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주말] 스크린에 돌아온 ‘패왕별희’와 ‘레디 플레이어 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패왕별희〉가 개봉극장에서 일단 간판을 내렸다가 94년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외국영화상을 받는 시점에 재상영 돼 설 연휴까지 이동상영(연홍) 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1994년 2월 8일 <부산일보>에 실렸던 ‘설 연휴 극장가’ 기사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1993년 개봉한 ‘패왕별희’가 한 차례 막을 내렸지만, 해외유수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자 곧바로 스크린에 복귀했다는 내용입니다.

패왕별희의 인기는 21세기 들어서도 식지 않고 있습니다. 2020년 5월, 기존보다 분량이 15분 늘어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 극장에서 상영됐습니다. 171분에 달하는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주연배우 장궈룽(장국영·1956~2003)의 사망 20주기를 맞은 올해 4월 1일 재개봉해 관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팬들이 반길 만한 소식이 또 있습니다. 미국 영화 제작·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 100주년을 기념해 SF 영화 4편을 모아 상영하는 ‘SF 오디세이’ 특별전을 지난 10일 CGV가 열었습니다.

특별전 첫 주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가상현실 블록버스터인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지난 12일 재개봉했습니다.


영화 ‘패왕별희’(왼쪽)와 ‘레디 플레이어 원’. 제이엔씨미디어그룹·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영화 ‘패왕별희’(왼쪽)와 ‘레디 플레이어 원’. 제이엔씨미디어그룹·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극장서 처음 본 ‘패왕별희’…‘MZ세대’에도 통할 명작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명작”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다” “매년 영화관에서 볼 수 있게 해달라”…포털사이트에서 ‘패왕별희’를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는 관람객 감상평입니다.

사실 기자는 ‘패왕별희’가 개봉했을 때쯤 태어났습니다. 지금껏 제목은 숱하게 들어봤지만, 영화를 제대로 감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TV 영화채널에서 잠깐씩 본 ‘패왕별희’는 조금은 괴상한 옛날 영화처럼 보여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주변 또래들 중에서도 ‘패왕별희’를 봤다는 친구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1993년 개봉한 ‘패왕별희’는 경극을 사랑하는 두 남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경극학교에서 만나 평생을 함께 할 단짝처럼 보였던 두지(장궈룽 분)와 시투(장펑이 분)가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된 사연을 그렸습니다. 영화는 제46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동양권 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장궈룽 20주기를 맞아 지난 1일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기존 극장판 156분에서 총 15분이 늘어난 버전입니다. 두지와 시투의 어린 시절, 성인이 된 두지가 시투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 등 인물의 감정선을 더 세밀하게 묘사한 대목이 늘어났습니다. 모두 중국 당국에 의해 삭제됐던 장면들입니다.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지난 12일 해운대 영화의전당에서 관람했습니다. 영화의전당은 다시 보고 싶은 재개봉영화를 상영하는 ‘씨네리플레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4월 한달 동안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을 스크린에 겁니다. 평일 점심시간에 30년 전 작품을 보러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는데, 적지 않은 관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 놀랐습니다.

영화는 1925년 베이징 경극학교에서 시작합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미소년인 두지는 자신을 묵묵히 도와주는 듬직한 형 시투를 흠모합니다. 두 사람은 혹독한 훈련을 함께 이겨내며 관계가 돈독해지고, 초나라 패왕 항우와 우희의 이별을 그린 ‘패왕별희’ 공연으로 경극배우가 되는데 성공합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두지와 시투는 가장 유명한 경극배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투가 홍등가 여인 주샨(공리 분)과 결혼하면서 두 남자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두지는 시투 대신 북경 문화계 거물이자 자신의 후원자인 원대인과 가까워집니다.


영화 ‘패왕별희’. 제이엔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패왕별희’. 제이엔씨미디어그룹 제공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갈등의 기폭제가 됩니다. 두지는 일본군에게 잡혀간 시투를 구하기 위해 군인들 앞에서 공연을 하지만, 시투는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하느냐”며 두지를 몰아세우고 주샨과 함께 사라집니다. 시투에게 묘한 연정을 품고 있던 두지는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아편에 손을 댑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국민당이 정권을 잡은 뒤 시련은 더욱 커집니다. 두지는 일본군 앞에서 공연한 매국노로 몰려 재판에 넘겨졌다가 가까스로 풀려납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에는 원대인이 문화계를 타락시킨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당합니다.

가장 큰 비극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일어납니다. 홍위병에 둘러싸여 인민재판을 받게 된 두 남자는 서로를 공개 비판하며 거의 이성을 잃고, 이 과정에서 시투는 아내 주샨을 향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습니다.

큰 수모를 겪고도 살아남은 두지와 시투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다시 만나 경극을 연습해보지만, 마음 속 깊이 남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또 다른 비극을 낳습니다.

영화는 이처럼 1924년부터 1977년까지 중국을 휩쓴 소용돌이가 예술과 개인에 미친 영향을 애달프게 그렸습니다. 특히 가혹한 시대에 태어나 정체성과 예술혼을 도륙당한 두지라는 인물을 연기한 장궈룽이 인상적입니다. 혼돈에 빠진 장궈룽의 눈빛 연기는 몰입감을 끌어올립니다. 왜 많은 사람이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지 짐작이 갑니다. 주샨을 맡은 공리의 표정 연기도 여운을 남깁니다.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사회가 발현하는 광기에 등골이 서늘합니다. 첸 카이거 감독은 1994년 내한 당시 ‘패왕별희’가 중국본토에서는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혹평을 받고 있는데 대해 “영화인 또는 예술인의 사고방식을 보통사람들이 이해 못할 수도 있지만 감독으로서 중국문화를 세계 각국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동포들이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며 “앞으로도 중국 상황과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를 중국에서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오리지널’ 버전을 정작 중국에선 볼 수 없다는 사실은 ‘패왕별희’ 못지않게 비극적이고 섬뜩합니다.


‘SF오디세이’ 특별전으로 재개봉할 작품들. 왼쪽부터 ‘레디 플레이어 원’, ‘인셉션’, ‘블레이드 러너: 더 파이널 컷’,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CGV 제공 ‘SF오디세이’ 특별전으로 재개봉할 작품들. 왼쪽부터 ‘레디 플레이어 원’, ‘인셉션’, ‘블레이드 러너: 더 파이널 컷’,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CGV 제공


4DX 3D로 다시 만난 ‘레디 플레이어 원’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가상현실 블록버스터 영화입니다. 5년 만인 올해 4월 12일 재개봉한 이유는 ‘워너브라더스’ 100주년을 맞아 CGV가 연 ‘SF오디세이’ 특별전 때문입니다.

특별전은 첫 주자인 ‘레디 플레이어 원’에 이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더 파이널 컷’이 차례로 스크린에 복귀하고, SF 걸작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마무리됩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식량난과 경제위기로 전 세계가 현실도피에 빠진 2045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든 가능한 가상현실 게임 세상 ‘오아시스’에 접속하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주인공인 10대 남학생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도 오아시스에 열광하는 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아시스의 창시자인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는 오아시스에 숨겨둔 3개의 미션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게임 소유권과 유산을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미션을 깰 힌트는 할리데이가 사랑했던 1980년대 대중문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와츠는 생전 할리데이의 모습에서 파악한 힌트로 첫 번째 미션을 통과하지만, 살인도 마다않는 초거대기업 ‘IOI’의 위협에 맞닥뜨립니다.

영화는 개봉 당시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았고, 기자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번 재개봉 작은 ‘4DX’에 3D까지 더한 포맷이라 더욱 생생한 체험이 가능합니다.

기자는 카체이싱 씬이 등장하는 영화는 가능하면 꼭 4DX 포맷으로 관람합니다. 재개봉한 ‘레디 플레이어 원’ 역시 스피드를 가감 없이 느낄 수 있는 카체이싱 장면에서 4DX 3D 포맷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열쇠를 얻기 위해 아바타들이 펼치는 경주 장면에 맞춰 의자가 마구 들썩거리니 스릴이 넘칩니다. ‘킹콩’과 티라노 사우르스가 나타나 자동차를 박살내는 장면은 5년이 지난 뒤 다시 봐도 압권입니다. 다만 극의 초반인 카체이싱 장면에 4DX 효과가 집중된 탓에, 이후부터 느껴지는 4DX 효과는 상대적으로 밋밋한 편입니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제이엔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제이엔씨미디어그룹 제공

200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의 80%를 판권 대여에 쏟아부은 만큼 추억의 캐릭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건담, 아이언 자이언트부터 배트맨, 트레이서까지…1980~2010년대 문화계를 이끈 캐릭터가 총출동하는 영화는 아직도 ‘레디 플레이어 원’이 유일합니다. ‘Bee Gees’의 ‘Stayin’ Alive’ 같은 추억의 팝송이 끼어드는 타이밍도 절묘합니다.

영상미는 최신 개봉작들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습니다. 3D 안경을 통해 보니 보는 즐거움이 배가 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실제로 이런 세상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와 동명의 원작 소설인 ‘레디 플레이어 원’의 작가 어니스트 클라인은 2018년 언론 인터뷰에서 끔찍한 현실과 완벽한 가상현실이 도래할 가능성에 대해 “아쉽지만 정말로 일어날 것”이라며 “우리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화석 연료를 사용하고 기후 변화를 무시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앞으로 살아갈 곳을 계속해서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 많은 사람이 우리가 원하는, 꿈꾸는 현실을 만들어낸 인터넷 속 가상 세계로 도피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클라인의 비관적이던 인터뷰는 5년이 지난 뒤에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라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메타버스와 인공지능(AI)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클라인이 했던 또 다른 희망 섞인 말도 맞아 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현실뿐이다.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