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사라지지 않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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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얼굴 3부작’ 남긴 고 이강현 감독
‘파산의 기술’ IMF 사태 얼굴로 표현
고통받는 노동자 얼굴 담은 ‘보라’
극영화 ‘얼굴들’까지 빛나는 작품들

고 이강현 감독이 영화 ‘얼굴들’을 촬영하는 모습. (주)시네마달 제공 고 이강현 감독이 영화 ‘얼굴들’을 촬영하는 모습. (주)시네마달 제공

어떤 영화는 단 한 줄로도 설명 가능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그 깊이를 모두 전달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 그럴 땐 진부하지만 영화 보기를 꼭 당부한다. 보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으니 내가 느낀 감정, 영화가 주는 여운을 직접 느껴보길 권한다. 설명하긴 어려우나 꼭 보길 권하는 영화. 이강현 감독의 영화들은 대중적이진 않지만, 그의 작품을 접한 관객이라면 누구나 감정이 움직이는 어떤 순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년 전, 이강현 감독을 영화 '얼굴들'로 처음 만났다. 기존에 없던 영화 형식에 놀라워하며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본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신작 소식을 들려줄 것 같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 슬픔 속에서 그의 영화를 다시 꺼내볼 줄은 차마 상상도 못한 일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느리지만 그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감독임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얼굴 3부작이라 불리는 ‘파산의 기술記述’ ‘보라’ ‘얼굴들’까지 누군가의 얼굴에 관심을 기울여 온 이강현 감독은 비극적 사건을 겪은 누군가의 얼굴, 모든 걸 내려놓은 참담한 얼굴들을 만나게 한다. 어떤 사건 속에 휘말린 얼굴 혹은 어떤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은 평범한 얼굴들은 ‘나’의 것일 수도 있어서 영화가 끝나고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감독의 첫 번째 작품 ‘파산의 기술記述’에는 IMF 사태 이후 달라진 2005년 풍경과 그 당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느껴진다.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그러하듯 이 영화도 어떤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고 고발하는 여타의 다큐 스타일을 따르지 않는다. 즉 그는 ‘파산’한 사람들만 조명하지 않는다. 파산한 사람들과 더불어 IMF 사태 이후 달라진 노동 환경에 노출된 사람들과 IMF 사태로 무언가를 얻은 사람들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파산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얼굴들’을 같이 담아내야만 온전히 그들의 삶을 기술할 수 있음을 감독은 묵묵히 전달하는 것이다.

다큐 ‘보라’는 노동 현장에서 숱한 산업재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The Color Of Pain(고통의 색깔)’이란 부제가 달린 것처럼 영화는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삶, 그들이 산업재해로 질병을 얻을 수밖에 없었음을 알린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노동자에 대한 감독의 고발이나 비판이 먼저가 아니다. 사회 이면의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를 꼬집으며 바뀌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각시킨다. 그리고 밤샘 근무 속에도 인터넷을 하거나 가요를 듣는 관리자, 사진 수업을 듣는 학생들, 게임을 하는 노동자의 얼굴을 보여주며 노동자의 얼굴을 각인시킨다.

이강현 감독은 세 번째 작품에 이르러 극영화를 만든다. 그런데 그는 기존의 극영화들과 달리 기승전결의 내러티브에 의존한 해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화 ‘얼굴들’을 내놓는다. 먼저 이 영화는 ‘기선’과 기선의 옛 애인 ‘혜진’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실을 넘나들며 전개되는데, 영화에서는 분절된 신, 파편적으로 엮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이미지들로 담아내고 있어 흥미롭다. 극영화이지만 마치 한 편의 다큐 같은 형식 그리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어긋나는 관계들, 흐릿하고 옅은 존재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마음이 사로잡힌다. 사실 보고 싶은 건 이강현 감독의 얼굴이라서 그의 영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내가 모두 설명하지 못해도 그의 영화가 영원히 빛날 거라는 사실, 그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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