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역행하는 노동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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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정부 ‘근로시간 개편안’ 핵심은
일과 휴가를 몰아 쓸 수 있다는 것

이상적 정책이나 현실은 사뭇 달라
노동시간·과로사 위험만 커질 뿐

노동 현장 몸으로 직접 겪고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노동개혁을 외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윤석열 정부는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청년 노동자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겠다고 했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일들은 여전했다. 일터에서 다치거나 죽는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고, 초과근무를 하면서도 합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만연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 노동자로서 ‘더 나은 노동환경’을 기대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작년 11월부터 시작해 최근 윤 정부가 발표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보며 그 기대는 착각임을 알았다. 개혁은 개혁인데,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역행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부는 현재 1주 최대 12시간으로 제한된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월 단위 이상으로 확대해서 1주일에 최대 80.5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주 평균 근로시간을 잘 관리하고 장기휴가를 활성화해서 과로를 없애고 생산성을 올리겠다는 것이 고용노동부의 설명이다. 물론 다양화하고 세분화된 현재의 산업군에 따라 노동환경이 변화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흐름에 발맞추어 탄생한 탄력근무제는 오히려 노동시간 증대와 과로사 증가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낳았고, 주 52시간 노동 제도는 노사 협의만 있으면 일을 12시간 더 시킬 수 있는 퇴로를 열어 놓아 노동환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이렇듯 노동자의 과로 사회가 개선조차 되기 전에 ‘주 69시간’ 정책으로 다시 노동 시간이 늘어난 셈이다.

일할 때 바짝 일하고, 일이 없으면 휴가를 몰아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번 정책의 핵심 메시지이다. 매우 이상적인 선언이지만, 이런 환경이 가능한 일터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최근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47.2%가 ‘유급 연차 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49.4%, 월 150만 원 미만 임금노동자의 55.6%는 자유로운 휴가를 쓰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도 휴가를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은데 어떻게 장기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주 69시간’ 정책은 장기휴가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결국 ‘노동시간 증가’를 내포하는 정책이다. 그동안 노동 정책의 국제적 추세는 일·가정 양립과 복지 중심의 담론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장과 개발을 위해 노동자들이 혹사당하던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국제적 흐름이었다. 이번 정부는 오히려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제도와 유사하다며 주 69시간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면밀히 따져 봐야 할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다. 독일의 경우 1일 8시간 이상 초과근로를 금지하고, 네덜란드나 벨기에와 같은 국가도 1주 40시간 또는 44시간으로 근무시간을 엄격하게 규정한다. 반면 대한민국은 2021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장시간 노동한다.

게다가 정부는 이번 개편 방안을 준비할 때 ‘청년 노동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노동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선포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MZ 노조로 불리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는 정부의 새로운 노동개혁 방침에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주요 선진국에 견줘 평균 노동시간이 많은 한국이 연장근로 시간을 늘리는 것은 노동조건을 개선해 온 국제사회의 노력에 역행한다”는 것이 이유다. 또한 노동자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주 69시간’ 정책이 직접 노동하는 당사자들의 온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정치의 발견〉의 저자 박상훈은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은 정치가 모든 것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상황 내지 인간이 만든 사회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력한 수단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책은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합의다. 특히 노동은 먹고사는 문제 그 자체이기 때문에 민생과 직결되어 있다. 그 무게를 알고 있다면 현실적 고민 없이 이상만 있는 정책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고용부는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가 서면 합의를 하며 근로시간을 조절하고 장기휴가를 적립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현재 근로시간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 것인지 정해진 바가 없다. 근로시간 저축계좌 제도를 어떻게 시행할 것인지도 구체적인 합의가 없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노동 현장의 온도를 느끼고 노동자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이 제도가 ‘과로사 조장법’이 되지 않도록 보완점을 모색해야 한다. 선언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정치’ 본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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