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승부조작 흑역사의 교훈 잊은 축구협회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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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용 스포츠라이프부 에디터

메이저리그 ‘블랙삭스 스캔들’ 등
승부조작은 리그 공멸 부르는 병폐
잘못된 동료 의식이 빚은 사면 시도
협회 대대적 환골탈태 필요성 제기

1919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는 승부조작으로 얼룩졌다. 일명 ‘블랙삭스 스캔들’로 불리는 메이저리그 최악의 흑역사다. 당시 월드시리즈 진출 팀은 아메리칸리그 우승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내셔널리그 챔피언 신시내티 레즈였다. 전문가와 팬들의 예상은 타격왕 조 잭슨을 앞세운 막강 공격력과 최강 1·2선발 투수 에디 시콧, 클라우드 ‘레프티’ 윌리엄스가 마운드를 지키는 화이트삭스의 무난한 우승.

하지만 시리즈는 예상 외로 흘렀다. 화이트삭스는 에이스 시콧을 내세운 1차전에서 1-9로 대패하더니, 결국 3승 5패로 월드시리즈 패권을 신시내티에 넘겨줬다.(당시 월드시리즈는 9전 5승제였다). 에이스 투수의 갑작스러운 사사구 남발과 배팅볼 같은 피칭, 무기력한 타선이 ‘고의 패배’ 의혹을 짙게 했다.


이듬해인 1920년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됐고, 승부조작은 사실로 밝혀졌다. 화이트삭스 1루수 칙 갠딜을 비롯해 시콧, 윌리엄스, 잭슨 등 8명이 도박사들과 월드시리즈 고의 패배 계약을 맺은 것. 한데 그해 9월 법정에선 승부조작 선수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선수들의 자백이 있었음에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법원 판사 출신 커미셔너 케네소 랜디스는 8명의 선수를 가차 없이 영구 제명시켰다. 두 번 다시 승부조작 악습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 사실 초기 메이저리그는 지금과 같이 선수들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았지만 승부조작 의혹을 받는 경기들이 적지 않았다.

랜디스 커미셔너의 결단은 메이저리그를 반석에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그가 법원 판결에 승복해 승부조작 가담자에 대한 징계를 어물쩍 넘어갔다면 100여 년 메이저리그 역사와 위상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승부조작은 프로 스포츠의 근간을 흔드는 최악의 불법 행위다. 선수들의 피·땀·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공정한 경쟁과 대결을 통해 희열을 맛보려는 팬들은 경기장을 떠나게 된다. 팬이 없는 스포츠는 설 자리가 없다. 이는 결국 직업 선수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만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은 대만 리그를 폐지 위기로 몰았다. 1990년 시작된 대만 프로야구는 한때 11개 팀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였다. 하지만 1996년부터 2009년까지 6차례나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구단이 잇따라 해체되고, 결국은 4개 팀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지난해에야 겨우 6개 구단으로 늘어났다.

2006년 ‘칼초폴리(축구게이트)’를 일으킨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의 위상을 추락시켰다. 칼초폴리는 당시 유벤투스 루치아노 모지 단장이 심판과 리그 관계자, 타 구단 관계자 등을 매수한 대형 승부조작 범죄였다. 이 사건으로 유벤투스는 2부인 세리에B로 강등된 후 승점 9점이 삭감됐고, 2시즌 동안 우승 자격이 박탈됐다. 무엇보다 당시 세계 최고 리그 수준이던 세리에A의 위상이 유럽 5대리그 최하위로 처지는 원인이 됐다.

승부조작 흑역사를 길게 언급한 건 대한축구협회의 난데없는 ‘헛발질’ 때문이다. 승부조작 가담자 48명 등에 대해 사면을 시도한 건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로 축제 분위기였던 축구계와 팬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자책골’이었다. 승부조작의 병폐를 조금만 깊이 생각했다면, 쉽게 사면을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사면 대상자 48명은 2011년 한국 프로축구의 존립 자체를 위기로 몰아넣은 그 당사자들이다.

축구협회는 한국 대표팀과 우루과이의 평가전 1시간 전에 이사회를 열고 기습적으로 사면을 결정했다. 대표팀의 A매치에 편승해 속전속결로 처리한 걸 보면 축구협회도 문제가 될 걸 예상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거센 후폭풍에 축구협회 정몽규 회장은 사흘 만에 사면 결정 철회를 발표하며 “그들이 10년 이상 충분히 반성했고, 값을 어느 정도 치렀으니 관용을 베푸는 게 어떻겠는가”란 축구인들의 건의를 2년여 전부터 계속 받았다고 밝혔다. 일부 축구인이 어쭙잖은 동료 의식으로 스포츠계의 가장 큰 병폐에 면죄부를 주려 한 것이고, 정 회장은 이런 잘못된 요구를 단호하게 끊어 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칫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위기의 축구협회에 환골탈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당대 최고 스타였던 조 잭슨을 비롯해 ‘블랙삭스 스캔들’ 연루자 8명의 제명을, 100년이 지나 그들이 숨진 뒤에도 풀지 않고 있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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