 열차 참사’의 서막이었다.

한국전력 시공업체가 철도청에 허가나 통보조차 없이 경부선 철로 바로 아래에서 지하 전력구 공사를 벌이면서 무단 발파 작업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 부산일보 사회부는 특별취재팀을 꾸렸고, 사고 한 달 전에도 인근에서 지하 붕괴 사고가 있었던 점을 밝혀내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연약 지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공 기간을 당기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공사를 강행하면서 발생한 100% 인재였다.

구포 열차 참사 발생 30년 뒤인 지난달 25일 0시 40분 부산 대심도 공사 구간의 연약 지반에서 터널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부산 북구 만덕동과 해운대구 재송동 센텀시티를 잇는 대심도 공사 구간 지하 60m 깊이의 터널 천장에서 흙과 돌 1000t 정도가 쏟아져 내렸다. 25t 덤프트럭 수십 대가 동원돼야 옮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와 추가 붕괴가 없었지만, 지하 굴착 공사 중 붕괴 사고라는 점, 대형 건설사가 연루되어 있다는 점 등 30년 전 구포 열차 참사와 판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찔한 정황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시공사인 롯데건설은 사고 사실을 감독기관인 부산시에 10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보고했고, 부산시는 한술 더 떠 “섣불리 사고를 공개하면 시민들의 과도한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사흘간 사고 자체를 은폐했다. 황당하게도 산하기관인 부산교통공사에도 늑장 통보했다. 사고 현장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부산도시철도 3호선 만덕~미남역 구간에서는 지하철이 평상시처럼 70km로 달리다 27일 오후 5시께에야 뒤늦게 속도를 25km로 줄였다.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사고 지점 바로 위에는 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 빌라가 밀집해 있다. 연약 지반에서 토사가 더 무너져 내렸다면 땅 꺼짐은 물론이고, 싱크홀 현상으로 대형 인명 피해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구포 열차 참사가 발생한 지 30년이나 지난 부산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 와중에 “대심도 사업이 부산에서 도심지 구간에 최초로 건설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우려하시는 부분이 없도록 면밀히 살피겠다”는 부산시의 사후 약방문식 궤변은 누구를 걱정하고 챙기겠다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다. 사고 이후에도 현장 30m 지점에서 시민을 가득 태운 지하철을 쌩쌩 달리게 하면서, 사건을 사흘이나 은폐한 것이 혹여나 건설업체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는 아닌지 걱정스럽다. 혹여나 건설사의 입장을 ‘면밀히’ 고려해 땜질 처방으로 끝낼 우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방정부라면 시민 안전을 인질로 잡은 대심도 배짱 공사가 시민에게 과연 필요한지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대심도 건설은 기술이나 경험 부족으로 사고 위험성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터널공법(TBM)으로 30~60m까지 땅을 파 지하에 도로나 지하철을 건설하는 대심도는 국내에 제대로 건설된 적이 없다. 오죽하면 중앙정부도 최근 ‘대심도 지하 고속도로 추진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안전성 확보 대책 마련에 고심할 정도다. 게다가 부산 대심도는 착공 이전에 지질 조사가 촘촘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연약 지반이 더 있을 수 있고, 사고 지점 전방 어디까지 불안정한 지층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구포 열차 전복, 세월호 침몰, 이태원 압사 등 최악의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반복됐다. 모두 말의 성찬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작 사고가 나면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 당사자는 찾을 수 없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온데간데없다. 죄 없는 국민만 눈물 흘릴 뿐이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민의 안전 보장이다. 부산시는 재난 상황을 예방하고, 단계별로 대처하고, 이에 따른 예산과 조례를 마련해 집행하는 국가 행정기관이다. 시민의 생명이 걸린 일엔 언제나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처해야 한다. 시민의 안전보다 소중한 가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산은 안전한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박형준 부산시장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